“그림자, 조금 움직였어. 왼쪽으로.”
렌코는 자신이 땅에 꽂아둔 나뭇가지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우리 둘 쪽으로 뻗은 얇고 검은 그림자가 조금 왼쪽으로 움직인 것 같지만 잘 가늠되질 않는다. 처음에 그림자가 있던 지점에 눈금을 표시해뒀으니 겨우 분간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까 아마 저쪽이 동쪽.”
내 오른쪽에 앉은 렌코는 손가락을 내 방향으로 옮기면서 그렇게 단언했다. 그림자가 그쪽으로 길어졌으니, 어쨌거나 해가 그쪽에서 떠올라 지금 반대쪽으로 지고 있다는 거고, 그러니 동쪽이라는 논리겠지. 원시적이지만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그게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에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다.
“좋아, 렌코 덕에 방위는 알아냈네. 그럼 이제 어쩌지?”
나는 손에 턱을 괸 채로, 잡초만 듬성듬성 심겨진 광활한 벌판을 바라보며 내 친구에게 물었다.
“글쎄, 메리의 꿈이니까 메리가 하기 나름 아닐까? 예를 들면 가방에서 우연히 지도가 있어서, 그 지도에 표시된 출구로 향한다던가.”
흥미로운 의견이다. 사실 우리가 땅에 꽂은 나뭇가지도, 원래는 근처에는 없던 물건이다. 이 광활한 벌판에는 땅바닥에 꽂을 나뭇가지를 구할만한 나무도 없었던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내가 가방에서 아무 생각 없이 꺼낸 물건이 나뭇가지였을 뿐. 내 꿈이니 가방에서 나오는 물건 정도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지도든 뭐든 무언가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 나오길 바라며 다시 가방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아, 뭔가 잡혔다.”
“오.”
손에 무언가 집히는 감촉으로 그렇게 말하자마자 렌코가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 감탄했다. 하지만 내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아무래도 렌코가 원하는 그 물건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가방 밖으로 꺼낸 물건을 보자마자 렌코는 바로 실망이 느껴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이럴 거면 아까 나왔으면 좋았잖아. 아니, 지도 없이는 별 도움도 안 되겠지만.”
내 손바닥 위에는, 붉은색 바늘이 렌코를 향해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기껏 내가 꺼낸 물건에 이렇게 대놓고 실망하다니 괘씸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렌코의 반응이 틀린 건 아니다. 나침반이 있다면 굳이 나뭇가지로 방위를 알아낼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내 나는 지금 나침반이 나온 게 나름의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렌코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고, 내 손 위의 나침반은 렌코가 앉아 있는 방향을 붉은 바늘로 가리키고 있다. 내 상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분명 나침반은 자성을 이용해서 북쪽을 가리키게 되어 있다.
나는 우리가 꽂은 나뭇가지에 다시 시선을 돌린다. 우리 머리 위의 해가 그래도 조금은 움직였는지, 그림자가 살짝 더 왼쪽으로 길어진 느낌이다. 그렇다면 역시 우리의 오른쪽으로 해가 저물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침반은 여전히 내 오른쪽에 앉은 렌코를 가리키고 있다.
“원래 해가 남쪽에서 뜨던가?”
아무래도 렌코도 나와 비슷한 의문이 든 모양이다.
“적어도 우린 지구에 있는 건 아닌 게 분명해.”
그림자의 이동과 나침반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잠시 고민하던 렌코는 이윽고 그렇게 결론 내렸다. 분명 합당한 결론이지만, 별로 칭찬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 정도는 나도 생각했는걸.
“그럼 대체 어딘데?”
“메리의 꿈속에서 오게 된 별이니까, 메리성?”
렌코는 나름 농담이라고 되는 양 말한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별로 우습지는 않다. 무엇보다 내 이름이 그런 식으로 함부로 붙는 것도 탐탁지 않고. 애초에 누가 인정해줄 리도 없는데.
“아니, 그보다도 메리가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데. 애초에 메리가 꿈에서 먼저 왔잖아?”
“그래봐야 나도 조금 먼저 왔을 뿐인데. 풍경도 그냥 휑하니 그대로인걸. 이 상태로 뭘 더 알 수 있겠어. 그때도 훤한 낮이고, 렌코도 가방도 없이 나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는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내가 투덜거린 내용 그대로이다. 꿈속에서 이런 알 수 없는 공간에 나 혼자 덩그러이 남아있는 건 나, 마에리베리 한에게는 딱히 특별한 일이 아니긴 하다. 대나무숲에서 정체 모를 괴물에게 쫓긴 적도 있었으니 오히려 무난하디 무난한 편이랄까. 문제는 너무 무난해서 도무지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처음 혼자만 있었을 때도 그저 멍하니 앉아있다 어느새 렌코까지 나타나서 별 의미도 없는 대화만 나누고 있으니 상황이 나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 가늠이 안 된다.
“어쨌거나 상황은 많이 나아졌네. 물건을 꺼낼 수 있는 가방도 생겼고. 대체로 메리가 필요한 물건들이 나오고 있으니까, 이 가방 자체도 메리가 원해서 이번에 새로 생긴 걸지도 몰라.”
“필요한 물건들이 나온 건 맞지만, 지금까지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어.”
“그래도 이번엔 나도 같이 있잖아.”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는 점에선 렌코도 마찬가지인데 말이지.
그렇게 실없는 대화만 나누던 우리는 결국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달리 뾰족한 수도 없으니까. 다만 걷는 방향만은 나름대로 정해놓았다.
“사실 북극이 지구의 중심인 걸까? 모든 자기장이 한데 모이잖아.”
“무작정 북쪽으로 걷고 있는 게 고작 그런 이유야? 그보다 그림자를 보면 이게 북쪽인지도 알 수 없잖아.”
내가 그렇게 대꾸하는 와중에도, 내 손 안의 나침반은 나보다 앞서서 걸아나가는 렌코의 등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 렌코는 일단 무작정 북쪽으로 걸어가 보자고 한 것이다. 그렇게 가다 보면 출구가 나온다는 보장도, 애초에 지금 우리가 있는 이 장소에서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확실치 않은데. 그런데도 내가 일단 렌코를 따라가는 이유는? 어쨌거나 뾰족한 수가 없으니까.
“하나하나 알아보는 거야. 적어도 나침반은 줬으니까, 어떻게든 쓰라는 거겠지.”
“내 꿈이 그렇게 알기 쉬웠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굳이 중심을 찾을 필요가 있어?”
“보통 꿈의 중심에는 그 사람의 원초적인 소망이 있다고들 하잖아. 어쩌면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 수 있겠지.”
“그렇다면 내 소망이라는 건데,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은데.”
“어디까지나 말이 그렇다는 거니까. 실제로 꿈은 그냥 꿈이겠지.”
참으로 영양가 없는 대화였지만 내가 계속해서 렌코와 입씨름을 벌이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 외에는 달리 할 게 없으니까. 그런 우리의 노력도 무색하게, 아무리 걷고 걸어도 정작 주위 풍경은 변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렌코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앞으로 걸어가고, 나침반도 그렇게 무작정 전진 기어를 넣은 렌코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영원할 것만 같던 순간에 제동을 건 건 나였다.
“잠깐, 기다려 봐.”
“뭔데? 뭐 변한 거라도 있어?”
안타깝게도 없었다. 아니, 없어서 문제였다. 내 말투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자, 렌코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서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 렌코가 그렇게 방향을 틀었지만, 나침반의 N극은 꿋꿋이 렌코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부터 마찬가지였잖아. 뭘 새삼스레 그래?”
“그래, 너무 변하지 않았어. 저것도 안 변했다고.”
나는 그리고, 렌코의 등 너머에 꽂혀 있는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그저 하찮고 자그마한, 별다를 게 없이 땅바닥에 꽂혀있는 나뭇가지였다. 문제는 그게 우리가 처음에 해가 움직이는 방향을 알아보겠다고 꽂은 나뭇가지라는 점. 렌코도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내게 물었다.
“혹시 내가 무심코 방향을 틀었나?”
“아니, 계속 북쪽으로 걸었어. 이 나침반이 고장 난 게 아니라면.”
렌코는 내 손 안에서 흔들흔들 자신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벌써 한 바퀴 돈 건가?”
그렇다면 우리는 퍽이나 작은 별에 있는 셈이다.
“옛날에는 다들 반대로 생각했잖아.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말 그대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나뭇가지 앞에 쭈그려 앉은 렌코가 그렇게 툭 던졌다.
“우스꽝스러운 믿음이었지.”
“물론 지금이야 우스꽝스럽지만, 당시에는 그게 올바른 지식이었으니까.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야 많은 게 설명되었던 거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천동설이나 지동설 어느 쪽으로도 설명이 어려운 것 같지만.”
“렌코는 옛날 사람들에게 관대하네.”
나는 지금 상황에서는 그렇게 마냥 관대해질 수가 없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이 꿈 속에서 그저 렌코와 이야기나누는 것밖에 할 게 없으면 누구라도 그러리라 생각한다. 이 꿈속은 어찌나 단조로운지, 아직도 해가 지평선 너머로 질 생각을 하질 않는다.
“...왜 아직도 환하지?”
도통 변하질 않는 풍경 속에서, 나는 변하지 않는 걸 하나 더 깨달았다. 렌코와 나는 어림잡아 세네 시간 정도는 꿈속에서 있었다. 워낙 특색이 없는 풍경이기는 해도, 적어도 지면에서 해가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는 눈으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림자로 방위를 확인할 때는 분명 조금씩 지면에 가까워지는 것 같던 해는, 어째선지 더는 지면에 가까워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지면에서 더 멀어진 것만 같아 보였다.
렌코는 내가 그렇게 한마디 내뱉은 것만으로, 이미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해를 잠시 쳐다보고 나서는 바로 우리가 꽂았던 나뭇가지로 시선을 돌렸으니까.
“아까 그림자, 분명 왼쪽으로 움직였지?”
“그래, 처음 표시한 눈금에서 왼쪽으로.”
나는 렌코에게 그렇게 답하긴 했지만, 내가 답하면서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또 어떤 기현상이 벌어져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나와 렌코의 눈앞에는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분명 이게 우리가 아까 표시한 눈금이지?”
“그랬지...”
내게 그렇게 물었던 렌코도, 답하는 나도 별로 놀라워하진 않았다. 나뭇가지에서 뻗어 나온 가느다란 그림자는 눈금의 오른쪽으로 드리워져 있었지만, 이제 와서 굳이 호들갑을 떨 건 없겠지.
“지금까지 메리의 꿈 중에서 가장 특이한 편 같은데.”
“어떤 점에서? 해가 지지 않아서? 아니면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기만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상당히 편의적이라는 점에서 말이지.”
렌코는 그렇게 말하면서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렌코가 말했듯이 참 편리하게도, 우리가 계속해서 밀려드는 기이한 현상 속에서 갈증을 느낄 때쯤 나는 가방 속에서 생수 두 병을 꺼내버렸던 것이다.
“지금까지 꺼낸 물건 중에 제일 도움이 되긴 했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야속한 시선으로 나침반을 바라봤다. 물론 감정이 없는 사물들이니 내게 제대로 대꾸는 못 하고, 바늘만 조금씩 그저 흔들거릴 뿐이다.
“지금까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어쨌거나 이 별은 지구와는 극성도 다르고, 조금만 걸어도 제자리로 돌아올 정도로 작은 별인데 해는 지지 않네. 그리고 무엇보다 메리가 필요한 물건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결론은?”
내 질문에 렌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몰라 몰라, 포기! 설명 불가! 이대로 있다 보면 메리의 꿈이니까 깨겠지?”
“아마 깨겠지. 지금까지 꿈에서 깨지 않은 적은 없으니까. 물론 위험한 적은 더러 있었지만.”
“위험하지는 않지만 뭔가 재미가 없는 꿈이네. 이해할 수도 없고.”
렌코는 내 꿈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내가 내 꿈에 가지는 인식이 바로 그랬다. 우습게도,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내 꿈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내게는 너무 명확한 꿈이야. 재미...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의외네. 메리는 항상 자기 꿈을 재미없어했던 것 같은데.”
“맞아. 사실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설명할 수 없으니까. 지금 이 꿈을.”
내 답변에 렌코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무심한 표정을, 적어도 그런 표정을 지어보려고 노력한다. 굳이 말해야 할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밝혀야 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은 복잡하지만, 어쨌거나 이미 내뱉어버렸으니까. 아마 이젠 얼버무리는 게 더 이상하겠지.
“지금 꿈에 대해서 알아낸 거야?”
“렌코는 아직도 짐작이 안 되는 거야?”
“전혀.”
“그럼 내가 솔직해져야겠네.”
그리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붉은 바늘은 렌코를 가리키고 있다.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렌코의 주위를 빙글 도는 와중에도, 나침반은 오직 렌코만을 향하고 있다.
“이 나침반은, 극성 따위는 상관없겠지. 그저 이 꿈의 중심을 가리킬 뿐.”
“그게 뭔데?”
나는 간신히 목 너머로 그 대답을 내뱉었다.
“렌코. 너야.”
렌코는 내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지 못한 듯 아무런 답도 못하고 멍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렌코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나는 그저 묵묵히 하던 이야기를 계속한다.
“이 꿈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해. 그냥 모든 게 단 하나는 중심으로 돌고 있는 거야. 이 행성도, 저기 떠 있는 태양도. 나침반의 바늘도. 널 중심으로.”
“...나? 왜 하필...”
“그야 내 꿈이니까. 네가 말했잖아. 지금 이 꿈은 적어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있어. 내가 원하는 건 얻을 수 있는 꿈. 안 그래도 나는 이 꿈에서 지금 당장 있었으면 하는 걸 얻었어.”
“하지만... 그래 봐야 고작 나뭇가지에 나침반... 게다가 분명 별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꼭 이럴 때만 멍청해지네. 아니면 멍청한 척? 고작 나뭇가지 정도가 아니야. 나뭇가지 이전에 내가 그냥 원하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나타났지.”
렌코는 내 말을 듣고는 얼얼한 표정으로,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나?”
“그래. 처음엔 그저 나 혼자만 있었는데, 갑자기 네가 눈앞에서 나타났어. 계속 이야기하면서 설마 했지만, 이제는 확실해. 렌코 넌 내가 원해서 이 꿈에 나타난 거야. 사실 지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런 생각 따윈 한 적 없으니까, 아니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어쩌면 생각까지 할 필요도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저 목이 마르니 물을 줬던 것처럼. 그냥 내가 무심코 널 원하니까 네가 나타난 거야.”
“그럼 내가 중심이란 것도...”
“네 말대로, 꿈의 중심에는 그 사람의 원초적인 소망이 있는 걸까?”
나는 결국 마지막에 그렇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까, 적어도 그건 가설로 남겨두고 싶은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사람 마음이란 게, 내 마음이 그렇게 바보 같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거 외엔 설명할 수 있어? 어차피 이 꿈은 천동설로도 지동설로도 설명할 수 없는데.”
“그럼 왜 계속 꿈속에 남아 있었던 건데? 메리 네가 원하는 대로라면, 이렇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재미없는 장소에 계속 남아 있을 리가...”
렌코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뒷걸음질 치면서 그렇게 반론한다. 상처 따윈 받지 않는다. 나도 내 마음을 인정하는 게 이리 힘들다면, 다른 사람의 진심을 마주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도 없다. 나는 목 위까지 화끈 올라오는 열기를 내뱉으면서 렌코에게 마저 털어놓는다. 지금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거나 모든 걸 다 설명하는 말을.
“그래도 상관없는 거야. 렌코 너만 같이 있으면.”
뒷걸음질 치던 렌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제 렌코도 변명할 거리가 사라진 셈이겠지. 지금까지는 투덜대는 척하면서도 그저 함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 견딜 수 없이 겸연쩍어지면서 고통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 꿈을 끝내기로 한 것도 나다. 꿈은 언젠가 깨야 하니까. 그리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마냥 모른 척해서는 안 되니까.
“그래서 그냥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낼까 생각해봤어. 솔직히 지금도 차라리 모른 척해버리는 게 좋았을까 싶어. 이제 더는 못 버티겠어. 이렇게 말해버리니, 너를 지금 마주 보는 게 힘들어. 부끄러워서 그냥 훌쩍 사라져버리고 싶어. 이제 이 꿈은 충분해. 충분히 즐겼고, 할 수 있는 만큼 솔직히 털어놨어. 나는 이제 깨고 싶어.”
“잠깐, 메리...!”
그리고 눈앞에서 갑자기 렌코가 사라졌다. 어이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던 주변 풍경도, 렌코가 서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마치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내 손안의 나침반 바늘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정신없이 회전하고, 머리 위에서 자리를 지키던 태양도 순식간에 지평선 너머로 저물었다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하면서 밤낮을 수십번을 뒤바꾼다. 갑자기 중심을 잃은 내 꿈은 그렇게 멀미가 날 정도로 요란하게 무너졌다.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이 꿈은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원하던 것도 이루어줬다고. 지금까지는 그저 모든 게 변하지 않기를,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하면서 솔직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꿈속에서, 결국 나는 이 꿈을 포기하면서까지 솔직하게 말해버리고 싶었다.
그게 내가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하지만 사실은 가장 원했던 소망.
빙글빙글 돌아가던 내 꿈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나는 어두운 내 방에서 눈을 떴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정말이지 생생한 꿈이었다고, 결국 꿈은 꿈일 뿐이라고 믿고 싶지만 그건 분명 거짓말. 내게 꿈은 언젠가는 깨야 하는, 그저 다른 현실일 뿐. 내 꿈속의 렌코가 사실은 진짜 렌코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든 건 그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지금 같은 나날을 보낼 수 있을지도.
하지만 그럴 순 없다. 꿈속에서 함께 있던 렌코는 분명 내가 아는 그 렌코다. 그렇지 않다면 꿈속에서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지냈을 리가 없다. 내 솔직한 고백도, 분명 다 기억하고 있겠지. 설사 기억하지 못해도, 아무 일이 없었던 척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고 해도, 그 뒤로 많은 게 변했어도, 세계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결국 우리는 인정해야만 했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고.
비록 한순간의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꿈에서 도망치기는 했지만, 나는 어느샌가 그새 렌코를 보고 싶어졌다. 그저 몇 시간 뒤면, 서로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텐데도, 지금 당장 내 옆에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우주는 몰라도, 내 마음이 누굴 중심으로 도는지는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모팬대는 항상 어렵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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