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모팬대] 주최자 출품작 2 - 상해홍차관

동프학선언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1.01.31 23:52:31
조회 691 추천 6 댓글 4


viewimage.php?id=39b2c52eeac7&no=24b0d769e1d32ca73dec82fa11d02831d5ca5516da218d33b13f2760b81b5b311c5a869627378393d3071a94a8538ba8bb685ec73411ee92230beb6a7c0a7c735369

80만 년 전, 하나의 호모 에렉투스가 해변에서 적당히 파낸 통나무를 바닷물 위로 밀어낸다. 불안하게 출렁이는 통나무에 훌쩍 올라탄다. 건너편에는 수평선 뿐 육지는 보이지 않는다. 어디까지 나가야 육지를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


1985년 중영공동선언 이후 많은 이들에게 홍콩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1백 년 전 약속된 1997년이 다가오자, 상하이 사변 이후로 이곳을 마지막 거처로 삼던 상해홍차관도 거취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홍차관의 구성과 역사는 제국의 시대 그 자체였다. 제국의 통치 엘리트가 제국의 전부는 아니므로, 그들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부당하지 않았다. 그 역사가 한 곳에 모여 혼합물을 이룰 때, 그 구성물 중 누구도 홍차관의 배타적인 소유권을 주장하지 못했고, 또한 누구도 나머지와 갈라서기를 바라지 않았으므로, 그 관은 스스로 경계에 서있었던 셈이다. 150년을 이어간 그 경계로서의 조계지, 제국의 시대의 마지막 파편이 그 역사의 막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공동선언 발표 후 새로이 개발이 시작된 신계 북부를 둘러보던 홍차관의 당주 레밀리아 스칼렛은 그것을 새삼 깨달았다.

“사쿠야.”

“예, 아가씨.”

“오늘 저녁은 모두 함께 먹어야겠어.”

예, 하고 대답하는 사쿠야를 옆에 두고, 레밀리아는 높이 오르고 있는 콘크리트 골재를 올려다 보다, 이내 휙 뒤돌아섰다. 사쿠야가 들고 있던 양산과 함께 서둘러 따라붙었다. 홍차관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레밀리아는 공연히 새로 구매한 홍차 잎의 향을 몇 번이고 맡아 보았다.


-


지금보다도 아주, 아주 약간 앳된 모습을 한 붉은 악마는 타운 하우스의 하녀들이 부엌에서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을 발견한다. 마지막 날 출근을 해주기나 한 것을 고마워해야 할까. 쭈뼛거리는 하녀들을 바라보다 이내 마음을 돌린 흡혈귀는 가방에서 포장된 고급 홍차를 꺼내 건넨다. 하녀들이 마시던 것은 척 보아도, 우리고 남은 것을 모아 구두약으로 색을 낸 물건이다. 하녀들은 상투적인 감사 인사말과 함께 통을 받아든다.

어수선한 정리도 대략 끝나고 나니 흡혈귀 자매의 짐은 아무리 사치를 부려봐야 짐 드는 하인 한 명이나 고용해야 할 짐이 다다. 흡혈귀는 실제로 하인을 하나 시켜 짐을 들게 하고, 동생과 함께 타운 하우스를 마지막으로 떠난다.

흡혈귀는 꽤 고급스러운 객실에 짐을 풀고 갑판에 나아간다. 19세기의 한복판, 막 외륜을 패배시킨 스크류가 돌기 시작하고, 증기선이 물을 가른다. 짠내 섞인 바람이 살랑살랑 흡혈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기선의 목적지는 상하이 조계이다. 넉넉잡아 두어 달이면 그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러나 승객들의 인생은 불행히도 도착과 함께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인생은 너무 많이 남아 있다.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인생을 계속해서… 항해해야만 한다.


-


후대에 폴리네시아인들이라 불릴 인구 집단의 일군(一群)이 카누로서는 거대해 보이는 배를 타고 순항 중이다. 이들은 항해의 명수로, 아주 간단한 도구들만을 가지고 능숙하게 원하는 곳, 이미 알고 있는 수평선 너머의 섬으로 카누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일행 중 하나의 얼굴은 어둡다. 그의 가족은 항해에 나서고 한참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고 있다. 조금 큰 파도도, 그의 심장을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하다.


-


“―더 말할 필요는 없겠지.”

모두 모인 식사 자리에서 레밀리아는 1997년으로 예정된 운명에 대해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간단히 읊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백 년 하고도 조금 더 전 즈음에 일본의 요괴가 회람한 계획 기억나? 환상향이라던가?”

파츄리의 무심한 되물음에 레밀리아는 메이링과 파츄리를 한 번씩 바라보며 말했다. 메이링은 단지 진지하게 레밀리아의 눈빛을 받았고, 파츄리는 먼저 말해보라는 듯 식사를 먼저 마치고 레밀리아의 옆에 선 사쿠야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쿠야는 짐짓 자신은 피고용인일 뿐이라는 것 마냥 눈을 돌렸다. 파츄리는 다시 레밀리아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반대야.”

모든 것에 대한 의견이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항해에 대한 의견은 자신의 삶을 반영한다. 백 년 묵은 보라색 마법사는 말했다.

“너희가 여기가 브리튼이라고 착각해 온 멍청이 중 하나는 아니겠지. 아니면, 페킹(Peking)의 지배가 두렵나?”

인도에서 나고 자란 파츄리에게 지배자의 교체는 감흥을 일으키기 어려울 것이다. 카스트와 토후, 식민당국의 복잡한 관계는 누군가 떠드는 것처럼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고, 그 이전보다 특출나게 불행한 것도 아니었다. 지배는 지배에 불과하다. 특히, 이 요괴들에게는…

“런던은 런던이고 토쿄는 토쿄이며 페킹은 페킹일 뿐이야. 우리가 우물 안으로 기어들어갈 이유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어. 정 불안하면 런던으로 돌아가.”

레밀리아는 상황을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는 의도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태도로 파츄리를 떠보는 말을 했다.

“런던이 런던일 뿐이고 페킹이 페킹일 뿐이라면 홍콩도 홍콩일 뿐인가?”

파츄리는 레밀리아를 흘겨보았다. 레밀리아는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런던이 홍콩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 여기나?”

“쇼펜하우어라도 읽었나? 런던은 대안일 뿐이야. 요점은 우리가 어디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거지.”

“어디서라도, 라… 리 카싱은 홍콩 밖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청쿵그룹은 아닐 걸. 리 샤오키와 헨더슨토지개발도 마찬가지고.”

“그들 본인은 아니더라도 그들과 매우 비슷한 삶은 이미 싱가포르 같은 곳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왜 말을 자꾸 돌리지? 아니면 설마 정말로 페킹이 두려운 건가?”

노망난 가족을 바라보는 표정으로 파츄리가 힐난하자 레밀리아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레밀리아는 보다 진지한 태도로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오백 년 동안이나 살아남았지만, 파체. 홍차관은 이제 백 년을 간신히 넘었어. 그 동안 세상의 운명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파츄리는 이제 알겠다는 듯 레밀리아와 비슷한 표정이 되어 그 눈을 바라보다 한숨을 폭 쉬었다.

“이 구 동방 식민지들의 모든 것이 제국의 유산이야, 레미. 이건 결코, 절대로 세상 사람들이 떠드는 제국의 시대의 끝이 아니야. 알겠어? 제국의 유산은 그들이 포성의 불로 구워낸 흙의 파편이 아니라 이미 스며든 바닷물이라고.”

레밀리아는 파츄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파츄리가 그냥 말하게 두었다.

“세상은 계속 굴러가, 레미.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사람이 죽을지언정 사람들은 살아남아. 그야말로 지상 최대의 마법이지.”

레밀리아는 파츄리의 옷깃에서 패출리 향유의 향이 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것이 꼭 착각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파츄리가 그것을 종종 사용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패출리는 열대 지방에서 두루 재배되고… 중국에서도 물론 재배되고 있다.


-


지금보다 꽤 앳되어 보이는 인상을 한 보라색 머리칼의 소녀가 배로 오르는 계단에 긴장한 듯 발을 올린다. 영국령 인도 제국, 마드라스의 항구는 북적거린다. 이 인도 남부의 대도시는 서양인들이 가장 먼저 정착한 항구 중 하나이다. 소녀는 이 큰 배에 오르면서 배가 파도에 흔들릴 때마다 그것이 자신의 발 때문인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드디어 갑판에 오른 이 보라색 마법사의 앞날에는 방방곡곡의 몇 개나 되는 도시가 남아있다. 다른 모든 승객들과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앞날에는 도시 뿐만 아니라 많은 사건들도 남아있다. 긴 19세기의 끝자락, 타밀의 마법사 혈통의 후예 중 하나는 그렇게 검은 바다를 가른다. 이제 곧 대전쟁이 일어나고 1919년에는 간디가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을, 이들 가운데에 누가 알고 있겠는가.


-


고대 이집트의 배가 홍해로 나아간다. 이 문명은 나일 강 위의 항해에는 익숙하지만, 바다를 가로지르는 것은 즐기지 않는다. 그러나 즐기지 않는 길도 가야만 할 때가 있다. 파라오가 무역을 바란다. 그의 신하들 가운데에도,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그것을 바라는 자가 있다.


-


레밀리아는 옆에 서있는 사쿠야를 돌아보았다. 사쿠야는 예, 라고 말하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찬성합니다.”

파츄리가 아니꼽다는 표정을 하지만 사쿠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뒤로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는 것은 레밀리아와 파츄리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 레밀리아가 쓴웃음 지으며 사쿠야를 채근했다.

“그래서? 아니면 왜?”

“홍차관의 경영 전망이 썩 좋지는 않아요.”

레밀리아의 쓴웃음은 가실 새가 없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레밀리아는 생각했다. 항해에 대한 의견은 자신의 삶을 반영한다. 이렇게 대답하게 만든 사쿠야의 삶은 무엇일까.

“스러질 염려가 없다고 해도, 숨어서 지낸다면 그곳에 가는 것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습니다. 경영은 홍차관 생존의 증거입니다.”

사쿠야의 말은 적어도 일부분은 옳았다. 사쿠야는 단순히 삶의 의미에 대해 말했겠지만, 그것은 분명 집단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다. 사쿠야의 생존본능은 여전히 눈을 뜨고 집단에까지 시야를 확보하고 있는 걸까? 레밀리아는 사쿠야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선뜩한 나이프를 새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


은발의 소녀가 배에서 내린다. 이름도, 출발지도, 목적지도 논할 필요가 없다. 목적지를 논할 필요가 없다면 목적도 논할 필요가 없다.

흔들리는 배에 있었던 소녀는 땅에 내리며 약간의 울렁거림을 느낀다. 방금 보인 항구의 팻말로 보아 한자 문화권, 그 가운데에서도 중화권의 땅에 발을 내딛은 소녀는 아직 미숙한 것처럼 주머니 속의 나이프를 만지작거린다.

출발지도 목적지도 논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있다. 자명하게도, 소녀는 바다를 건넜다.


-


콜럼버스의 배가 출항하려고 한다. 사실 이베리아의 배와 항해는 근래 꽤 발전했다. 그러나 여전히 배는 길이가 18m 정도에 불과하다. 출항을 지켜보는 행정관은 속으로 인도가 그렇게 가까이 있을 리 없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전혀 다른 걱정을 하고 있다. 이런 물체가 망망대해를 건넌다는 것은, 언제나 두려운 일이다.


-


“저는 파츄리님처럼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거나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요, 그래도 저 역시 반대예요.”

사쿠야가 다시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자 메이링이 입을 열었다.

“아, 저는 런던에라도 가면 된다는 말씀도 동의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버틸 만큼 버텨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메이링의 경험이라고 하면 말할 것도 없다. 이 중국식 이름을 가진 요괴는 그럭저럭 두루 세상을 맛보았지만, 제대로 거주한 것은 중화권 내부뿐이었다. 이런 대답은 인지상정이었다.

“솔직히 인간의 지배가 두려우냐고 한다면 뭐하지만 긴장되거나 달갑지 않은 건 사실일 수도 있죠. 하지만 그래도 여기서 우린 꽤 오래 살았잖아요?”

레밀리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파츄리님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어요. 포비든 시티, 페킹, 난킹, 토쿄… 우린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어 봤죠.”

“그래서 지루할 수도 있지 않나?”

레밀리아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반박을 생각했다. 삶에 지루함을 들이대는 그 기묘한 잣대 등. 그러나 메이링의 말은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여기도 이제 중화권에서 그래도 선거라고 불러줄 수는 있는 일을 하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가 됐다고요. 타이페이, 싱가포르, 그리고 이제 여기. 이제 막 시작된 참인데 후다닥 도망가긴 좀 아깝죠?”

레밀리아와 파츄리를 꽤 놀라게 한 메이링의 말은 우스갯소리 같지만 꽤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런던의 통치 엘리트는 자신들의 마지막 유산으로 지난 백 년 간 이 식민도시에 허용하지 않던 선거제도를 흩뿌리고 있었다. 선거를 치르는 제국의 선거를 치르지 않는 영토로서 홍콩이 그 식민지라는 경계적 정체성을 흘려냈다면, 이제 곧 홍콩은 정반대로 선거를 치르지 않는 땅에서 선거를 치르는 경계적 정체성을 뽐내게 될 것이다.

“정 불안하면 BNO 여권이라도 받아두자고요.”

메이링의 썰렁한 농담은 별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


상하이 조계지에 오늘 막 도착한 요괴의 눈에는 생경한 풍경들뿐이다. 이국적인 건물들, 번화가, 그리고 항구의 선박들. 곧 영국계 은행이 또 하나 들어설 점포가 분주히 준비되고 있다.

아직 지금보다 더 전통적인 복장을 한 이 요괴의 눈은 마침 출항하는 배의 움직임을 본다. 운하를 오가는 쪽배와는 다른 이 거대한 움직임은, 역시 운하와는 다른 커다란 바다로 나아간다. 그리고 그 방향에서 또 다른 배가 항구로 들어오고 있다. 이곳은 개항 전만 해도 게잡이 어촌이었으나, 그것과는 마치 다른 공간인 것만 같다.


-


철로 만든 거대하기 그지없는 선박의 안전한 내부에서 머물고 있는 21세기의 선원들도, 이런 장면 앞에서는 눈을 감거나, 혹은 웃어버릴 수밖에 없다. 드레이크 해협은 수 세기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절규하는 60도’이다.

파도라고 불러도 될지 의심스러울 만큼 거대한 파도가 배를 덮친다. 수만 톤의 거대한 배가 적어도 그 선원에게는 나룻배처럼 요동친다.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선원은 문득 근래에 침몰한 대형선 몇 개를 떠올린다. 수 세기 전, 아니 20세기의 사람만 보아도 너무나도 부러워할 21세기의 배에 이르러서도, 세계에 비하면 배는 사람처럼, 사람과 함께 떠다닐 뿐이다.


-


파츄리가 은근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리하려 했다.

“2대 1이네.”

레밀리아가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은 채 입을 열려는 찰나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문이 열리고, 플랑드르 스칼렛이 들어왔다.

“나도 있잖아요, 언니.”

레밀리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답은 정해져 있다.

“나는 찬성.”

“어째서.”

레밀리아는 말하면서 속으로 이유는 무슨 이유이겠냐고 생각했다. 2 대 2로 만들어서 자신에게 고민을 안겨주겠다는 심산이겠지. 그건 고민 따위 아니지만, 그런 수작을 부리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다.

“감이 좋아.”

파츄리는 헛웃음을 삼켰지만 레밀리아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일본이라면 바다를 건너잖아? 바다를 건너면 뭐든 있게 마련이거든.”

그야 뭐든 있게 마련이었다. 어디까지 가야 할지,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그러나 레밀리아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플랑드르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놀랍게도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사실에 불과해, 플랑 그걸 살린 건 우리가 운이 좋았다는 것뿐이고.”

“난 이미 대답했어요. 찬성이라고.”

플랑드르는 그렇게 나가 버렸다. 파츄리는 잘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갔고, 메이링은 결정, 힘내세요, 라고 말했다.


-


저지대에서 잉글랜드로 향하는 배 안, 금발의 흡혈귀는 파란 머리의 흡혈귀에게 안겨있다. 저지대가 전란에 휩쓸린 이유는, 잉글랜드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근처는 모두 그러하다. 유럽 전역이 그러한지는, 피난을 가고 있는 이 시대의 흡혈귀 두 명에게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그 가운데에서 굳이 잉글랜드를 고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들 스스로도 말로 풀어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저 그들의 운명을 맡길 수밖에.

그들은 결국 잉글랜드 땅을 밟는다. 잉글랜드인들이 스스로 신이 거닐었다 말하는 땅. 그러나 이 땅이 어떤 미래로 나아갈지, 흡혈귀 자매가 이곳에서 어떤 운명으로 나아갈지는, 말할 것도 없이, 알 수 없다.


-


정말이지 외딴 섬. 일군의 무리들이 이곳에 표류한다. 인류의 탐험과 확장은 이따끔 씩 이런 식으로 일어나왔다. 그들은 재난을 만났을 수도 있지만, 아주 약간의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돌아가기에는 아는 것이 없다. 다행인 것은 그들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정착할 수 있다. 혹은 정착해야 한다.

그들은 어떻게든 번성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다시금 항해에 나서 새로운 섬을 발견하고, 옛 연락도 계속할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외딴 섬에서 홀로 몰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어찌됐든, 그들은 살아서 나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던 것이 아니었더라도, 그들이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기 때문에.


-


레밀리아의 침실에서 사쿠야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 레밀리아가 잠에 들기 전까지 시중을 들었다. 레밀리아는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은 채 창문으로 홍콩의 야경을 보고 있었다.

“고민되세요?”

레밀리아는 사쿠야에게 듣고 있다는 표만 내고 창문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대로 대답했다.

“아니, 결정은 거의 했어.”

“가기로 하셨나요?”

“그래.”

사쿠야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고, 잠깐의 침묵 후에 다시 말했다.

“파츄리님과 메이링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레밀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여쭤봐도 될까요? 역시 페킹이 홍콩을 지금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운명이라서 그런 건가요? 메이링 말대로 BNO 여권이라도 받아두지요.”

메이링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쿠야의 말에 레밀리아는 살짝 미소지었다.

“…아니. 물론 그 운명은 사실이야. 페킹은 궁극적으로는 특별행정구의 폐지를 바라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홍콩이 그저그런 대륙의 도시 중 하나가 되지 않고 영원히 특출남을 누린다고 해도, 그건 홍콩 특별행정구의 항해이지 더 이상 영국령 홍콩의 항해가 아니니까. 이미 영국령 홍콩의 운명은 마지막을 향해 흐려지고 있는 걸 너도 봤잖니. 개발, 선거, 여권… 이제 우리의 조계지, 마도의 운명은 끝나버린 거야.”

사쿠야는 뭔가 부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눈치챈 레밀리아는 다시 한 번 미소짓고 말을 이었다.

“물론 파츄리와 메이링의 말이 맞을 수도 있어. 우리는 제국의 잔영을 더 찾을 수도 있을 거고, 이곳에서 새로운 면모를 계속 발견해 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걔들도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하지 못할 걸. 세상이 계속 제자리에서 굴러간다고? 파도도 마찬가지야. 물은 거의 움직이지 않아. 단지 에너지가 전달될 뿐. 하지만 사람들은 분명, 파도와 그 다음 파도를 세잖니.”

사쿠야는 레밀리아의 말을 곱씹으며 곰곰이 생각하다, 문득 레밀리아가 바라보고 있는 홍콩의 밤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레밀리아의 나지막한 말은 자신과 같은 곳을 바라보는 메이드와,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이제부터는 다시…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항해의 시작인 거지.”


-


이세는 도코요의 파도가 이는 땅으로 주변에서 부러워한다. 이곳에 머물러라.

아마테라스는 야마토히메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마토히메는 그래서 이곳에 머물러 신궁을 세운다. 그를 따라온 사람들도 여기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 가운데 일군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도코요로부터 떠밀려 오는 파도에 조각배를 띄운다. 어디까지 나아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홍콩의 항해는 파츄리와 메이링의 말대로 끝이 아니다. 그 어떤 폭풍우가 몰아쳐도, 사람들은 좋든 싫든, 어느 방향으로 배를 몰든, 살아남을 것이고 그래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런던, 마드라스, 나가사키, 토쿄, 페킹, 그리고 상하이와 그 밖의 모든 도시와,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이다.

레밀리아가 상해홍차관이라고 쓰인 팻말을 떼어낸다. 상해홍차관의 항해는 여기서 홍콩과 헤어진다. 그러나 홍차관의 항해는 이어진다. 제국의 마지막 파편과 헤어지는 홍차관은 여전히 스스로 제국의 더 작은 마지막 파편이다. 제국의 통치 엘리트가 제국의 전부는 아니므로,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자칭할 수 있다.

레밀리아가 새로운 팻말을 건다. 홍마관, 이라고 쓰여 있다. 제국의 시대에 탄생한 그들은, 그 위에 계속해서 새로운 파도를 덧씌울 것이다. 이제 그들의 새로운 항해가 시작된다. 이제까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


홍무이변: 2002년

흡혈귀 일행 환상들이: 그 전

1985년-1997년: '그 전'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을지.

홍마관과 제국의 시대를 엮는 건 꽤 진지한 아이디어임.

추천 비추천

6

고정닉 3

0

원본 첨부파일 1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내 돈 투자하고 싶게 만드는 CEO상 스타는? 운영자 26/03/02 - -
AD 가격 오르기 전!! 노트북 기획전!! 운영자 26/02/12 - -
공지 동방프로젝트 갤러리 "동프갤 슈팅표" [59] 돌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1.09.04 22717 52
공지 동방프로젝트 입문자와 팬들을 위한 정보모음 [46] Chlorin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6.07.27 113009 132
공지 동프갤 구작권장 프로젝트 - 구작슈팅표 및 팁 모음 [531] Chlorine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12.03 110405 136
공지 동방심비록 공략 [58] BOMB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5.12.18 93608 30
공지 동방화영총 총정리 [43] shm(182.212) 15.06.11 119932 52
공지 동방심기루 공략 [64] 케온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3.10.12 128728 33
공지 동방 프로젝트 갤러리 이용 안내 [157765/7] 운영자 09.06.23 611186 536
8473529 20살 존나 많네 ㅇㅇ(223.38) 17:39 40 0
8473528 몸매 비율 실화? ㅌㅌ갤로그로 이동합니다. 12:55 80 0
8473527 동네에서 마라톤함 sasinki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9:59 90 0
8473526 미마님 어디게세요 =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7:05 29 0
8473525 키워드벨튀 하는 놈 누군지 알거같은데 [2] ㅇㅇ(211.234) 03.01 173 2
8473524 아아 다이쨩 민트초코소라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1 63 3
8473518 ‼+상하이⁉+앨리스‼+환악단‼+갤러리로‼+ 상하이갤로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1 36 2
8473517 미마님 어디계세요 [1] 무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1 50 0
8473516 미마님 어디게세요 [1] =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1 50 0
8473515 개인적인 생각인데 ㅇㅇ(14.53) 03.01 274 9
8473514 [1] 민트초코소라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3.01 213 3
8473512 flan 넥슨타이어(219.240) 02.28 75 0
8473511 플랑 [1] 넥슨타이어(219.240) 02.28 100 0
8473510 hakuray 넥슨타이어(219.240) 02.28 63 0
8473509 하쿠레이 넥슨타이어(219.240) 02.28 58 0
8473508 상냥하면서 진지한 사람을 조심해라 ㅇㅇ(106.101) 02.28 193 2
8473507 상갤 핫산 티어표.list ㅇㅇ(124.49) 02.28 177 2
8473503 그 여우 취업했다는거 개구라 같은데 ㅋㅋ [1] ㅇㅇ(91.245) 02.28 352 10
8473502 상갤차단목록 [1] ㅇㅇ(211.234) 02.28 255 11
8473501 여기갤 뭔얘기하는지도 모르겠고 동방 입문하려는데 뭐해야됨?ㅋㅋ [5] 갤러(121.174) 02.28 254 0
8473499 0O님이 동갤을 상갤로 착각한 이유 [1] ㅇㅇ(106.101) 02.28 297 12
8473498 동방빙의화 하마치 말고 할 수있나요? [2] 동갤러(183.102) 02.28 139 0
8473496 상갤에서 누가 가장 잘생겼냐 [1] ㅇㅇ(93.152) 02.28 180 2
8473495 갠적으로 영블리프트 실물 궁금함 [3] ㅇㅇ(118.235) 02.28 309 8
8473494 금향님 왜 온갖갤에서 음모론이랑 똑같은짓하면서 어그로끌어요? [2] 동갤러(180.64) 02.27 261 6
8473493 아아 다이쨩 민트초코소라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7 74 0
8473491 방금주운남색둥이 [22] 0O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7 497 12
8473488 이 버튼을 누르면 준이 내한을 하게 됩니다. [2] ㅇㅇ(39.7) 02.27 282 2
8473487 난최강이다 불완전한강림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7 272 0
8473485 미마님 어디게세요 =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7 51 0
8473484 갤이여 일어나세요 =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7 48 0
8473483 keck은 그림을 잘그리냐고,,,,,,,,,,,,,,,,? 동갤러(121.183) 02.26 150 1
8473482 상갤 급식 고닉 누구누구 있냐? [1] ㅇㅇ(106.101) 02.26 302 1
8473481 혹시 후모후모 재판 자주 해주나요 [3] 가지튀김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6 217 0
8473479 아아 다이쨩 민트초코소라빵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6 78 1
8473478 giftest [5] castle06_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6 525 0
8473477 그냥 짤쟁이 티어놀이나 하삼 ㅇㅇ(106.101) 02.26 212 4
8473476 유웃코가 뭘 했는데 동갤러(118.235) 02.26 151 3
8473474 아임스틸히어 불완전한강림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6 325 1
8473473 딱딱 불완전한강림자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2.26 303 0
8473472 근데 여기가 앞갤이고 상갤이 뒷갤 아님??? [1] ㅇㅇ(211.235) 02.26 241 4
8473471 철좀들어라 병신들아 급식이나 물어뜯지말고 ㅇㅇ(106.101) 02.26 202 10
8473469 옛날 동갤이 물고기 같은놈 많았던거 생각하면 소름돋네 [1] ㅇㅇ(39.7) 02.26 246 6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