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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대회][언갤문학][언더테일 온라인 1/2]

골수이지빠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16.02.27 00: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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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토비 폭스, 언더테일.

     김보영, 스크립터. http://teen.munjang.or.kr/archives/2327


“그리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허공에서 들려온 말이었다. 프리스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봇산의 꼭대기에서 누군가 땅을 향해 사뿐히 내려오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었지만, 군데군데 괴물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토리엘의 뿔, 샌즈의 푹 꺼진 눈, 파피루스의 머플러, 언다인의 장갑, 알피스의 실험가운.

프리스크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준비한 모습 같았다.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죠? 프리스크 씨.”


지상에 발을 내디딘 사내는 기쁜 듯이 웃었다.


“아, 미안해요. 프리스크는 당신 이름이 아니라 그 캐릭터의 원래 이름이었나요? 아니면 차라였나?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겠죠? 이 세계에 들어온 이상. 저도 이 세계의 규칙을 따르는 게 순리일 테니까요.”

“넌 대체 뭐야.”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사내는 프리스크의 말을 무시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우와. 이 게임의 스타팅 포인트는 왜 이렇게 음침해요? 보아하니 여긴 동굴이나 던전, 뭐 그런 곳인가요? 꽃 한 송이라도 심어놓고 있으면 분위기가 한결 더 나아질 텐데.” 

“넌 대체 뭐냐고 물었어.”


프리스크의 목소리가 한결 더 거칠어졌다. 사내가 쿡쿡 웃었다.


“에이, 사람들 사이에서 게임 용어 좀 썼다고 그렇게 차갑게 나올 필요는 없잖아요? 선생님 소문은 이미 저희 팀에 파다하게 퍼졌어요. 게임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현실을 잊어버린 폐인, NPC인 척 하고 신규 유저들을 골탕 먹이는 데 일조하는 괴짜…. 이런저런 루머가 나돌고 있지만, 저는 선생님을 그래도 긍정적으로 보는 편이랍니다.”  

“그 모습은 뭐지?”


프리스크가 눈을 흘겨 뜨고 물었다. 사내는 두리번거리다 자신을 향한 질문임을 깨달았다.


“아, 이거요? 신경 쓰지 마세요. 게임에 접속하려고 했는데 외모를 설정해야 한다고 해서 생성 창에서 랜덤으로 돌린 결과물이거든요. 원래는 캐쉬를 내야 했던 것 같은데, 이젠 언제든지 바꿀 수 있어요. 제가 이 게임의 마지막 남은 운영자거든요. 절대 고의가 아니었어요. 기분 나빴다면 사과드립니다.”


사내의 몸 위로 사각형의 역장이 솟았다. 역장이 꺼지고 드러난 사내의 모습은 괴물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정상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오히려 프리스크를 더욱 역겹게 만들었다. 프리스크가 상대도 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쏘아붙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이곳 에봇산까지 올라온 거야.”

“에봇산이요? 그게 이 게임의 프롤로그였던가요?”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스킵을 선호하는 편이라 프롤로그를 다 보지는 않았거든요. 사실 저는 이 게임의 배경에 대해서도 잘 몰라요. 운영자라는 사람이 정작 자기가 맡은 게임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니, 참 우습죠? 하하.”


사내가 흙 한줌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도트 사이즈의 흙 알갱이들이 흘러내렸다.


“이야. 이거 도트바닥이네요. 그렇죠? 타일 사이즈를 보아하니 16 곱하기 16…. 한 번 만들어놓으면 편하긴 하겠지만, 요새는 이런 타일 방식을 거의 쓰질 않아요. 하물며 가상현실에서야.”


사내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도트로 구성된 그의 팔과 다리가 기계적이면서도 고정적인 움직임만을 선보였다.


“등장인물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그려내는 데엔 3D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거든요. 3D야 그저 모델링만 조금 바꾸면 되는데, 아시다시피 도트는 그렇질 않잖아요. 프레임 하나하나를 다 생각하면서 깨알같이 도트를 박아 넣어야 하니까요. 게다가 무슨 모션이라도 하나 추가하는 날에는… 그래픽 담당은 그날로 죽어나는 거죠.”


사내가 끅끅 웃었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 비친 괴물 세계의 관문을 향했다.


“아직 판단하기엔 좀 이르지만, 프롤로그만 봤을 때는 별로 성의 있게 만든 게임 같지가 않네요. 게임의 첫 도입부를 이렇게 음침하게 만든 이유를 전혀 모르겠어요. 소수 매니아 층만을 노린 게임이었나요? 아니면 이 시절엔 이런 도입부가 유행이었나?”

“여기엔 꽃 한 송이가 있었어.”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프리스크가 양지바른 곳 위에 쭈그려 앉아 중얼거리고 있었다.


“플라위라는 이름이었지.”

“플라위요? 와, 그거 되게 성의 없는 이름이다. 운영진이 그렇게 지은 건가요?”

“그의 진짜 이름은 아스리엘이다.”


프리스크가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사내가 김빠진 미소를 흘렸다.


“뭐에요, 그게. 지금 저랑 농담하신 거예요?”

“아니.”


프리스크가 고개를 저었다.


“단지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한 것뿐이야.”

“아, 이제 알겠다.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뭐 그런 말씀이시죠?”


사내가 프리스크를 향해 몸을 옮겼다. 프리스크가 그와 눈을 맞대고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올라왔지? 원하는 게 뭐야?”

“흠. 예상했던 것보다 꽤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주시네요. 제 도발 작전이 통한 걸로 쳐도 되죠?”


프리스크는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사내가 실쭉 웃었다.


“좋아요. 선생님이 원하시는 만큼 저희도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죠.”


사내가 헛기침을 내뱉곤 장문의 말을 늘어놓았다.


“선생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수십 년 전에 어떤 회사에서 ‘언더테일’이라는 인디게임의 판권을 사들였어요. 당시에 한창 주가가 오르던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으로 개조하기 위해서요.”


프리스크는 그 말에 신경 쓰지 않고 토리엘의 집을 향해 걸었다. 

사내가 그 뒤를 따라 거닐며 잠시도 쉬지 않고 입을 나불거렸다.


“당시 선생님께선 클로즈베타 테스터셨고, 최종 던전의 불살 루트를 가장 먼저 찾아내신 보상으로 평생무료계정이 제공되었죠. 나중에 게임이 부분유료게임으로 전환했을 때에도 선생님의 계정은 어떤 특권이 적용되었다고 들었어요.”


드문드문 떨어진 꽃잎들을 밟으며, 두 사람이 육각형의 방 안에 발을 들였다.

방 모양처럼 여섯 개로 된 스위치 배열이 바닥 아래 놓여있었다. 사내가 뭔가 반응을 취하기도 전에 프리스크가 먼저 순서대로 스위치를 밟았다.

쾅.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다음 장소로 향했다.  


“뭐, 제가 거기까지는 알 바 아니고. 어쨌든 세상이 많이 변했어요. 가상현실 온라인게임은 이제 대세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보다 직접적으로 타인과 마주치는 일에 열광하게 되었고, 언더테일 온라인을 비롯한 여타 게임들은 하나 둘씩 서버를 닫게 되었죠.”


복도를 거닐던 프리스크가 어느 더미인형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낡은 헝겊과 바느질만으로 구성된 더미인형이었다. 군데군데 튀어나온 도트자락과 실밥을 보니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프리스크는 그를 향해 말없는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쯤 되면 선생님께서도 예상하셨겠지만, 저는 그 언더테일 온라인을 인수한 게임회사의 직원이에요. 저희 회사의 경영방침이 돈 안 되는 게임은 문을 닫아야 한다는 입장이라…. 아무래도 언더테일 온라인에까지 손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고요.”


지그재그로 구부러진 복도를 건너, 가시트랩이 쫙 깔린 방에 도달했다. 

사내를 흘겨보던 프리스크가 여의치 않다는 듯 그에게 손을 건넸다.

차가운 손이였다. 사내가 피식 웃고는 프리스크의 손을 잡고 걸었다.


“현재 이 게임에 접속하고 있는 사람은 저를 빼고 나면 선생님 단 한 분뿐이더라고요. 평생무료 계정을 받은 사람도 선생님 단 한 분뿐이고, 지난 1년간 이 게임에 접속로그가 남아있는 사람도 선생님 단 한 분뿐이었어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공지를 올리고 서버를 내려버리고 싶지만 저희 회사에도 나름대로의 경영방침이 있거든요?”


길게 쭉 뻗은 복도를 지나 아래로 떨어지는 함정 투성이인 방을 건넜다.

돌을 쌓아 지나가야하는 함정의 방에서, 프리스크는 말하는 돌에게 인사를 건네며 모처럼의 호의를 보여주지 않겠냐고 부탁을 해왔다.

돌은 귀찮다는 듯이 툴툴거렸지만, 이내 자리를 옮겨 길을 열어주었다. 


“마침 선생님께서도 이 자리에 계시니 한 말씀만 여쭙겠습니다. 얼마를 원하세요? 필요하신 금액을 쭉 불러주세요. 이미 가상현실 온라인게임은 시대가 다 지났단 말입니다. 추억의 상징, 구시대의 전유물 정도로 남은 상태라고요.”


금액을 부르라는 말에 솔깃할 법도 했지만 프리스크는 고개 한번 돌리지 않았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보라색으로 도색된 도트 발판을 걸어 나갈 뿐이었다.


“아무도 안 해요. 유입도 없고, 더 이상 신작이 나올 기미조차 보이질 않죠. 캡슐 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는데 유통 회사들은 줄줄이 도산했어요. 장르로 통하는 생명줄이 무너져버렸단 말입니다. 이런 게임을 이제 더 이상 누가 하겠어요?”            


상호소통을 거부하던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토리엘의 집에 당도한 것이다.

지하실로 향하는 프리스크의 뒤에서 끝없는 권유가 이어졌다.


“선생님께서도 잘 생각해보세요. 이건 한 밑천 잡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 꺼내긴 좀 뭐하지만, 저희 회사는 유저와의 신뢰를 이제껏 단 한 번도 깨뜨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거든요? 설령 돈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사실 저희 회사가 이런 저런 쪽에 연줄이 닿아 있거든요? 원하신다면 저희 측에서 직접 알아봐드릴 수도 있는데….”  

“여, 프리스크?”


지하실의 끝에서 파카 차림의 해골 한 녀석이 손을 내밀었다.

푹 꺼진 두 눈이 사내를 향했다.


“이 녀석은 뭐야? 또 산 위에서 떨어진 녀석인가?”

“어떻게 저를 알아보는 거죠? 운영자 캐릭터는 npc에게 투명한 상태로 나타날 텐데?”


사내가 눈을 흘겨 떴다. 이런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한참 생각하던 사내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아! 그렇군요. 기억났어요. 이 npc가 샌즈죠? 접속하기 전에 들었던 것 같아요. 이 npc는 유저의 전회차 기록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서요?”

“어? 내 이름을 알아?”


샌즈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가왔다.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게임의 세계관은 어떻게 되는 거죠? 이거 몬스터 아니에요? 이 게임의 세계관은 인간과 괴물이 같이 공존하는 건가요?”


불쾌한 어조로 중얼거리던 사내가 샌즈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정면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아니, 이게 뭐야? 공격력 1. 방어력 1? 아무리 구식 게임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한 스탯 같은데요?” 

“이 녀석이 아까부터 무슨 소릴 지껄여대는 거야? 산에 들어올 때 머리부터 떨어졌나?”

“신경 쓰지 마. 그릴비나 가자고.”


프리스크는 샌즈의 손을 붙잡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그 뒤에서 사내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선생님! 아무리 현실도피를 하려고 해봤자 소용이 없어요! 저흰 어떻게 해서든 선생님을 로그아웃시킬 방법을 찾아낼 거고, 언더테일 온라인은 결국에는 문을 닫게 될 겁니다! 이건 선생님을 위해 드리는 충고에요! 제 말 듣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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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릴비에서 한 끼 식사를 마친 뒤, 프리스크는 갈팡질팡한 발걸음으로 스노우딘을 나섰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운영자의 말처럼 지난 1년 사이 언더테일 온라인에 접속한 사람은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서버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매출 한 푼 없는 온라인 게임이 무슨 방법으로 서버를 유지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불길한 느낌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재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 냄새?’


언더테일 온라인에서 재 냄새는 딱 두 가지 방법으로만 발생한다. 

첫째. 물건을 태운다. 사시사철 눈이 내리는 스노우딘에서 물건을 태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둘째. 몬스터를 죽인다. 그러면 몬스터의 스러지는 형상이 잿가루로 변해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설마.’


추측은 불안으로, 불안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프리스크는 눈 위를 달렸다. 어딜 가냐고 부르는 파피루스의 외침도 무시하고, 마을 변두리에 설치된 눈밑 터널까지 잊어버리고 계속 달렸다.


한참을 달린 끝에 외나무다리에서 사내를 만났다.

장난감 칼을 치켜들고, 체력이 얼마 남지 않은 괴물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던 차였다. 


“너!”


주저할 새가 없었다. 프리스크가 칼을 내리꽂으려는 사내의 허리를 다급히 붙잡아 쓰러뜨렸다.

뜻밖의 난입에 사내는 당황한 얼굴로 프리스크를 마주했다.

프리스크는 사내 위에 올라탄 자세로 그를 죽일 듯이 쏘아보였다.

그 틈을 탄 괴물이 허겁지겁 다리를 놀려 도망쳤다.

사내의 손에 들린 칼끝에서 방금 살해한 괴물의 잿가루가 묻어나왔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고나 있어?!”

“사냥이요. 그게 왜요?”


사내는 프리스크가 왜 이러느냐는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도대체 몹 하나 잡은 것 가지고 왜 이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안가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실로 가증스럽기 그지없었다. 프리스크는 이를 갈았다.


“이 살인자.”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살인자요?”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겨우 게임 몹 하나 죽인 것 가지고 제가 왜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야 하는 거죠?”


그가 허공 아래 타일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타일 위에서 도트가 눈뭉치처럼 뭉쳐지더니 방금 살해당한 괴물의 형상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생명을 얻은 괴물이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관심 없다는 얼굴로 제 갈 길로 떠났다. 


“봐요. 이렇게 되살릴 수 있다고요. 운영자 계정의 특권으로요.”

“너, 대화를 시도해봤어?”

“대화요?”


프리스크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사내는 자리에서 툭툭 털고 일어나서는 그를 향해 말했다.


“아, 예. 한 번 시도해보긴 했는데, 아무런 효과도 없더라고요. 왜 이런 쓸데없는 커맨드를 집어넣었는지 모르겠어요. 특정 이벤트를 발동시키기 위한 조건 같은 건가요?”

“불살.”


프리스크가 눈을 세우고 말했다.


“대화는 불살 루트의 전제조건이야.”

“불살 루트요?”


사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어왔다.


“불살을 하면 뭐가 좋은데요? 그럼 레벨이 오르나요?”

“이 게임에 레벨 같은 건 없어. 네가 생각했던 게임의 잣대를 이 세계에 들이대지 마.”

“무슨 헛소리에요. 레벨이 없기는 개뿔이.”


사내가 피식 웃고는 상태창을 열어보였다.

그가 보란 듯이 손을 내밀고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자. 선생님. 이거 보세요. 여기 똑똑히 보이시죠? LV, HP, EXP. AT, DF. 너무 전형적이어서 처음엔 웃음도 안 나왔다니까요. 이 상태창을 만든 사람은 아마 굉장히 성의가 없거나, 유저들에게 아주 직관적인 스테이터스를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이건 누가 봐도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잖아요?”

“여기서 말하는 LV는 레벨 따위가 아냐.”


프리스크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폭력 수치(Level Of Violence)의 약자지.”

“네?”


사내는 프리스크가 뭘 잘못 먹었나 싶은 얼굴로 잠시 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히죽히죽 웃었다. 


“아이고, 선생님. 농담도 심하십니다.”

“LV뿐만이 아니야. EXP는 네가 알고 있는 경험치가 아니라 처형 점수(EXecution Point)의 약자지. 네가 몬스터를 죽이면 죽일 때마다.”


한숨을 내쉬듯이, 프리스크가 그를 향해 충고했다.


“네 캐릭터도 그만큼 너 자신에게서 멀어져.”

“하!”


어처구니없는 말에 사내가 실소를 터뜨렸다. 몬스터를 죽이고 경험치를 쌓을 때마다 캐릭터가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진다고?

사내는 이게 게임의 배경설정인지, 아니면 무슨 상태이상을 설명하는 것인지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요?”

“궁금하면 마을로 가서 npc들에게 대화를 걸어봐. 네가 쌓은 수치에 따라 점차 모두가 널 두려워하게 될 테니까.”


무겁게 말하는 투를 보아 절대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내는 손에 들린 칼을 떨어뜨리고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웃어젖혔다.

연신 웃어젖혔다.


“아니, 뭐 이딴 게임이 다 있어? 그럼 사냥도 하지 말고, 매일같이 하잘 것 없는 npc들이랑 농담 따먹기나 하고, 도트쪼가리나 보면서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고요?”


프리스크는 대답이 없었다. 사내가 프리스크에게 채근하듯 물었다.


“그럼 랭킹은요? 아이템 파밍 같은 건 없나요? 길드전이라던가, 강화라던가, 레이드라던가, 뭐 그런 것도 없어요? 도대체 이 게임을 하는 이유가 뭐에요?!”


한참을 웃어젖히던 사내가 배를 붙잡고 간신히 웃음을 멈추었다.

한껏 비웃음이 걸린 어조로 그가 그동안의 느낀 바를 표했다.


“하, 이제 이 게임이 어쩌다가 이 꼴이 났는지 얼추 짐작이 가네요. 오픈 당시에는 폭력을 거세한 게임이라면서 많은 유저들을 불러 모았을 거예요. 그러다가 점차 질린 유저들이 하나 둘씩 게임을 접으면서 수익이 줄어드는 거죠. 유저들이 게임에서 원하는 근본적인 것은 결국 말초적인 재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데 개발진은 전혀 쓸데없는 부분만 파고들어갔던 거예요. 이걸 만든 제작사는 이 게임이 정말 돈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요?” 


그가 프리스크를 바라보며 대답을 구했다.


“선생님은 대체 몇 년 동안 여기 틀어박혀서 이 짓을 하셨던 거예요? 지겹지도 않아요? 이런 재미도 없고, 말도 안 되는 게임이?”


프리스크는 대답이 없었다. 애초부터 사내는 프리스크가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가 한숨을 쉬곤 말했다.


“하아, 선생님께서 이 게임에 얼마나 애착이 깊으신 지는 저도 잘 알 것 같습니다. 아마 클로즈베타테스트 때부터 하셨다고 하니 게임에 쏟은 애정은 아마 제작진보다 더 크겠죠.”


문득 그의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가 무릎을 탁 치고 프리스크를 향해 다가갔다.


“그럼 선생님. 이건 어떻습니까? 저희들이 언더테일 온라인을 선생님만 즐기실 수 있는 싱글 게임으로 개조시켜드리겠습니다. 그때 개발진들이야 지금 다 사퇴하거나 죽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그 때 그 사람들보다 기술력에서 딸린다는 말은 아니거든요.”


프리스크는 대답이 없었다. 사내는 프리스크의 팔을 붙잡고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선생님만 원하신다면, 저흰 선생님의 취향을 적극 반영해서 선생님만이 즐기실 수 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선생님만의 언더테일 오프라인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장르를 변경하셔도 좋고, 선생님의 이름을 딴 NPC를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저희가 이런 쪽에는 또….”

“프리스크?”


사내와 프리스크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나온 샌즈가 프리스크를 찾아 나선 차였다.


“무슨 일이 있기에 그리 급하게 나선거야?”

“바깥 산책.”

“흐음.”


무덤덤한 말투에 샌즈는 별다른 의심 없이 받아넘겼다.

그가 사내를 푹 꺼진 눈으로 흘긋 바라보고는 물었다.


“저 녀석 아직 안 갔어?”

“곧 나갈 거야. 신경 쓰지 마.”

“잠깐만. 거기.”


사내가 샌즈를 불러 세웠다.


“어떻게 날 볼 수 있는 거지?”


줄곧 들었던 의문이었다.

아무리 유저의 전회차 기록을 볼 수 있는 npc라지만, 운영자의 투명화된 캐릭터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샌즈가 어께를 들썩이며 프리스크에게 물었다.


“프리스크. 이 녀석이 지금 나 해골이라고 무시하는 거 맞지?”

“글쎄, 워낙 ‘골’때리는 녀석이라 잘 모르겠는데.”


프리스크가 샌즈의 움직임에 맞춰 동시에 어께를 들썩였다.

타이밍 좋게 하늘 어딘가에서 우스꽝스러운 북소리가 들려왔다.

사내가 그 꼴을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잘들 놀고 계시네요. 방금 들린 소리는 뭐에요? 캐쉬템인가요? 그리고 선생님. 지금 npc랑 친구하신 거예요?”

“그렇다고도 할 수 있지. 인간. 프리스크는 인간들과 우리를 이어주는 전령이거든.”

“아, 그러세요?”


샌즈의 대답에 그가 불쾌한 듯이 얼굴을 붉혔다. 

데이터 쪼가리가 사람인 척 할 수는 있어도, 사람과 동등하게 대접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봐요. 거기 당신. 프리스크 씨는 여기 오기 전에 뭘 하고 있었죠?”

“무슨 소리야?”

“당신은 알고 있잖아요? 여기 있는 자칭 ‘프리스크’씨는 아마 당신을 한 번만 보는 사이가 아닐 겁니다. 당신이 입고 있는 그 파카 쪼가리가 석유방울이었을 때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처음 만났을 때는 당신과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혹시 알아요? 저 사람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잔혹한 살인마의 일면이 숨겨져 있을지.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간하고 짓밟았을지도 모르죠.”


사내가 싸늘한 어조로 그렇게 말해왔다. 샌즈는 어께를 으쓱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걸.”

“아, 짜증나. 살다보니 이젠 데이터 쪼가리한테 설득을 하는 날이 다 오네. 저는 게임인거 알고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요. 당신은 다 알고 있잖아요? 유저의 전회차 기록을 알 수 있는 npc니까. 그렇지 않아요?”


샌즈는 침묵했다. 사내가 혀를 찼다.


“아놔, 뭐 이런 게 다 있어? 게임 용어는 npc가 못 알아듣게 설정해둔건가? 젠장할. 관리자 계정만 있었더라면….”

“npc니 뭐니 하는 말 다 알고 있으니까 그만 지껄여. 외부인.”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샌즈의 둥글 넙적한 얼굴에서 살의에 가까운 뭔가가 번뜩였다.


“뭐야?!”

“네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알고 있어. 프리스크를 데리러 왔겠지. 우리 세계의 수호자를. 그런 다음, 이 세계를 통째로 지워버리고 그 위에 너희들만의 기반을 깔겠지. 우리의 유골을 제물로 삼아.” 

“…….”

“네가 프리스크에 대해 무슨 말을 하던 상관없어. 네 존재가 이곳 세계를 어지럽히고 있어. 당장 사라져. 내 힘만으론 바깥 세계에 연결된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샌즈의 한쪽 눈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내가 있는 한, 넌 프리스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거야. 절대로.”


그 말을 끝으로 샌즈가 프리스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붙잡으려는 찰나, 사내가 프리스크와 눈을 맞추고 을러대듯 말했다.


“이봐요. 자칭 ‘프리스크’씨.”


프리스크가 입술을 꽉 깨물고 그의 눈을 마주했다.


“저희가 어지간해선 신사적으로 나오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좀 있다 봅시다.”


프리스크의 눈에서 불안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사내는 그 한 순간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


-------------


사내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잘빠진 양복을 차려입고, 손에는 평범하게 생긴 공책을 들고서.


“아, 여기 계셨네요. 선생님. 그렇잖아도 제가 한참 찾아다니고 있었거든요.”


이때 프리스크는 스노우딘 낚시터에서 물고기를 낚고 있었다. 남자가 오든 말든, 크게 괘념치 않는 얼굴이었다. 사내는 눈 쌓인 공터 위에 쪼그려 앉고는 프리스크 쪽으로 몸을 당겼다. 


“저기요. 제가 한동안 바깥세상에서 선생님의 기록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것들을 찾아봤는데요. 사내 데이터베이스에 아주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있더라고요.” 


프리스크는 묵묵부답이었다. 사내가 프리스크 쪽으로 한 뼘 다가가서는, 노트를 한 장 펼쳤다. 빼곡한 기록이 정리되어 있는 노트였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언더테일 온라인의 제작진들은 원작의 설정을 충실히 구현하기 위해 조금 특별한 방식을 택했어요. 단순히 사용자들의 계정마다 캐릭터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서, 일종의 플로어 개념의 사용계정을 유저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하네요. 이게 무슨 말인지 알고 계세요?”


아마 모를 것이다. 운영자인 그조차 이 개념에 대해 이해하는 데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으니. 

사내가 킥킥 웃었다.


“이건 조금 복차원적인 개념이에요. 싱글 게임과 온라인 게임의 요소를 동시에 아우르는 요소이기도 하죠. 유저들은 각자의 플로어에서 출발해 같은 npc를 만나고, 같은 지역에 입장해 이벤트를 겪게 되죠. 하지만 앞서 진행했던 사건의 경과에 따라 그들이 맞닥뜨리게 될 이벤트가 달라지는 거예요. 예를 들어볼까요?”


사내가 프리스크가 잡고 있던 낚싯대를 가리켰다.


“가령, 선생님이 여기서 찌를 들어 올렸다고 가정해봅시다. 낚싯바늘 위에 물고기가 걸렸을지는 저야 모르죠. 그런데, 한번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선생님이 제가 도착하기 전에 밑밥으로 미리 설탕을 깔아놨다면? 사실 여기가 선생님께서 잘 알고 있는 명당 낚시터라면?”


그렇게 말하며 사내가 물가를 향해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 잔잔한 물살이 돌을 튀기며 저절로 물수제비를 이루었다.


“반면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선생님은 여기 오기 전에 제가 도착할 걸 미리 알고 절 골탕먹여주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물에 미리 들어가 흙장난을 치거나 돌을 몇 번 굴려놨을 수도 있겠죠. 어느 쪽이든, 제가 도착한 시점부터 고기는 잡히지 않아요.”


사내가 씩 웃었다. 애당초 이 강에서 낚시질을 하는 것 자체가 시간낭비에 불과했다. 이 강에서는 절대 물고기가 잡히지 않는다. 사내도 프리스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말은 복잡해도 단순한 개념이에요. 싱글 게임의 루트적인 자유도 개념을 온라인에서나마 구현해보려고 이렇게 짜둔 것 같은데…. 정말 멍청한 생각이었어요. 이건 말 그대로 시간낭비거든요. 이 많은 요소를 코딩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돈이 되는 요소를 생각했다면 언더테일 온라인은 적어도 인수 당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사내가 프리스크의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낚싯대엔 바늘이 걸려있지 않았고, 찌는 방금 사온 것처럼 새것이었다.

프리스크가 험악한 낯으로 사내를 향했다. 사내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조금 딴 쪽으로 새긴 했는데, 어쨌든 이래저래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가식에는 이제 질렸어요.”

“무슨 말이지?”

“여기까지 와서 시침 뗄 것 없잖아요? 저는 다 알고 왔다고요.”


사내가 씩 웃으며 이를 드러내었다.


“선생님의 비밀을.”


프리스크의 얼굴이 굳어졌다. 불안한 빛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그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내겐 비밀 같은 거 없어.”

“아, 그러시겠죠. 혹은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던가. 아니면….”


그의 입에서 차디찬 말이 쏟아져 나왔다.


“비밀이 들통 나면 또다시 플로어를 리셋시켜버리면 그만이니까. 아닙니까?”


덜컥. 한순간 프리스크의 심장이 터질듯이 조여 왔다. 전신의 뼈와 근육이 심장을 옭아매는 느낌이었다. 


“그만둬.”

“그만두라뇨? 제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사내가 어께를 으쓱대며 딴청을 피웠다. 사내를 잡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프리스크가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다 알고 있어.”

“그럼 본인 입으로 한 번 발설해 보시죠.”


사내는 몹시도 여유로운 얼굴로 권유해왔다. 프리스크는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다가, 힘없이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발설할 수 없어.”

“왜요? 옆에 누가 있나요? 샌즈요? 아니면 저 때문에요? 어차피 그래봤자 npc잖아요. 플로어를 리셋 시키면 그만이잖아요? 별 거 없어요. 그냥 예전에 했던 것처럼 버튼만 누르면….”  

“그만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리스크가 튀어나갔다. 쏜살같은 기세로 사내의 멱살을 잡아채 모가지를 붙들어 매었다. 사내는 그런 프리스크의 반응이 너무나도 흡족했는지, 바닥에 매다 꽂힌 그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게임을 그만 둘 마음이 드셨나 봐요? 자칭 ‘프리스크’ 씨. 아니다. 이제는 ‘차라’ 인가?”

“…….”


프리스크는 대답하지 않은 채, 일자로 뜬 눈 위로 빛을 흘렸다. 언뜻 스친 빛에서 붉은 빛이 지나간 것 같았다. 사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선생님 추측이 맞을 겁니다. 여기 오기 전에, 사내 데이터베이스에서 지금까지 저지른 선생님의 언더테일 온라인 사용 기록에 대해서 들여다봤는데요. 이건 뭐…. 며칠 전에 그런 소리를 떠들어댄 사람이 저지른 짓이라고는 믿어지질 않는 수치던데요. 어디보자….”


사내가 멱살 잡힌 손으로 천천히 공책을 들어 페이지를 넘겼다.


“몬스터 살해 일억 구천칠백육십팔만 칠천오십구 번.”

“그만.”

“토리엘 살해 칠천이백팔십팔만 육천오십한 번. 설득 도중 저지른 배신만 오천 육백만 하고도 사십 두 번.”

“그만해.”

“파피루스 살해 육천오백구십칠만 구천팔백십이 번. 여기엔 한 방에 죽인 수치까지 있네?

“그만하라고.”

“언다인 살해 오천육백구십칠십일만 만 구천칠백쉰 일곱 번. 그리고….”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샌즈 살해 이백 마흔 번. 하, 이거 샌즈도 알고 있어요?”

“그만하라니까!!”


프리스크가 눈을 사납게 치뜨며 사내를 을러댔다. 손에 잡힌 사내의 목을 당장에라도 비틀어댈 듯이 닥치는 대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런 프리스크를 비웃듯 담담하게 말했다.


“허세부리지 마세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살인을 저지를 각오가 되어있었다면 이미 예전에 손을 쓰셨겠죠. 헌데도 그러질 않았어요. 왜냐? 이유는 간단해요. 위선인지, 아니면 오래전에 지겨워 진건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는 살인이라는 행위 그 자체에서 손을 놔버린 겁니다. 그런다고 해서 그게 속죄가 되진 않을 텐데 말이죠.”


그 말이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칼날이 되어 프리스크의 영혼을 도려냈다. 의지가 꺾이고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너져 내렸다. 의지를 잃어버린 몸이 줄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추락했다.


사내는 그런 프리스크의 앞에 서서 잠시 동안 그를 내려다보았다. 신기하다는 눈빛이기도 했고, 대답을 구하는 얼굴이기도 했다. 한참 뒤 사내의 입에서 어이없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선생님. 뭐 그렇다고 그리 기죽으실 것까진 없잖습니까? 이것도 어차피 다 게임일 뿐인데….”

“아… 아아아아아악!!”


프리스크의 입에서 비탄에 찬 절규가 차올랐다. 의지 잃은 육체가 쏟아낼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프리스크는 울부짖는 자세 그대로 쓰러져 영영 일어나질 않았다. 숨조차 쉬질 않았다. 사내는 그런 프리스크를 툭툭 건드려보다 반응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뒤돌아선 채 말했다.


“뭐…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한 가지 일에 매진하다보면 없는 광기도 내면에서 돋아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이건 도가 조금 지나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수치를 처음 본 순간, 느낀 생각이 뭔지 아세요?”


그가 피식 웃었다. 배꼽을 잡고, 입을 크게 벌리며, 행여나 눈이 튀어나갈까 꾹 참았던 폭소를 껄껄 터뜨리며 연신 웃어젖혔다.  


“뭐, 이런 미친 새끼가 다 있나! 그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마침 저 혼자 그 자리에 있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회사에서 개쪽당했을 상황이었다고요. 얼마나 웃었는지 아세요? 내가 진짜, 그날 하루 웃겨가지고 퇴근길에서도…!”

“이봐.”


사내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샌즈의 목소리였다.


“얘기 잘 들었고, 잠깐 비켜줄래? 프리스크랑 할 얘기가 있어서.”


목소리가 소름끼칠 정도로 담담하기 짝이 없었다. 

사내가 비켜주기도 전에, 샌즈는 사내를 지나쳐 프리스크의 앞까지 다가갔다.

프리스크는 두 눈만 간신히 뜨고서 그를 마주했다.


“샌즈. 난….”

“알아. 무슨 말 하려는지.”


샌즈는 프리스크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내가 토리엘 아주머니하고 했었던 약속.”


프리스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약속이 없었더라도, 나는 이곳 세계에 떨어진 인간을 공격하지 않았을 거야. 내 동생을 봐서라도, 의지를 가진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의 무게를 봐서라도.”


샌즈가 한 눈을 깜빡였다. 그의 입이 웃고 있었다.


“가 봐. 저 녀석은 내게 맡기고.”


프리스크가 간신히 다리를 지탱해 그곳을 벗어났다.

자리에는 이제 둘 밖에 남지 않았다. 언더테일 온라인의 새로운 운영자, 그리고 샌즈.

둘이서만 이렇게 대담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사내는 꽤나 의외인 듯한 어조로 말했다.


“별 느낌이 없는 모양이네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죠?”

“정말 아름다운 날이야.”


샌즈가 사내의 말을 무시한 채 평온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사내는 그런 샌즈의 행동이 거슬린 듯 눈살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사내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끼어있었고, 눈은 언제나처럼 내리고 있었다.


“제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요.”

“그렇겠지. 이런 날엔, 너 같은 꼬마들은.”


샌즈의 눈이 빛났다.


“지옥에서 불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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