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건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내가 말했다. 매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소파에 누워있던 해골은 이번만큼은 눈꺼풀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드디어 그가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 감동적이다. 샌즈는 완전히 눈구멍을 열고 나를 바라봤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계속 네가 생각나. 너에대해 더 알고싶고…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이 감정은 사랑이 아닐까?"
그러나 샌즈는 여전히 말이 없다. 그는 언제나와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이번엔 제대로 말했다.
"샌즈, 난 널 사랑해."
요지부동. 만약 샌즈가 괴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나를 미친사람으로 봤을거다. 소파에 누운 해골과 그것에게 사랑고백을 하는 인간이라니. 이걸 두고 뭐라고 하더라? 네크로필리아? 하지만 난 정신병자도 아니고 샌즈는 그냥 해골도 아니다.
"샌즈."
"……."
"샌즈."
"……."
"샌……."
"꼬맹아, 집에 갈 시간이야."
세 번을 못 찍고 내 말소리가 가로막혔다. 그렇지만 좋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나도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내용이 거부를 말하는 것은 신경쓰이지도 않았다. 애당초에 거절당할거라고 생각했는걸. 목소리라도 들은게 어디야. 역시 이런 감정은 사랑이 맞겠지.
"응, 내일도 같이 얘기하자."
오늘은 목소리를 들었으니 됐다. 나는 샌즈에게 더 추근거리지 않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그는 대답이 없다. 그렇지만 난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잘가라는 말을 기억하며 지상으로 향했다.
학교가 마치기 무섭게 나는 에봇산으로 가기위해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몇몇 아이들이 내게 오늘도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당연하게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얼마전에 괴물아이와 사귀기 시작한 앨리스가 내게 부럽다고 말했다. 자기도 남자친구의 고향에 가보고 싶은데 아직 가보질 못했다면서. 나는 앨리스에게 너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앨리스는 웃으면서 응 하고 대답했다.
나는 앨리스가 에봇산에 가지 못할 것이란걸 알고 있다. 3개월 뒤, 앨리스네 아버지는 해외로 장기파견을 가는 바람에 앨리스도 아버지를 따라서 외국으로 가게된다. 이제까지 앨리스를 보내기위해 송별회에 참석한 횟수가 얼마였더라? 그냥, 꽤 많았다.
나는 앨리스에게 손인사를 보내고 에봇산으로 가는 버스에 타기위해 교정을 달렸다. 왼쪽에선 언다인이 체육부 아이들과 운동장을 달리고 있었다. 오른쪽엔 아스고어가 정원을 손질하다 말고 잠시 바닥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괴물아이가 앨리스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놓치지 않고 인사를 건네는 그들에게 마주 손인사를 건네다, 겨우 막 떠나려는 버스에 자리를 잡았다.
에봇으로 가는 사람은 꽤 적어졌다. 처음엔 괴물들이 살았던 곳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색명소라며 사람들을 불러모으기도 했다. 뒤늦게야 지하의 보존과 괴물들의 과거에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하며 그저 즐기기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덕분에 요즘 에봇산은 조용히 속죄를 위해 잠시 머무렀다 가는 장소가 되었다. 나는 이 분위기가 얼마 뒤에는 에봇산을 성역화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버스에서 내리고 에봇산을 오르는 것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산을 오르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에봇산엔 셔틀고양이가 있다. 나룻배 몸을 가진 고양이 위로 올라탄 나를 리버퍼슨이 반겨주었다. 나는 익숙하게 리버퍼슨의 바로 뒷자리에 앉았다. 나 외에도 같이 버스에서 내린 젊은 여자 둘과 할머니 한 분이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등에 올라타자 리버퍼슨의 지시대로 고양이가 산길을 내달렸다. 리버퍼슨은 요즘은 마운틴퍼슨이라고 개명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중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리버퍼슨은 곧 트랄랄라 라고 흥얼거리며 그래도 지하에서 가끔 강에서 배를 타니 아직은 리버퍼슨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산에서 내려가는 인원을 태운 고양이배가 떠나갔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때문에 벌써 스카이라인은 주황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아마 내가 지하로 갔다가 나갈쯤엔 또 어두컴컴해져있겠지. 나는 어제 늦었다며 걱정하던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른 지하로 가는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깨닫는다. 오늘은 엄마에게 걱정을 끼칠 일이 없겠구나.
"샌즈!"
나는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는 작은 뼈다귀괴물을 불렀다.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던 두개골이 돌아가며 내게 향했다. 언제나와 똑같은 표정. 그러나 그 표정이 웃는 것이기에 내 가슴 속의 사랑이 차올랐다.
"드디어 지상에 올라오기로 한거야?"
그를 지상에서 본 것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언제나 그건 '처음'뿐이었고 그 이후에 지상에서 샌즈를 본 적은 수많은 루프 가운데 이번이 처음이었다. 샌즈는 말없이 검은 눈구멍으로 나를 바라봤다. 바라봤다고 해야할까? 알게뭐야, 중요한건 샌즈가 지상에 있단거다.
"정말, 기뻐……."
지상에 올라온 샌즈를 앞에 두고,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가 볼썽사납다고 생각할까봐 눈물을 급하게 훔치는데도, 눈물이 뚝뚝 새어나온다. 결국은 그에게 얼굴을 보여주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꼬맹아."
겨우 눈물을 그친 내 앞에 하얀 휴지뭉치가 내밀어졌다. 나는 그 휴지를 내민 것이 샌즈라는 것을 알고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더 울었다간 샌즈에게 더는 못볼 꼴을 보일 것 같아, 나는 얼른 휴지를 받아들었다.
샌즈에게서 돌아서고서 나는 눈물을 닦아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들어가."
지저분하게 흘러내린 콧물마저 닦아내던 차에 갑자기 뒤에서 샌즈가 말했다. 나는 어느새 완전히 하늘이 빨갛게 물들어있는 것을 바라봤다. '처음'과 비슷한 하늘이다. 그리고 이제 내려가지 않으면 엄마를 걱정시킬거라고 알리는 하늘이다. 나는 샌즈가 내 대답을 기다리는 것을 알고 대답하려했다. 하지만 우느라 목이 메어와,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후우, 토리엘한테 전화로 잔소리를 얼마나 들었는지 아직도 '골'이 아프네."
샌즈는 뭐라 말하려다 한숨짓곤 잠시 혼잣말을 했다. 나는 그제야 샌즈가 완전히 지상으로 나온 것이 아니란걸 깨달았다. 그는 그저 엄마가 건 전화때문에 잠시 나온 것이다.
나는 그만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말하고 싶은 거 있음 이쪽으로 전화해. 괜하게 네 엄마 걱정시키면서-"
"싫어!"
"-오지말고."
메아리가 내 목소리를 실었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그렇지만 샌즈의 '그 말'은 막질 못했다. 나는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알았지만 샌즈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눈물이 아래부터 차올라서 샌즈의 얼굴마저 일렁였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샌즈를 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샌즈는 쪽지를 내민 손을 거두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게 싫었다.
"꼬맹아, 난 지금 네 걱정을 하는거야."
"거짓말."
"네가 아무리 의지의 힘을 가지곤 있지만……."
"더는 안 써!"
결국 나는 다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샌즈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일관적인 포즈로 서있었다. 여전히 표정에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드물게도 말을 하다말고 멈춰섰다. 눈구멍에서는 안광이 사라지고 까만 그림자만 머물러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시야에서 샌즈가 다시 흐려졌다.
"…더는, 안쓴다고. 약속했잖아. 난……."
아무리 눈을 깜박여도 눈물이 차올라서 샌즈가 흐리게보였다. 샌즈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불신하는 눈. 이전에 그에게 수없이 죽은 적이 있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더 아팠다. 나는 턱끝까지 뭔가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걸 꾹, 삼키고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더는, 안썼어! 한, 번도! 그런데, 그런데……!"
오르골이 울리는 석상 앞에서 약속했다. 그게 벌써 3달 전이다. 3달 동안, 난 하루도 빠짐없이 샌즈에게 갔다. 더이상 세이브도, 로드도 하지 않고 갔다. 그런데 샌즈는 아직도 나를 믿지 않는다.
하, 그래, 안믿는다는 것은 어제도 알았지. 그렇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줬으면서, 그러면서도 아직도 나를 못믿어준단건 서럽잖아. 드디어, 조금이라도 믿어주는거라고 생각했는데…….
"우윽…흑……!"
서럽고, 서럽고, 서럽고, 서럽고, 서글픈데도. 그런데도 막상 샌즈가 밉지 않다. 그냥, 나는, 그에게 화를 내고 만 내가 밉다. 이대로 샌즈는 내게 진절머리를 내겠지. 샌즈는 얼마든지 날 피할 수 있는데도 그럼에도 내가 계속 찾아가는 것을 말린 적이 없다. 그게 그가 내게 내밀어준 자비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래, 나는 알고 있다. 다만 아는 것과는 다르게도, 이렇게나 경험하는 것은 너무 슬프고 분해서…
"흐아아아앙!"
그만 완전히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내가 바란 것은, 아주 사소한 것 뿐인데. 그저 아주 약간의 믿음, 그것 뿐인데. 네 반응은 언제나 하나뿐이야. 그저 엄마가 나를 보살펴달라고 부탁했던 그 약속을 지키는 거. 약속을 그렇게 잘 지키면서, 내가 네게 한 약속은 그렇게도 못믿어주는거야?
묻고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도 말소리보다 울음소리가 더 크게 나왔다. 울음을 참아보려고 숨을 들이켜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네 모습에 다시 또 북받쳐서 울음이 새어나온다. 그렇지만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건 이런 내 모습조차도 믿지 못해서라는게 느껴져서, 나는 억지로 다시 울음을 참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한번 터져버린 감정을 다시 추슬리기란 굉장히 어려운 것이라서… 나는 결국 울음을 참는 대신 네게서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물론 샌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도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그대로 이불 속에 몸을 숨겼다. 엄마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지만 나는 그걸 신경쓸만한 이성이 없었다. 어느샌가 노크소리도, 프리스크라고 이름을 부르는 소리도 고요해졌다. 관 속같은 고요 속에서 나는 잠들었다.
오랜만에 꾸는 지하에 처음 떨어졌을 때의 꿈이다. 다정한 염소괴물의 품에 안겨 잠든 때를 기억한다. 그리고 조금 딱딱한 발톱이…
"미안해, 꼬맹아."
조심스레 내 뺨을 어루만지는 것도.
자는 동안에도 흘렸던 눈물에 나는 눈이 뻑뻑한 것을 느꼈다. 거울을 보면 눈은 퉁퉁 부어있겠고, 눈곱도 엄청 붙어있겠지. 오늘은 종일 이런 모습일거야. 그럼 오늘은 샌즈에게-
"……."
못가겠지. 나는 차가워진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냐, 울지마. 더 울면 오늘은 아예 학교를 못갈거야. 다짐해도 찔끔 새어나온 눈물탓에 나는 평소보다 더 늦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부엌에선 평소와도 같은 따뜻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세면대 앞에서 한참을 찬물로 눈을 비볐음에도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가, 이제 일어났니?"
"네……."
이 어색한 기류를 나만 느낀 것은 아닌 것 같다. 냉큼 부엌문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은 나는 가능한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앞에 스파게티를 내려놨다. 잠깐, 스파게티?
고개를 들고서야 나는 식탁에 자리잡은 손님을 발견했다. 내 옆의 낯익은 키다리 뼈다귀해골과 그 맞은편에 자리잡은 샌즈…가 아니고 언다인. 파피루스를 보고 순간 기대했던 내 자신이 한심해진다.
"캬하하하, 프리스크, 너 누구한테 맞기라도 했냐?"
"녜헥! 프리스크, 어디서 다친거야?"
파피루스가 내 얼굴을 부여잡고 여기저기를 살폈다. 형과는 다르게도 정말로 걱정하는 얼굴이라, 나는 왜 이 형제는 이렇게도 다른가 하는 생각에 울컥 다시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이런식으로 걱정해주는게 샌즈였다면…….
"야, 파피루스, 너때문에 프리스크가 아침도 못먹고 있잖아."
"그럼 안되지, 프리스크. 다치고 난 다음에는 빨리 먹어서 치료를 해야 해!"
"야야, 욱여넣으면 어떡하냐."
내 입에 스파게티를 부어넣으려던 파피루스는 다행스럽게도 언다인에게 저지당했다. 나는 한순간 샌즈가 아니라 그녀가 앉아있단 사실에 짜증을 느꼈던 것을 속으로 취소했다. 그리고 파피루스가 내게 얼른 먹으라고 눈빛을 보내는 것을 느끼며 겨우 스파게티를 한 입 넣었다. 그러자 파피루스는 좋아!하고 외치며 나를 칭찬했다. 상냥한 친구의 격려에 나는 짜증을 느끼며 허겁지겁 자리를 피하기위해 접시를 비웠다.
"먼저 갈게요."
마시다시피 먹은 스파게티가 위장 속에서 꿀렁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갔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대답하고픈 의지가 없었다.
먼저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내 목적지는 학교가 아니었다. 사랑에 실패한 어린 소녀의 감성이라는 건 복잡미묘한 법이다. 어차피 오늘 일어날 일을 다 알고있는데 가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다만 지하로 가고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하지만 가봐야 샌즈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겠지. 동생처럼 나를 걱정해주지도 위로해주지도 않고 언다인처럼 일부러 상황을 바꾸기위해 비웃는 것도 하지 않고 엄마처럼 아무 말없이 내가 말해주길 기다리지도 않을 거다. 아니, 어쩌면 어제의 일때문에 나한테 정나미가 떨어져서 아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어제의 내가 한심스러워 깊게, 깊게 한숨쉬었다. 로드해서 다시 그 시점까지 돌아간 다음 울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눈치빠른 샌즈라면 그 상황까지 가는 와중에 내가 그와 같이 있는 것이 두 번째라는 것을 금방 눈치챌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그 생각을 없애버렸다.
집 근처의 공원 벤치에 자리를 잡은 나는 주변의 지나가는 사람들과 괴물들을 멀거니 바라봤다. 몇몇 괴물들이 나를 알아보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의 인사를 무시했다. 괴물들은 상처받았단 얼굴로 조용히 돌아갔고, 이후로 내게 인사를 건네는 괴물은 없었다. 외부에서 전해지는 자극이 없어지니 당연스럽게도 내부의 자극이 커졌다.
병신같은 년, 거기서 울긴 왜 울어? 울어봐야 그 새낀 존나 눈물이 가식적으로 밖에 안보일걸? 그 빌어먹을 코메디언은 우는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처웃고 있었어. 휴지쪼가리 몇 장 건네긴 했지만 그게 다라고. 영원히 그 웃는 똥자루는 의지의 힘을 사용할거라고 믿으면서 지하에 처박혀서 아무것도 안하고 쓰레기처럼 살아갈거야.
부정적인 생각은 덧셈이 아니라 곱셈같아서 하면 할수록 순식간에 가지를 뻗치며 늘어난다. 그리고 내 머릿속의 한계에 부딪히면 세이브파일처럼 저장되어서 메모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다른 화면을 띄운다.
난 텅 비어버린 화면에 다시 생각을 적어내리지 않고 정면을 바라봤다. 시간이 좀 지난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 바람에 나부끼며 날아가고, 바닥에 쌓인 노랗고 빨갛고 주황색의 낙엽들은 마치 샌즈의 방에 있는 그것처럼 회오리를 탔다. 나는 쌀쌀해진 날씨에 맞지않게 얇은 차림으로 나왔다는 것을 깨닫고 가방을 끌어안았다.
회오리를 보고 있자니 샌즈가 보고싶단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냥, 얼굴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지하에서 그가 처음으로 그릴비에 데려갔던 게 생각났다. 지름길을 타고, 햄버거를 먹을지 감자튀김을 먹을지 고르고, 케첩을 먹을지 먹지않을지 고르고, 아스리엘에 대해 주의하라고 조언을 들었다. 핫랜드에서 핫도그 판매점을 만났던 것은 또 어떻고. MTT호텔에서 같이 얘기했던 것도. 뉴홈의 마지막 통로에서 심판을 받았던 것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을.
나는 눈을 감고 그 순간을 천천히 곱씹었다. 노랗게 빛나는 복도를 걸어가고 있어. 그리고 갑자기 아무도 없던 자리에 샌즈가 나타나. 나는 그에게 다가가고, 그는 내게 말하지.
'좋은 날이야. 꽃은 피어나고 새들은 지저귀고…….'
"별로인 날이야. 낙엽은 지고 괴물들은 잔소리하고…….."
'이런 날에 너같은 애들은…….'
"이런 날에 나같은 해골은……."
'지옥에서 불타야하는데.'
"공원에서 애 찾으러 다녀야 하지."
감정이 벅차올라서 나는 하마터면 또 후회를 할 뻔했다. 그러니까, 눈물을 또 쏟아낼 뻔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는 꾹 참았다. 시간상으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을테지만 몇 년은 지난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샌즈의 얼굴을 곧바로 보지 못했다. 감정이 조금 추슬러질 때까지 나는 그의 분홍색 슬리퍼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는 해골괴물은 언제나처럼 본인의 취향대로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그 행동이 야속하다고 느꼈건만, 간사하게도 나는 그 행동이 너무나도 좋아졌다.
"헤, 학교랑 술래잡기라도 하는거야? 그러다가 '골'빈다?"
아, 실패다. 나는 금방 넘쳐버린 눈물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샌즈가 내게 저렇게 말을 했던게 얼마만이지? 이전엔 지긋지긋했던 뼈개그마저도 감격스럽다. 나는 결국 코마저도 훌쩍였다.
그리고 또 다시 한번 감동. 나는 아무 말없이 내 앞에 내밀어진 휴대용 휴지곽을 쥐었다. 슬쩍 맞닿은 매끄러운 손가락뼈의 감촉에 얼굴을 붉히지 않으려 애쓰며 나는 재빨리 비닐포장을 뜯었다. 그사이에 샌즈의 슬리퍼가 옆으로 움직이고, 내 옆 자리에 샌즈가 앉았다.
"너도 이미 아는 이야기겠지만……."
지저분해진 얼굴을 닦으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샌즈가 다시 말문을 텄다. 나는 닦으려던 그대로 멈춰섰다.
"시간선이 뒤죽박죽으로 움직인다는 것을 아는 것은 엄청나게 의욕을 앗아가는 사실이야. 언제나 흘러가야할 시간이 갑자기 뒤로 돌아가고, 멈추고… 그런단 걸 알게되면 적어도 나같은 해골은 게을러진단 말이야."
이 말과 관련된 말을 나는 그대로 토씨하나 안틀리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잠자코 휴지로 콧물을 닦았다.
"시공간 장난. 그래, 내가 많이 치지. 이것도 말그대로 시간을 농락하는 것이기도 하거든. 다만 나는 과거로는 못돌아가고 오직 미래로만 갈 수 있어. 상대성이론……. 그래, 넘어가자고."
내 얼굴을 본 샌즈는 군말없이 설명을 뛰어넘었다. 나는 아직 눈물을 닦지 않았다는 것도 잊은채로 샌즈를 바라봤다. 샌즈가 미래를 갈 수 있어?
"그냥 쉽게 말하자면 빛보다 빠르게 움직이면 조금이나마 미래로… 갈 수 있단거야."
아무래도 샌즈는 내게 자기 능력을 설명해주는 것이 더이상 무쓸모하단 것을 깨달은 것 같다.
"그래, 내가 왜 이런 얘기를 꺼냈는지나 말하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내자고."
"안……!"
"돼. 설명 듣고싶음 학교가서 과학 공부하고 와. 지금도 학교의 시계는 돌아가고 있단다, 꼬맹아."
"……."
"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샌즈는 삐쭉 튀어나온 내 입을 집게로 꾹 눌러서 넣었다. 나는 얼굴이 펑 터질것 같다. 그렇지만 샌즈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낄낄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좋으면서도 부끄럽고 또 화가나서 입술을 말고 앙 물었다. 샌즈는 내 표정을 보고 다시 짧게 웃었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그 웃음에 넘어가버렸다.
"사랑해, 샌즈."
살랑, 불어온 바람이 샌즈의 웃음을 날려버렸다.
"뭘 해도 네가 생각나고, 뭘 봐도 네가 생각나. 네가 뭘하든, 그 하나하나가-"
"꼬맹아."
좋아. 한숨쉬듯이 나직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도,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도, 네 손 짓 하나, 체취 하나, 그 모든 것들이 좋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샌즈의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올라간다.
"지금은 널 믿는 것으로 참아줘."
분명 거절이지만, 와닿는 것은 긍정보다 좋다.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 서늘한 뼈의 감촉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상냥하게 내게 또 자비를 베풀어준 해골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긴 눈꺼풀에 눈물이 맺혀 떨어졌지만, 이번만큼은 나는 닦지 않았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꼬맹아."
친절하고도 사랑스러운 해골이 조심스레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 씨바 또 분량조절 못함
여러분 이게 9천자입니다 9천자!! 근데 상편임 ㅋ
1인칭 주인공시점 존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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