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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들

운영자 2017.07.18 15: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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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들

  

9월초의 뜨거운 낮 열두시였다. 정자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분당서울대병원 고교동기 모친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녹음이 짙은 숲속에 들어앉은 붉은 벽돌의 빌라들이 마치 노련의 평안한 삶같이 느껴졌다. 잠시 후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안내판에서 며칠 전까지 존재했던 사자(死者)들이 갖가지 표정을 짓고 있다. 젊은 사람, 늙은 사람, 울먹이는 사람, 활짝 웃는 사람 등 그들의 여러 표정을 보며 삶의 경계를 넘은 그들이 사진 저쪽에서 이승을 향해 던지는 무언의 의미에 마음의 귀를 기울인다. 문상을 끝내고 접객실로 들어갔다. 구석의 상에 몇 명의 동창들이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 가서 합석했다. 문과 이과가 갈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몇십년 동안 만나지 않은 동창은 사실상 모르는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십대 소년시절 같은 학교를 다녔다는 가느다란 끈이 형식적으로 인연이 될 뿐이었다.

“나 엄상익이다.”

앞에 앉아 있는 허여멀건 얼굴의 퉁퉁한 남자에게 내 이름을 댔다.

“이름은 기억하겠는데 그 이름이 지금의 네 모습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아. 예전에는 이렇게 뚱뚱하지 않았잖아?”

고교시절 나는 깡말라 있었다. 세월이 지나다 보니 오십대 부터는 두꺼운 가죽자루 속에 들은 영혼이 되어 버렸다. 청년시절 배가 나오고 개기름 도는 탐욕스러워 보이는 오십대 남자들을 보면 속으로 경멸했다. 그 나이가 되면 내남없이 그런 불쌍한 몰골이 된다는 걸 그때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앞에 앉은 그가 말을 계속했다.

“내 이름은 박진담이야. 얼마 전에 혼자 산에 올라가다가 뇌경색이 왔어. 혼자 능선에서 기어서 산 밑으로 내려와 병원에 갔지. 간신히 다시 활동을 하기는 하는데 몸이 자유롭지 못해. 평생 다니던 연구소에서 일주일 전에 아예 퇴직을 했는데 이제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낼지 모르겠어. 좋은 의견이 있으면 좀 알려줘.”

그의 이름을 들으니까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의 아버지와 우리아버지는 같은 회사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상무였고 우리아버지는 만년계장쯤 되는 위치였다. 그의 아버지가 우리아버지의 보스쯤 되는 위치였다. 아버지가 빚 때문에 퇴직금을 받기 위해 회사를 퇴직하고 나와 다른 일을 할 때 다시 회사에 받아들여준 게 그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사석에서도 술자리에서도 항상 조직 내의 보스위치에 있던 그 분에 대해 감사했었다. 중학교 입시 때였다. 회사에서 임원과 말단 직원이었던 두 사람의 아들이 최고 일류 명문중학교에 들어갔다고 주위에서 축하해 주었다. 조직 내에서 주눅들어있던 아버지는 아들의 명문중학교 입학에 잠시 기를 펴고 신이 났었다.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고 풍을 맞아 예순네살에 돌아가셨다. 이름은 알지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나는 아버지의 상관의 아들인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소심한 성격 탓이었다. 그 친구를 50년쯤 후에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네 아버님이 전무를 하실 때 우리 아버지가 부하였어. 살아계실 때 신세를 많이 졌다고 하시더라구.”

이제야 아버지를 대신해서 그 친구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순간 그 친구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우리 아버지는 퇴직하고 풍이오고 예순셋에 돌아가셨어. 벌써 삼십년이 됐지. 그런데 딱 그 나이가 되니까 내 몸의 상태가 우리아버지와 다르지 않아. 내가 뇌경색이고 심장에도 스텐트를 다섯 개나 박았어. 몸이 자유롭지 못하니까 집안에서도 몇 번이나 넘어졌어. 팔을 못 쓰니까 머리통이 박히고 그래.”

아버지들이 돌아가신 나이가 비슷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우리들이 그 나이가 된 것이다. 아무리 건강관리를 한다고 해도 아버지가 정해놓은 유전자의 길을 벗어나기는 힘든지도 모른다. 아버지들을 보면서 또 아들인 그 친구를 보면서 나는 은근히 겁이 났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아침이면 혈압약부터 시작해서 약을 한움큼씩 먹으며 살고 있다.

“퇴직을 하고 몸도 아픈데 앞으로는 뭘 하고 시간을 보내지?”

그가 내게 물었다. 그의 아버지와 우리아버지가 우리 나이에 하던 고민이었다. 지위와 재산이 그리고 인물이 사람들을 갈라놓더라도 육십이 넘으면 대충 평등해 지는 것 같다. 묘지에 가보면 그 모든 삶의 흔적들이 비석위에 태어난 날과 죽은 날 사이에서 증발해 버린 것 같다. 삶이란 그저 작게 즐거웠던 날의 기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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