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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기술

운영자 2024.03.19 10:24:14
조회 127 추천 1 댓글 0

“원고와 피고는 이혼한다.”

법정에서 판사가 선고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온 변호사였다. 지난 십년 동안 부부 사이에는 많은 갈등이 있었다. 그게 모두 끝나는 순간이었다. 부인이었던 사람이 먼저 나가고 나는 가방을 챙겨서 남편과 그 법정을 나왔다. 법원 복도의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제는 남이 된 여자를 보았다.

“잠깐만요”

내가 여자을 불렀다.

“이제는 모든 싸움이 끝나고 각자 자신의 길을 걸어가게 됐습니다. 이별의 순간 마지막 인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악수라도 하고 헤어지시는 게 어떨지.”

결혼생활의 막이 내렸다. 치열한 권투경기에서도 찢어지고 멍든 얼굴로 상대방과 껴안고 마무리를 한다. 나는 두 사람의 마지막은 진흙탕물이 가라앉길 바라면서 말했다. 여자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그동안 미안했어요. 잘 살아요.”

그 손을 잡은 남편이 말했다.

“그래 잘 살 길 바래.”

그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변호사로 수많은 이혼소송을 대리해 왔다. 헤어지는 순간 서로 등에 대고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경우가 많았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사랑의 기술’은 배우지만 ‘이별의 기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다. 헤어지는 순간 상대방을 축복하는 말 한마디를 해 줄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마음에 낀 많은 먼지들이 닦여 나갈텐데라는 생각이었다.


친구나 선후배 사이에도 마음의 끈이 끊어지고 이별하는 순간이 온다. 많은 세월을 동행하다가 헤어진 뒷자리에 그냥 공허만 남게 해야 하는 것일까. 원로 소설가 정을병씨가 살아있을 때 그와 인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그는 친했던 고향 후배인 소설가와 서먹한 사이가 됐다. 서로 섭섭해 하면서 연락을 단절한 것 같았다. 그 내막을 알 수가 없지만 화해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후배인 그 친구 말이요. 나와 척을 졌더라도 모르는 척 하고 사과라도 한 상자 보내면 마음이 누그러질텐데 ”

그 말에서 참 좋은 이별의 기술을 배운 느낌이었다.


나는 그 후 나와 멀어진 사람들에게 뜬금없이 사과를 한 상자씩 보낸 일이 있다. 생각이 다르거나 오해가 깊어졌을 때는 각자 자기의 길을 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런 때는 서로 최대한 존중하면서 헤어져야 하는 건 아닐까.

이별의 기술이 가장 필요한 순간은 죽을 때가 아닐까. 기술이라고 하지만 방편이 아니고 진심을 용기있게 나타내는 걸 의미한다.

나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아버지는 항상 속에 울분이 차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앉아서 소주잔을 기울일 때 보면 눈물이 반쯤 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말이 없던 아버지는 울분을 어머니에게 폭발시킬 때가 많았다. 어머니는 많이 맞았다. 아버지가 눈을 감기 직전이었다. 아버지는 떨어져 있는 어머니에게 손짓으로 오라고 했다. 어머니가 겁먹고 당황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옆으로 왔다. 어머니에게는 항상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잠재해 있는 것 같았다. 누워있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하자고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결혼하고 사십년이 넘게 살았네. 그동안 내가 너무 무섭게 굴었지? 미안해. 사실은 사랑했어.”

이별을 앞둔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 어머니가 무너져내렸다. 저세상으로 가는 아버지에게 배운 이별의 기술이었다. 용기 있게 내면 깊숙이 있던 진심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부터 이십칠년이 흐른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봄날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천정을 응시하면서 가만히 있었다. 아직 어머니의 의식이 있을 때 이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어머니와 함께 고생하던 지난날의 단편적인 기억들이 영상같이 머리속에 차례차례 흐르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했다.

“엄마,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말없이 천정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누워있던 침대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나의 팔을 쓰다듬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온기가 내 마음으로 물결져 들어왔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과 이별을 했다. 어려서 친했던 동네친구와 헤어졌고 학교때 없으면 못살던 단짝들과도 못본지가 오래된 경우가 많다. 친하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들과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뒷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어떤 향기가 떠돌아야 할까. 이별을 준비하고 사랑의 말을 남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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