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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은자

운영자 2019.01.07 11:35:18
조회 152 추천 1 댓글 0
세상 사람들이 ‘지공세대’라고 부르는 나이가 됐다. 학교와 사회에서 뛰어야 하는 마라톤이 대충 끝난 것 같다. 끝이 보이는 세월이 온 것 같다.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서 위로해 주는 말들이 있지만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죽음을 향해 마지막 걸음을 옮기는 순간들이다. 밥을 위해서 뛰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마음껏 주어진 이 소중한 자유를 어디에 사용할까를 두고 요즈음 행복한 고민을 한다. 되돌아보면 내가 계획한 방향이 아니라 섭리에 의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려온 느낌이다. 30대 중반 무렵 직장의 의자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어떤 존재가 강하게 등을 떠밀었다. 그 존재는 급하게 서점에 가서 성경을 사서 읽으라고 명령했다. 거부할 수 없는 강한 힘이 내면을 덮었다. 그렇게 했다. 다음날부터 처음 읽는 성경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근무시간에 남이 보거나 말거나 성경을 읽었다. 그 얼마후 하나님의 천사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다가왔다. 직장 내에서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당신이 하는 업무는 하나님이 좋아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 도저히 하기 힘든 말이었다. 오히려 내가 근무 중 성경을 보는 걸 미워해야 하는 직책의 사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나의 마음을 일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존재는 마치 성경속의 아브라함에게 길을 떠나라고 하는 것 같이 나에게 무조건 사표를 내라고 강요했다. 그렇게 다니던 기관을 갑자기 그만두고 작은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하나님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사람이나 책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정치의 길로 나선 대학후배가 지나가는 길에 사무실에 들려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인생의 세 가지 출세 길을 생각해 봤죠. 첫째는 정치권력의 길, 둘째는 미국에 가서 학위를 받는 길, 그리고 마지막은 고전부터 시작해서 고시공부 하듯 인문학 책들을 끝없이 읽는 일이예요. 그 중 하나를 나이 마흔 살이 된 지금부터 시작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의 말이 이상하게 강한 전류가 되어 나의 가슴속을 흐르고 지나갔다. 그 다음날 나는 솅케비치가 쓴 ‘쿼바디스’에 1번 번호표를 붙이고 독서인이 되는 대장정의 첫걸음을 띠었다. 그러다 미우라 아야코가 쓴 ‘해령’이라는 책을 우연히 보게 됐다. 일본의 쌀을 실어 나르던 배가 태평양을 표류해서 캐나다의 해안에 도착하는 과정이었다. 주인공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만나게 되고 일본 최초의 크리스챤이 됐다. 문득 내 영혼이 잠시 왔다가는 지구를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게 가장 이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비가 조금만 생겨도 성경과 책을 배낭에 넣고 길을 떠났다. 15년간 지구를 흐르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평택에서 LNG선을 얻어 타고 동지나해를 흐르면서 소설 ‘광장’에 나오는 명훈을 떠올리기도 했다. 태평양을 흘러 하와이와 타히티를 지나고 알래스카 바다오 노르웨이 바다를 흘렀다. 까만 석탄연기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기도 하고 티벳과 히말라야의 골짜기들을 넘어 인도를 가기도 했다. 나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주문받은 법률문서들을 작성해 주는 문서제작공이라고 생각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생겨난 억울함과 고통을 종이위에 문자들로 정교하게 조립하는 일이었다. 약간의 법률지식을 접착제로 사용해서 법정으로 납품하곤 했다. 사건 하나가 종결되면 폐기되어야 할 기록만 공허하게 남았다. 의무로 일하면 그건 부담이었다. 일은 재미가 있어야 했다. 나는 재미있게 일을 하는 방법을 생각해 봤다. 사건내용을 모티브로 소설이나 수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환경과 장소를 바꾸고 사실을 변용해서 새로운 주인공을 창조해 보았다. 피가 통하고 혼이 스민 글을 쓰는 장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어느새 인생의 황혼이 왔다. 밤이 되기 직전의 고요가 나의 영혼에 깔린다. 소중한 남은 시간과 자유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기도해 봤다. 하나님은 항상 주변을 통해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언론인출신의 친구가 시집을 한권 보내면서 그 사이에 이런 내용의 글이 든 쪽지를 끼워 놓았다.

‘하던 일을 접고 은둔형 문사(文士)의 세계로 표표히 떠납니다.’

그는 자신을 무면허 자칭시인이라고 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밥벌이를 그만두고는 북한산기슭에 집을 지어놓고 경전을 읽고 일지를 쓰는 일로 만년을 보냈다. 우연히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스위스 산골마을에서 시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았다. 스위스의 겨울 전원풍경속을 지나친 일이 있었다. 맑은 강물이 흐르는 옆에 눈 덮인 크고 작은 예쁜 집들은 문이 닫힌 채 적막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을까 호기심이 일었었다. 화면은 그런 집들의 내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진공 속 같이 조용한 작은 집 골방에서 기술자 혼자 시계를 만들고 있었다. 눈에 낀 확대렌즈를 통해 마이크로 세계를 들여다보며 미세한 부품들을 깎고 조립하고 있었다. 옆집의 장인은 혼자 주방옆 작업대에서 작은 시계판에 아름다운 우주를 문양으로 새겨 넣고 있었다. 시계 장인이 그렇게 일 년 공을 들인 후에 수제품인 명품이 탄생한다고 했다.

그런 세월을 살아온 장인들이 불쑥 내뱉는 한마디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었다.

“저는 시간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시계 장인의 말이었다. 그는 작은 시계소리지만 메마른 금속음이 아니라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것 같이 생명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가슴에 잔잔한 울림이 오는 걸 느꼈다. 확대경을 눈에 붙이고 마이크로의 세계를 창조하는 시계공 같이 삶의 남은 시간을 나의 골방 책상에서 돋보기를 끼고 성경 속 진리의 세계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었다. 낮에는 강가나 호숫가에 가서 한참을 앉았다가 저녁이면 돌아와 진리를 묵상하는 아파트의 은자가 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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