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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운영자 2020.07.13 14:42:49
조회 230 추천 6 댓글 0
초등학교 4학년일 때였다. 몇 명의 아이가 함께 모여 공부를 했다. 산수의 응용문제를 풀 때 마다 나는 주눅이 들었다. 둔해서 문제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 뛰어난 아이가 있었다. 갑자기 전깃불이 반짝 들어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알았다”하고 바로 암산을 해서 답을 하는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기가 죽었다. 그 뛰어난 아이는 그림도 잘 그렸다. 그중에서도 로마병정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 아이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종이의 흰 면만 보면 로마병정을 그리곤 했다.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아이가 그린 로마병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연필로 선을 쳐 지나간 장단지 근육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림이 살아있었다. 그 아이를 보면서 나는 머릿속이 바위 같다는 열등감을 느꼈다. 미술 시간 선생님이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나는 공간을 그릴 수 있는 감각이나 묘사력이 반에서 제일 바닥이었다. 나는 그 아이를 보면서 질투와 시기로 마음이 뒤틀렸다. 친해질 수 있는 착하고 선한 아이였는데도 그 기회를 영원히 놓쳐 버렸다.

대학 시절 잠시 음악을 한 적이 있었다. 중학 시절부터 학교에서 밴드 반을 한 관계로 드럼을 쳤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가 그룹의 리더였다. 그 친구는 중학교 일학년 때부터 하루에 피아노를 두 시간 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좋아서 스스로 음악속에 빠지는 친구였다. 그는 외국의 어떤 곡을 들어도 바로 악보로 만들었다. 자기 파트뿐만 아니라 내 분야까지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죽겠다고 연습해도 안되는데 그 친구는 새로운 리듬을 창조해서 시범을 보이면서 나를 가르쳤다. 그의 놀라운 음악성을 보면서 나는 안 되겠다는 것을 자각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은 십 달란트를 어떤 사람에게는 오달란트를 그리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일 달란트를 주었다. 나는 일 달란트를 받은 가엾은 인간이라고 느꼈었다.

군에 입대해서 훈련을 받을 때였다. 정말 나는 운동신경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교관은 툭하면 ‘선착순’이란 달리기 시합을 시켰다. 연병장의 멀리 보이는 축구 골대를 뛰어갔다가 돌아오는 벌이었다. 일등은 바로 앉아 쉬는 혜택을 받는 게임이었다. 배가 나와 오리같이 뒤뚱거리는 나는 연병장에 엎어지는 마지막까지 뛰어야 했다. 앉아서 쉬는 나머지 훈련받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기도 했다. 유격훈련을 가서 진흙탕 물 위를 로프를 잡고 건너뛰는 과정이 있었다. 앞의 사람은 줄을 잡고 가쁜하게 그 도랑물을 뛰어 넘었다. 나는 중간에 떨어져 더러운 물 속에 쳐 박혀 버렸었다.

그 시절만 해도 사회나 군대나 곳곳에 불공평이 있었다. 부자집 아들이나 힘 있는 집 아들은 아예 군대에 오지를 않았다. 멀쩡하게 같이 학교를 나왔던 친구들이 갑자기 시력 때문에 병역이 면제되기도 했다. 낯선 병명을 적은 진단서만 돈으로 살 수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 군대에 가서도 또 다른 불공정이 있었다. 특권층 집 자식들은 보안부대 같은 곳으로 빠졌다. 조금만 집에 힘이 있어도 서울지역이나 후방부대에서 근무했다. 나는 눈이 두껍게 덮힌 최전방 철책선 부대에서 근무했다. 부모의 재력이나 지위가 행복으로 가는 결정적인 능력의 시대였다. 지금은 그걸 불평이라도 하지만 그 시절은 그게 세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말 한마디 하지 못하던 때이기도 했다. 어느 날 산꼭대기의 바라크로 지은 막사 안에서 나를 들여다보고 공허한데 너무 놀란 적이 있었다. 재능도 지식도 능력도 선한 것도 모든 좋은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의지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발견한 순간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겸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가 먼지 같은 나 자신이었다. 가장 낮은 수군인 일 달란트를 받은 인생이지만 그걸 땅에 묻었다가는 그것마저 빼앗길 것 같아 노력했었다. 며칠 전 비가 내리던 밤눈에 좋다는 블루베리를 사러 동막골을 갔다오는 길에 그 부대 앞을 지나왔다. 깜깜한 밤에 위병소의 불빛이 외롭게 깜박이고 있었다. 자기발견은 믿음과 겸손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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