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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작

문갤러(175.192) 2023.09.17 22:37:35
조회 2998 추천 12 댓글 6
														

이정화, 「골조의 미래」 외 4편


< 골조의 미래 >


푹신한 의자와 비어 있는 벽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선생이 건네주는 사탕 두 알


공기가 더없이 건조해지고

서서히 등이 굽어질 때 묻는다


-그 집이 제 것이 맞을까요


수년간 지어온 이 집엔 각별한 애정이 있지만

한 발만 들여도 금세 다시 지어야 할 만큼 형편없다


-전 애인이 가져다준 벽돌 하나. 지문이 남은 채 굳어버린 시멘트. 이유 없이 생긴 자국들. 망치로 못을 내려칠 때 들었던 노래라든가. 한순간에 닫히는 문은 제 것이 아니었는데.


선생과 나는 동시에 나무 집을 만들어간다

니스칠 된 벽이나 바람이끼어들 수 없는 단단함을 떠올리며

코앞 사탕에 손을 뻗는다 사탕 껍질을 벗겨내 입안에 굴린다


-함께 벽지를 발랐어요


이따금 거짓말이 필요하다

선생은 지금 나의 집을 짓고 있으니까


-사탕이 더 달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선생과 마주한다

서로의 집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긴 시선


돌이켜보면 내가 말한 집이라는 건 어디선가 발견될 수도 있다

그때 나는 그 집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지만


-선생님, 그 집이 저의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줄자로 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딱 이만큼이 너의 집이다......


사탕 껍질을 구기고 선생의 말을 기다린다

벽 너머 누군가 이곳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소리


-그렇지만 모든 건 영원히 당신의 것이겠죠


나와 선생 사이 단단한 정적이 완성에 가까워지고. 노크 없는 문. 새것 같은 폐허에 깃드는 숨소리. 컴퓨터 작동. 선생 뒤에 여전히 깨끗한 유리와 어려운 형태의 오브제. 녹은 사탕이 혀 밑으로 미끄럽게 굴러가는데. 다시 선생과 눈을 마주한다. 등을 평평하게 편다.





< 완만하기 >


공원에서 낮 동안 서서히 부서지는 콘크리트를 구경했다


몇 년 전까지 저 건물에서 늙은 개를 키우던 친구는

더 이상 이 동네 사람이 아니다


건물에선 공원이 잘 보였을 것이다


분진은 오래 맴돌고

사람들은 걷고 있다


인공 호수 주위 정해진 트랙


유모차를 끌며 한숨을 뱉거나

연인과 발맞춰 걷는 사람

전화기를 든 채 허공을 향해 쏘아붙이거나

홀로 뛰는 사람 


다른 이유로 공원에 들어와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매일 정해진 표정과 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이어지고

오늘과 어제를 혼동했다


먼 미래와

머나먼 과거의 일들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신도시의 공원은 너무나 완만하기에


친구가 키우던 슈나우저는 죽었지만

친구는 또다시 슈나우저를 키운다


어린 날 우리가 개를 데리고 걸었던 거리의 구획은 반복되고

이곳에 쌓인 연약한 평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소진해

하나의 언덕을 오르듯이

가파른 호흡을 밟아 오른다


해가 지면 켜지는 공원의 가로등처럼

나아가고 있지만 멈춘 것 것같이 보이는 사람들


그들이 지닌 마음의 높이가 궁금해질 때


죽은 풀들 사이로 새로운 풀들이 자라고

모두가 그 자리를 밟고 지나갔다



< 미워도 사랑하기 >


어떤 물체든 세 개의 지지대가 있으면 평온히 서 있을 수 있대


우리가 새로 산 의자는 삐걱거리고

너는 알룩진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대수롭지 않게


다리가 여러 개인 생물들을 떠올렸다

사랑한 뒤에 상대방을 할퀴는 사마귀나

미래를 위해 그물을 맺는 거미


그런 생물들의 균형을 만드는

지지대의 행방을


바닥에 떨어진 옷을 주워 입고 컵의 얼룩을 문지른다


너는  자기 위해

안경과 슬리퍼를 벗고


지지대의 튼튼함이 변수겠다


엄밀히 말해 서 있다기보다는

우연히 멈춘 상태가 유지되는 거지


사랑해


너는 침대에 누워

머리긑까지 이불을 덮고

얕은 숨을 반복한다


사랑해라는 글자는 세 음절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나 견고하다 믿었는데


삐걱이는 의자에 앉은 나는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왼쪽으로 기울었다


어느 쪽이 제대로 서 있는지 알지 못하고

의자를 타고 개미 한 마리가 유연히 올라오고 있었다


움직이는 개미의 다리는 여섯 개로

위태롭게 짝이 맞았다


두 다리를 쭉 뻗으면 밭끝에 닿는 너


너는 나를 두고 딴짓하는 것처럼

대화 중에 들킨 지루한 눈빛처럼

아무 때나 사랑해 말하기 위해 나를 멈춰둔 것처럼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 식탁보 접기 >


우리가 하는 일이 전부 시시하게만 느껴져

식탁보를 접으며 너는 말했다


주말 오후 티브이에선 무엇이든 해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반영되고

그때마다 우리는 식탁보를 바꿨다


고단한 한 주였어


너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단에서 두 번이나 굴렀지만

도와주는 이 없는 무릎을 털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식탁보의 양끝을 맞대었다가 펴기를 반복하고 있다


티브이 속 아이들은

앞니가 빠진 얼굴로 엉성히 자신을 소개한 뒤에

자랄 곳 없이 완벽한 음을 쌓아간다


아이의 빛나는 결말이 그려지는

오늘은 이렇게나 평범한데


저애는 꼭 저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다


잠자코 아이의 작은 손이 들려주는 연주를 듣다가 밥을 차렸다


식탁보를 접다가

밥을 가장 잘 차리는 사람들같이


시금치 볶음을 소분하고

계란 물을 푼 햄을 굽고


우리도 천재였던 적이 있었을까?

반찬을 입에 넣다가 함께 씹은 머리카락을 빼내며


너와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넘어지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기의 천재

반복되는 날들 속에서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빠지기 천재


그래도 나는 가끔

나눌 말 없는 하루에도

함께 반찬을 만들고 식탁보를 접으니까


입안에 음식이 가득 들었다는 핑계로

그다음 말은 하지 않은 채


방안의 연주는 시시할 새 없이 끝났다


티브이에선 다음 이 시간에 방영될 이야기를 알려주고


우리는 늘 다음 주를 맞이했다

고작 식탁보를 위해




< 커브 >


커브를 돌자 곽 막힌 도로엿습니다


멀리서 경광봉이 흔들리고 잇습니다


우리는 모래시계를 사서 돌아가는 길입니다


차가 멈췄네

내가 말하자

다 움직이고 있어

내가 브레이크를 잡고 있는 것뿐이야

애인은 말했습니다


애인은 예상치 못한 약속이 생길 때 화가 난다고 했습니다


모래시계를 눕힙니다

차가 앞으로 천천히 나아갑니다


뛰어가는 토끼를 생각합니다

담장 밖을 넘어가려고

계속해 뒷발질하는 작은 토끼


서 있던 곳에서 벗어난 뒤에

멈춤을 이해하게 되듯이


손을 뜯다가 피가 나고

모래시계를 뒤집습니다


차 안의 온도는 유지됩니다


고이는 대화


애인은 또다른 모래시게기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좀더 작은 것

금방 시간이 흘러가는 것


시간을 생각하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변한 것은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을 구별할 수 없는 토끼들이

계속해 늘어가고 있었으나


다시 커브를 돌아 우리는

처음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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