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숨어서 함께 사는 천사

운영자 2011.05.10 11:03:38
조회 258 추천 0 댓글 1

  얼마 전 사십대 초의 한 여인을 보았다. 힘든 가정에서 겨우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 십 년 전 그녀는 조그만 회사 경리직원으로 출발했다. 매일 전표와 회계장부에 감정 없는 숫자를 적어 넣고 따지는 메마른 일들이었다. 그녀는 그냥 운명같이 그 일들을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꽁꽁 얼어붙은 겨울 어느 날 길거리에 앉아있는 거지를 보았다. 그녀는 거지의 손에 천원짜리 한 장을 꼭 쥐어 주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슴 한 구석이 훈훈해 지는걸 느꼈다. 그녀는 다음부터 월급을 타면 춥고 어려운 노인들이 사는 양노원에 한 달에 만원씩을 몰래 보냈다. 깊은 속에서 따뜻한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받는 기쁨보다 주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것을 얼핏 알게 되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마음이 끌리는 곳이 있으면 십 만원씩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이십년이 넘게 흘렀다. 나는 감옥에 간 동생 때문에 사건을 의뢰하러 온 그녀와 여러 시간 상담했다. 막내 동생이 9살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년차이로 갑작스런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어린 동생을 잘 돌보라고 딸인 그녀에게 유언같이 말하고 저 세상으로 갔다. 귀염둥이였던 동생은 혼자가 되면서 학교를 가지 않고 범죄세계에 여러 번 빠져든 것이었다. 어느새 그녀도 사십대의 중년이 되어 옷을 조금씩 수입 해다가 다른 나라에 파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동생을 위해서 재판장에게 탄원서를 올리려고 처음으로 한번 계산해 봤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동생을 변호하는 나에게 몇 장의 서류들을 내놓았다. 그 서류들은 그녀가 십 만원씩 후원한 단체들에게 갑자기 부탁해서 받은 지원금 영수증이었다. 고아원 양노원 나환자촌을 비롯해서 수십개 단체였다. 십 년이 넘는 단체도 많았다. 영수증을 보면서 마치 보험금을 낸 증서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대충 총액을 계산해 나갔다.


  “어 일억 원이 훨씬 넘네?”

  나는 덧셈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 지난 이십 년 간 가난한 경리직원인 그녀가 남을 위해 바친 돈이 천문학적 숫자인 것이다. 도무지 믿기가 힘들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일류기업체에 오래 근무하고 퇴직을 하는 친구들이 받는 퇴직금이 그 정도의 액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돈을 손에 들고 바들바들 떨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연명할 것인가 전전긍긍 했다. 또 그 정도의 액수면 신문에 커다랗게 주인공의 활짝 웃는 사진이 나면서 이 사회의 영웅같이 보도될 만한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 앞에 앉아있는 그녀의 모습은 허름한 코트차림의 소박한 여자였다. 머리조차 한번도 미장원에 가서 멋을 부린 적이 없어 보였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경리사원으로 있으면서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닌 이십 여 년 동안 이렇게 하다니 믿어지지가 않아요.”

  나는 한편 놀라고 한편 부끄러운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저도 몰랐는데 이번 동생 탄원서에 누나가 좋은 일한 거 쓰라고 해서 계산해 보니까 그렇게 되네요-----”

  그녀가 수줍은 듯 조용히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꾸준히 이런 일을 하게 됐어요?”

  내가 물었다.


  “뭐 특별히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하다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은행통장을 가지고 있는 거나 기부증서를 가지고 있는 거나 같은 거죠 뭐”

  그녀의 묘한 대답이었다. 은행통장은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 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부증서는 그렇지 않았다. 돈은 줄 때 없어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묘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은행통장은 그 금액이 아무리 많아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러나 저 세상에 갔을 때 그녀는 기부증서에 적혔던 금액의 수 백 배를 천국의 은행에 예금으로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분명 그럴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성경을 보면 예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늙고 고독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에게 물 한잔이라도 주면 그게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나중에 보상하겠다고 했다. 나는 범죄를 저지른 그녀 동생의 삶과 뒤늦었지만 절실한 참회를 상고 이유서에 한 줄 한 줄 정성을 다해 적어 나갔다. 누나의 짙은 사랑이 있는 한 동생은 다시는 범죄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유언을 생각하면서 기도원에 들어가 열심히 기도했다. 그러나 이 세상 법정에서 보는 것은 본인의 참회보다 그리고 가족의 진정한 사랑보다는 수사기록에 적힌 참담한 범죄내용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면으로 바쁜 세상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볼 여유와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동생은 오랜 징역생활을 하게 됐다. 이럴 때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절실한 그 사람이 중한 처벌을 받는 날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유명인은 거액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된 사진이 신문에 크게 실리기도 했다.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불공평하기 때문에 화가 나고 원망을 하는 것이다.


  “괜찮습니다. 감옥 안에 있다고 동생이  바깥보다 꼭 불행한 건 아니니까요. 저는 동생에 대한 애정의 끈을 잠시도 놓지 않을 거예요. 비록 감옥 안에서지만 정말 귀한 게 뭔지 본질적인 게 뭔지 알게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얼어붙은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추천 비추천

0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경제관념 부족해서 돈 막 쓸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5/13 - -
508 변호사와 조폭 [1] 운영자 11.06.23 618 2
507 사법종사자들의 말과 태도 운영자 11.06.23 396 1
506 어느 무신론 철학지망생의 변신 운영자 11.06.21 257 0
505 위대한 유산 운영자 11.06.21 188 0
504 악령과 자유인 운영자 11.06.21 252 0
503 노르웨이바다에서 만난 두 선배 [2] 운영자 11.06.16 445 0
502 고 김대권검사 약전 운영자 11.06.16 1211 0
501 착한 부자의 분노 운영자 11.06.16 322 0
500 황혼이혼 - 아낌없이 주는 아내 운영자 11.06.14 455 0
499 좀도둑 아줌마의 소망 운영자 11.06.14 292 0
498 쇼생크탈출 운영자 11.06.14 620 0
497 들었다 놓더라구요 운영자 11.06.09 262 0
496 가족은 사랑입니다 운영자 11.06.09 235 0
495 검은딸기의 겨울 운영자 11.06.09 280 0
494 오윤덕 변호사의 돈 쓰는 법 운영자 11.06.02 662 1
493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 4 [1] 운영자 11.06.02 290 0
492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 3 운영자 11.06.02 241 0
491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 2 [1] 운영자 11.05.31 359 0
490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 1 운영자 11.05.31 450 1
489 변호사 저널리즘 운영자 11.05.31 205 1
488 내가 만난 어떤 천사 운영자 11.05.26 304 0
487 도둑엄마의 모정 운영자 11.05.26 217 0
486 어느 노화백의 곤혹 운영자 11.05.26 232 0
485 멍들어 버린 엄마의 사랑 운영자 11.05.24 247 0
484 박쥐장 명인의 서러움 운영자 11.05.24 238 0
483 어느 장군의 죽음 운영자 11.05.19 481 0
482 변호사를 그만 때렸으면 운영자 11.05.19 308 1
481 가수와 변호사 운영자 11.05.19 297 0
480 스승 변호사 운영자 11.05.19 250 0
479 예술인 K교수의 추락 운영자 11.05.17 351 0
478 법과 인간 사이에 낀 K부장판사 운영자 11.05.17 362 1
477 감옥희망자 땅꼬마 아저씨의 사연 운영자 11.05.17 255 0
476 어느 심부름센터 직원의 고백 운영자 11.05.13 839 1
475 마음좋은 쌀가게 아저씨의 수난 운영자 11.05.13 278 0
474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아요 운영자 11.05.13 269 0
473 어느 공무원의 성급한 사랑 운영자 11.05.10 478 1
숨어서 함께 사는 천사 [1] 운영자 11.05.10 258 0
471 공장에 나가는 장군부인과 전기공 할아버지 운영자 11.05.10 406 1
470 작은 천사의 진짜사랑 운영자 11.05.05 258 0
469 어느 아버지의 절규와 냉냉한 법정 4 운영자 11.05.05 294 0
468 어느 아버지의 절규와 냉냉한 법정 3 운영자 11.05.05 267 0
467 어느 아버지의 절규와 냉냉한 법정 2 운영자 11.05.05 284 0
466 어느 아버지의 절규와 냉냉한 법정 1 운영자 11.05.05 350 0
465 모든걸 죽음과 함께 가지고 갈께요 운영자 11.05.05 392 0
464 책 만드는 목사와 비전향장기수 운영자 11.04.28 301 0
463 세금을 정말 다 낼겁니까? 3 운영자 11.04.26 380 0
462 세금을 정말 다 낼겁니까? 2 운영자 11.04.26 314 0
461 세금을 정말 다 낼겁니까? 1 운영자 11.04.26 314 0
460 절대고독을 벗어나는 법 운영자 11.04.26 350 1
459 강한 어느 미국여대생 운영자 11.04.26 420 1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