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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퇴근길 "조금이라도 더!"…'5배 폭증' 거래량 2조 넘었다
친절한 경제 시간입니다. 오늘(10일)도 한지연 기자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한 기자 우리 주식 거래 시장에 첫 대체거래소가 출범한 지 두 달 정도 지났잖아요. 성적표를 보니까 거래량이 상당히 늘었다고요?지난 두 달간 프리·애프터마켓 주식 거래량이 이렇게 5배 급증하면서 출퇴근 주식 거래가 안착했다는 평가입니다. 대체 거래소 넥스트레이드 모르시는 분들 없겠지만 설명드리면 지난 3월 4일에 영업을 시작했죠.하루 중 12시간 주식거래가 가능해져서 원래 한국거래소와 공통으로 정규 거래장인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20분까지 운영도 하고 별도로 정규 거래시간 전후로 프리·애프터 마켓인 8시부터 8시 50분까지 50분간, 또 오후 3시 40분부터 저녁 8시까지 엽니다.그래서 최근 프리·애프터 마켓의 주식 거래량은 총 7천700만 주가 넘고 거래대금은 2조 5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면서 10개 종목으로 첫 거래를 시작한 이후로 796개로 거래 종목을 최종 확대한 지난 3월 31일과 비교하면 최근 거래량은 5.1배 늘었고, 거래대금은 5.5배 증가한 겁니다.특히 오전 시간 정규 거래장이 열리기 전인 50분밖에 되지 않는 프리마켓 거래가 활발한데요.간밤에 뉴욕증시 움직임과 미국발 뉴스에 정규장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대응하려는 투자자들의 수요가 몰리는 것으로 보입니다.최근 기준으로 전체 국내 증시에서 넥스트레이드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래량 기준 15.1%에 달했는데요.지난 3월 31일 6.6%였던 거에 비하면 점유율이 크게 뛰었습니다.거래대금 기준으로 하면 같은 기간에 16.3%에서 30%로 올랐습니다.이렇게 수요가 몰리고 있는데도 워낙 거래량 규제가 빡빡하다 보니까 규제 완화에 속도를 내야 한다. 이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데 현행 규정은 어떻습니까?현행 규정을 좀 보면, 6개월간 일평균 거래량이 시장 전체 거래량의 15%를 초과할 시에 이튿날 다음 날 모든 거래가 중단이 되고요. 또 개별 종목 6개월간 일평균 거래량이 해당 종목 전체 거래량의 30%를 넘을 시에는 거래가 제한이 됩니다.물론 넥스트레이드가 시작된 지 이제 3개월이 됐으니까 규정이 6개월이니까, 6개월간 일평균을 내려면 당분간 거래가 중단되는 상황이 오려면 적어도 3개월은 더 넘어가야 하겠지만, 거래량 한도가 완화가 되려면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도 필요하고 시스템 정비가 돼야 하기 때문에 논의는 빨리 진전되는 게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습니다.그래도 넥스트레이드가 좀 더 탄탄하게 운영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성장이 필요하겠죠.그래서 원래 9월이었던 증권사 참여 확대를 10월 말로 미룬 것도 이 이유에서고요.출범 전부터 예고했던 상장지수펀드, ETF 거래 도입도 무리하게 속도를 내지 않는 분위기입니다.최근 잇따르는 증권사의 거래 오류가 넥스트레이드 때문이 아니냐, 이런 업계 우려도 의식한 것으로 보입니다.그런데 이 넥스트레이드 거래를 보니까 외국인 비중이 크게 늘었다고요?그렇습니다. 출범 첫 달인 3월에 외국인 비중이 0.4%였는데요. 6월 들어서는 9%의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비중이 20배로 쑥 늘었습니다. 사실 개인 투자자만으로 넥스트레이드가 살아남을 수가 없거든요.외국인이나 기관의 대규모 거래가 있어야 시장에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넥스트레이드 출범 직후부터 개인투자자 쏠림 문제가 지적돼 왔습니다.물론 30%대를 넘나드는 한국거래소의 외국인 비중에 비하면 아직 낮은 수준이지만 대내외 경제 불안정성으로 위축됐던 국내 증시가 4월을 저점으로 반등하면서 외국인 자본이 10개월 만에 들어오면서 수급이 개선됐고, 그러면서 넥스트레이드에도 일부 유입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앞으로 외국인 비중은 더 커질 것으로 보이는데요.앞서 언급했듯이 오는 10월에 증권사 2차 오픈에서 외국계 증권사도 참여할 전망인데 이렇게 되면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한 번 더 외국인 자본이 들어올 것으로 보입니다.
작성자 : 빌애크먼고정닉
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광란의 북진(p.31~33)
[시리즈] Dark Moon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책 소개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1. 프롤로그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2. 정보적 상황(1)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3. 정보적 상황(2)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4. 정보적 상황(3)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5. 처음 여섯 달(1) ·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인천상륙작전(p.20~25) · 재재업)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장사상륙작전(p.25~30) 번역)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8. 광란의 북진(p.31~33)Dark Moon : Eight Army Special Operation in the Korean War다크 문 : 한국전쟁기 미 8군 특수작전Ed Evanhoe 저2. 처음 여섯 달 – 1950년 6월-12월 (4)(p.31~)38선으로의 광란의 질주가 인천 상륙과 낙동강 돌파 직후 이어졌다. 9월 말경, 맥아더 장군과 워싱턴 사이 북한으로 진격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격화되었다. 맥아더는 전쟁의 종결이 북한의 총체적인 패배에 의한 통일로 달성된다고 주장했다.워싱턴은 꾸물거렸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맥아더에 동의했지만, 그렇지 못한 상당수도 있었다. 가장 큰 반대는 국무부로부터 일었는데, 국무부는 그런 움직임이 3차세계대전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남한의 대통령 이승만은 9월 말 국군에게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명령했고, 이 논쟁을 탁상공론으로 만들어버렸다.10월 1일, 국군 2개 보병중대가 주문진에서 38선을 넘었다. 소규모 북한군과의 쏜살같은 총격전이 뒤따랐으나, 북한 수비대가 북쪽으로 퇴각하면서 종료되었다. 같은 날, 38선의 다른 곳에 걸쳐, 국군 부대들이, UN사와 미 8군의 정지 및 철수 요구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북쪽으로 물밀듯이 들어갔다. 모든 군사 및 경제적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위협조차 남한 측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승만의 낙장불입(fait accompli)은 워싱턴을 격노케 했지만, 결국은 맥아더가 미군 및 UN군을 북한으로 투입해도 된다는 허가를 뒤늦게 받았다.미 1군단과, 그에 속한 국군 주력이 함께 38선을 넘을 때, 미 10군단은 북한 동해안의 원산에 상륙작전을 준비했다. 동시에, 미 9군단은 한강 이남의 대전-청주 지역에 집결했다. 9군단의 임무는 9월 인천상륙과 낙동강 돌파로 퇴로가 끊긴 3~4만의 북한군 병력을 추적하고, 구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으로 향하는 통신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다음 몇 주간 38선 이북에서는, 각 연합군 부대들이 다른 부대보다 더 많은 영토를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마치 패튼의 프랑스 진격을 방불케했다. 진격 도중 조직된 저항은 경미했다. 병사들은 “압록강으로 가서 크리스마스에는 집으로”라는 구호를 되풀이했다. 이 이른 승리의 함성은 Stars and Stripes 지에 실린, 크리스마스 쯤에는 병사들이 한국을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한 맥아더의 성명에서 기인했다.진군이 계속되면서, UN군은 시내와 마을들이 이미 이북의 반공주의자들의 통제 하에 있는 경우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역 공산당 관료들의 시신은 전신주에 매달려있거나, 구덩이에 엎어져있거나, 혹은 시내와 마을에 전시되어있는 체로 발견되었다. 이런 경우는 특히 황해도에서 뚜렷했다.(~p.31)황해도는 북한 남서부의 지역으로, 북쪽으로는 대동강에 경계하고, 동쪽으로는 예성강, 남쪽과 서쪽으로는 황해에 맞닿았다. 황해도는 농업에 의지했다. 북한 중앙 위원회가 1947년 개인 소유의 농장 및 기업을 빼앗아 국유화하자, 도민들은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는 조직적이지 못했고, 빠르게 소련군과, 소련군의 자문을 받는 북한군, 그리고 북한 내무군* 부대에게 진압되었다. 살아남은 저항 세력들은 산으로 달아나, 다음 2년 반동안 2~3명의 소집단에서 서서히 크고 활동적인 반공 유격대로 발전되었다.(*) North Korean People’s Field Police, 북한에서는 치안 업무를 내무성에서 담당했으며, 책에서는 Field Police로 통칭하나 중앙의 내무성 산하 경비대(보안대)나 지방의 도 내무부>시/군 내무서>내무분서>분주소>파출소 등 여러 조직이 운용되었음.1947년 북한 공산당이 내놓은, 저항이 동반된 또 다른 포고령은 바로 국민개병제, 또는 징병법이었다. 이 법은 17세와 25세 사이의 모든 건장한 성인 남성이 북한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규정했다. 복무 기간은 명시되지 않았다. 이 법안은 추가로 수천의 젊은이들을 공산당으로부터 달아나도록 만들었다. 일부는 활동 중인 유격대에 합류했으며, 나머지는 그저 숨었다.*(*) 실제로는 이 시기 북한의 병역제도는 형식상 모병제로(자발성과 강제성이 공존하는 ‘할당제가 부과된 모병제’), 공민증이 교부되는 만 18세부터 만 25세까지를 대상으로, 1948년부터 지역별로 인원을 할당해 전국적인 모병사업을 진행했으나, 기준에 미달하거나 건강 상 문제로 불합격하는 이들이 많아 할당 인원 중 일부만이 확보되었으며, 개인 사정으로 입대를 거부한 이들도 많았음.1948년과 1949년 동안, 북한 전역의 유격대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초기에, 무기는 모두 훔치거나 개별 병사나 경찰들에게서 빼앗은 것이었고, 그러고는 다른 병사들이나 소규모(2~3인) 내무부 파출소에서 더 많은 무기를 노획했다. 유격대가 충분한 무기를 노획해 소규모 인민군 분견대, 혹은 좀 더 대규모의 보안대를 공격해 더 많은 무기와 탄약을 노획할 수 있게 되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950년 즈음엔, 수천의 무장한 유격대가 북한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공산당이 달아나고 UN군이 오고 있다는 소식이 유격대에게 들려오자, 유격대는 산속의 은거지에서 나와 시내와 마을을 장악했다. 현지의 공산당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났다. 일부는 안전하게 도망쳤지만, 그렇지 못한 상당수는 유격대원들이나, 지역 공산당 관료나 치안대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성난 현지 주민들의 손에 죽었다. 황해도에서만 수천명의 당원증을 가진 공산당원들이 유격대의 총알이나 칼날에 최후를 맞이했다. 이런 일들은 비단 황해도 뿐만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고, UN군이 북진하면서 북한의 다른 지역에서도 벌어졌으나, 황해도에서처럼 광범위한 것은 아니었다.황해도 봉기의 대표적 사례인 신천 10.13 봉기. 이 시기 신천 지역에서는 좌익과 우익의 충돌로 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음. 한편 북한은 이를 신천대학살이라 칭하며 미군(?)이 학살을 주도했다고 주장하고 있음.10월 중순, 미 해병 1사단이 원산을 탈환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기획했다. 소련제 기뢰로 이루어진 띠가 원산만으로의 진입을 차단했으며, 상륙은 며칠 동안 지연되었다. 해병대가 상륙하기 직전, 국군이 원산에 다다르면서 계획된 진공작전은 정례적인 상륙 훈련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미 해병대는 1950년 10월 26일 아군 해안에 상륙했으며, 교전에 합류하기 위해 미 육군 수송대 트럭편으로 해안을 따라 멀리 이동했다.(~p.32)소해 작전 중 기뢰에 피격된 YMS-516 공주함.한국 해군에서도 PC-704 지리산함을 비롯해 많은 함정과 인명이 희생되었다.서부에서, 평양이 10월 19일 UN군에게 함락되었다. 이튿날 187공수연대전투단이 평양에서 30항공마일 북쪽의 철로 및 주요 도로의 교차지점인 숙천과 순천시로 강하했다. 187공수의 임무는 두 가지였는데, 북한군이 북쪽으로 탈출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과, 압록강으로 향하여 중국으로 급히 이송되고 있던 UN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소수의 미군은 구출되었지만, 나머지 소수는 처형되어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군 포로들은 이미 187공수의 강하지점에서 먼 북쪽에 있었다.공수 강하 직후 곧 서해안의 신안주와 안주가 점령되었다. 그곳에서부터 UN군은 흩어져 압록강을 향해 여러 진격로를 취했는데, 바로 신안주-삭주, 신안주-단둥*, 신안주-초산, 신안주-만포진** 국도였다. 동해안에서는 해병 1사단이 흥남-하갈리 도로를 따라 진격했으며, 국군은 러시아로 향하는 해안국도를 따라 급속하게 이동했다. 해안국도상의 국군 전방에서 미 7사단이 10월 26일에 원산에서 노상거리로 86마일 북동쪽인 이원으로의 무저항 상륙을 성사시켰다. 같은 날, 국군 6사단 7연대가 초산의 압록강변에 도달했다.(*)원문은 Antung.(**)원문은 Man’ojin이나 오자로 보임1950년 10월 3일, 함흥에서 국군 1군단이 노획한 중공군 포로들.중공군 1차 공세의 온정리/운산 전투의 1달 전, 중공군 2차 공세의 청천강/장진호 전투에서 2달 전 시점밝은 낙관주의로 10월의 마지막 주가 시작됐다. 북한군복을 입은 중공 육군 정규군들이 포로로 잡히고 있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50년 10월 31일, 북한군 잔당은 신안주 북동쪽, 신안주-초산 국도 상의 운산 지역에서 국군 1사단을 상대로 최후의 저항을 벌이려는 듯 보였다. 같은 날, 국군은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토크 남동쪽 70항공마일밖에 떨어지지 않은 인제*에 입성했다.(*)원문이 Inje. 나진-블라디보스토크 거리조차 105마일이 넘어가고, 책에서 근거로 든 애플만의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에도 이런 서술은 없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오류인지 모르겠음. 동부전선의 국군은 10월 27~28일 풍산 및 성진까지 진격함.중공군 1차 공세의 온정리/운산 전투11월 1일, 상황은 극단적으로 바뀌었다. 정보부서는 중공 정규군 1개 사단의 예하부대가 북한군과 나란히 교전중이었음을 식별했다. 다음 며칠간 정보부서는 전선의 여러 지점에 걸쳐 11개의 정규 중공군 사단을 더 식별했으며, 중공군 사단은 압록강으로 진격하는 국군 사단에 강력한 반격을 감행했다. 격렬한 교전이 초산과 운산, 그리고 덕천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미 24사단, 1기병사단, 2사단에 이뤄진 공격은 청주로, 그리고 다시 신안주로의 후퇴와 청천강을 따르는 방어선의 형성을 강제했다.중공군이 10군단 지역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을 때, 북한군과 중공군 소부대가 전방부대의 뒤를 끊고, 10군단 예하부대가 후퇴하려면 제거되어야만 할 노상 차단진지를 구축했다. 그러고는 중공군은 나타났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국면에서 자취를 감췄다. 일주일이 지나고, UN군은 다시금 북진을, 전보다는 더욱 조심스럽게 시작했다.(~p. 33) -9. 청천강-장진호 전투(p.34~35)에서 계속-----------------------------------------------------------------------------------책 소개Dark Moon : Eight Army Special Operation in the Korean War는 95년에 출판된,전쟁 전 미군이 운용했던 이북 출신 한국인으로 구성된 첩보부대 켈로부대와,이북에서 자생하던 여러 반공유격대를 미군 휘하로 편입하여 통합한 부대인, 미 8240부대가 한국전쟁 당시에 수행한 비정규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임.국내 서적 및 논문에도 참고문헌으로 사용되는 등 연구사적 가치가 있으나, 지금 기준으로는 오래되어 정확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고, 특히 한국인 대원의 인명 등이 부정확한 경향이 있음.위 번역글은 여타 책의 참고문헌에 있는 원문의 서술이 궁금한 경우에 참고하는 것을 의도로 작성되었으므로내용 상 오류가 있음을 양지하고 읽어야 하며,최신화되고 정확한 내용은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한국전쟁의 유격전사나,(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열람 가능)미 특수전사령부 역사실 홈페이지의 한국전 부분 기사가 이 책보다도 충실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되어있으므로 이 쪽을 찾아보는걸 권함.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https://www.imhc.mil.kr/user/indexSub.action?codyMenuSeq=70543&siteId=imhc&menuUIType=top미 특수전사령부 역사실 홈페이지 https://arsof-history.org/arsof_in_korea/index.html번역에 이상한 부분이 있거나 글 가독성이 좋지 않다면 마음껏 건의해주시면 감사하겠음.
작성자 : ㅇㅇ고정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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