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쓴 카스아리 2세물에 뇌절와서
카스아리 2세와 주변 캐릭들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어서 직접 써봤음
총수x총수는 총수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의 거리와 문 하나를 두고 차가운 공기를 머금고 있는 카페에서 미나미는 자기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여학생을 바라보고 있다. 주문한 아이스티 컵에 맺힌 이슬이 한 방울 두 방울 흘러내리고 있었다. 냉방을 강하게 틀어서 하복 차림으로는 조금 쌀쌀할 정도였지만 미나미 앞에 앉아 있는 여학생은 갈색 장발 사이로 한 두 방울의 이슬을 흘리고 있었다. 벌써 10분째 기다리던 미나미는 슬슬 지겨워졌는지 아이스티를 천천히 빨아 마셨다. 달콤한 복숭아향이 입안으로 퍼져 나갔다. 캔으로 파는 아이스티와 카페에서 파는 아이스티는 어째서 맛이 이렇게나 다른지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녀는 앞에 앉은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아스미, 나한테 상담할 일이라는 거 아직도 정리 안 됐어?"
이름을 불린 갈색 머리의 여학생이 화들짝 놀라면서 미나미를 올려다본다. 딴생각을 하는 중이었는지 꽤 과장된 반응이었다. 올려다보는 눈이 완전 강아지 같은데 평소에는 가시가 나 있는 게 꼭 고양이 같아서 종잡을 수 없는 애라고 항상 미나미는 생각했다. 그 갭에서 나오는 귀여움이 매력이지만.
"으…….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미나미가 살짝 짜증 난 척 아스미를 노려보자 아스미는 교복 치마를 움켜잡으며 미나미의 눈을 피했다. 뻔히 드러나는 이런 장난에 하나하나 전부 반응해주는 면이 재밌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장난감이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 앞에 앉아있는 아스미는 꽤 답답한 면이 있었다. 슬쩍 시계를 보니 벌써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해가 길어서 7시가 되어도 밝았지만 그래도 5시가 넘으면 하루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실감이 나서 이상하게 조급해지는 미나미였다. 귀중한 하루를 더는 허비하기가 싫었기에 미나미는 아이스티 컵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아스미, 딱 5분만 더 기다려 줄 건데 그래도 얘기 안 하면 난 이만 갈 거다?"
"아..."
미나미의 최후통첩에 아스미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급기야는 얼굴을 붉히기 시작했다.
물론 미나미는 정말로 아스미가 귀찮아서 짜증 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아스미가 상담할 내용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답답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상담 내용이 당사자 둘이서 단 한마디 말만 하면 해결될 그런 내용이었기에 지켜보는 갑갑함은 두 배가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부 말해버리고 싶었지만 이렇게 아이스티까지 쏴준 소중한 친구인 아스미였기에 본인 입에서 직접 이야기가 나올 때 까지 기다려 주는 예의를 차리기로 했다. 친할수록 더 예의를 차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생각을 하며 미나미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눕듯이 기대며 아스미의 말을 기다렸다.
"그…...게, 사실은… 내가…"
얼마동안 더듬거리던 아스미는 결심이 섰는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차가운 레몬티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맥주를 원샷한 아저씨처럼 아스미는 난폭하게 컵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미나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갑자기 들어온 올곧은 보랏빛 눈빛에 미나미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움츠러들었다.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저 보랏빛 눈동자는 어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위험한 매력이 있었다. 미나미는 조금 전까지 반쯤 장난치던 기분을 뒤로 미루고 수 초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스미에게서 나올 말에 집중했다. 설령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내가 이케다랑……. 으읏!"
비장한 각오로 입을 뗀 아스미의 문장은 용언을 내뱉지 못하고 감탄사로 종결되었다. 차가운 레몬티를 원샷한 탓인지 뒤통수에서부터 머리 깊숙한 곳과 이마로 격통이 퍼져나갔다. 아스미는 지그시 이마를 손으로 누르면서 탁자 위에 엎드려 고통을 감내했다. 갈색 머리 사이로 보이는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 김빠지는 모습을 똑바로 지켜본 미나미는 사람도 얼마 없는 조용한 카페에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에 느껴진 거부할 수 없던 긴장감이 식어버려 그 낙차로 더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스미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탁자에 엎드린 채로 고개만 들어 미나미를 바라봤다. 차가운 음료를 원샷한 자기 잘못이긴 하지만 사람이 아파하는데 그 앞에서 폭소를 터뜨리는 미나미가 얄미웠다. 조금이라도 섬세했으면 하는 희망사항을 접어두고 아스미는 이마의 격통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카페 주인에게 소란스럽게 하지 말아 달라고 주의를 받는 미나미를 쏘아보았다.
"아하핫... 머리는 괜찮아?"
미나미가 아스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이마와 앞머리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묘하게 다정해서 아스미는 속에서 올라오던 화가 가라앉아 버렸다. 눈치 없고 섬세하지 못하긴 해도 이런 다정한 면이 있었기에 아스미는 미나미와 1학년 때부터 같은 도서부에서 계속 인연을 이어왔던 것이다. 나름대로 자신에게는 중요한 비밀까지도 상담할 정도로. 부드럽고 간질간질한 미나미의 손가락을 천천히 느끼면서 아스미는 두통을 떨쳐내려 애썼다.
두통이 가라앉음과 동시에 마음이 정리된 기분이 들어서 아스미는 한결 편하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미나미도 꼬아둔 다리를 바로 하고 아스미의 말에 집중했다.
"음…… 사실은 말이지 우선 먼저 밝혀야 할 게 있는데……. 나랑 그… 2학년 이케다랑 작년부터 사귀고 있거든…"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나 싶었는데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냐면서 미나미는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지난가을부터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건 도서부 부원은 물론 아스미와 이케다를 아는 전교생이 모두 눈치채고 있던 사실이었다. 이미 거의 공인 커플이지만 두 사람은 애써 그 관계를 비밀로 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얼마나 두 사람만의 세계에 빠져 있으면 그렇게 티 내는 줄도 모르고 연애질하는 건지 제발 눈치 좀 채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을 미나미는 그녀답지 않게 꾹꾹 눌러 담고 처음 듣는 듯한 반응을 내느라 애썼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리면서 손을 턱 근처로 가져가는 과장된 동작으로 최대한 놀란 척 연기를 했다.
"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어?"
미나미의 큰 목소리에 지금 막 카페에 들어온 두 여대생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을 알아챈 아스미는 놀란 척하는 미나미보다 더 크게 기겁을 하면서 손바닥으로 미나미의 입을 막으며 '쉬잇!'소리를 냈다. 난데없이 호흡이 차단됐지만 어디까지나 예상한 범위 내인 아스미의 귀여운 반응에 미나미는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반쯤 뜬 채로 노려보는 아스미의 보라색 눈동자에 원망이 가득했고 그녀의 백옥같이 새하얀 볼은 불타오를 듯이 붉어졌다. 미나미가 눈웃음을 지으며 항복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아스미는 그제서야 손을 풀어주었다. 미나미를 째려본 채로 손가락을 입술에 대면서 목소리를 낮추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한 뒤 아스미는 한번 헛기침을 하고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사귀고는 있는데 사실… 요즘 이케다가 묘하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아서…... 사귀고는 있지만 사귀기 전이랑 크게 다를 건 없어서 같이 서점에서 데이트하거나 집에서 영화 보거나 게임을 하는 정도야."
아스미는 말하면서 부끄러운지 탁자 밑 교복 치마 위에 양손을 다소곳하게 올려둔 채로 계속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점차 이야기의 핵심으로 들어가기 시작하자 아스미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말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데 요즘 데이트도 갑자기 줄어들고...... 방과 후에도 따로 하교하는 일이 늘어났고. 혹시 고등학교 입시 앞두고 있다고 신경 써주는 건가 한번 물어봤는데 전혀 아니라고만 하고... 갑자기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좀 무서워. 이런걸 이케다한테 직접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고……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건지 계속 고민되고…… 잘 모르겠어. 어쩌면 좋을지."
어차피 다 아는 내용이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부 파악하고 해결법까지 알고 있었던 미나미였지만 그녀는 아스미의 작아지는 목소리를 모두 들어주었다. 미나미도 어떻게 유연하게 해결책을 제시할지 생각할 시간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며 말을 힘겹게 내뱉는 아스미의 목소리가 이쁘기도 했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과 꼰 채로 떨고 있는 하얀 다리까지 모두 귀여웠다. 미나미는 이렇게 항상 욕망에 솔직했다. 어쩌면 가장 세상을 즐겁게 살고 있지는 않을까.
"응, 응. 아스미. 그렇구나. 그러니까 저희는 너무나 바보 커플입니다 라는 걸 내게 자랑하고 싶은 거였구나~ 아아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들으니까 안 그래도 더운데 더 더워지는 거 같네."
미나미가 과장되게 손으로 이마를 감싸면서 고개를 떨궜다. 아스미는 사람이 힘들게 고민해서 말했더니 대체 뭔 장난을 치는 거냐면서 미나미를 나무랐지만 미나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스미를 놀려댔다. 역시 상담할 상대를 잘못 골랐다고 생각하고 한숨 쉬면서 빨대로 다 마셔버린 레몬티 컵의 얼음을 이리저리 굴리던 아스미가 슬슬 일어나려고 가방을 챙기고 있을 때 미나미가 갑자기 불쑥 고개를 들고 말했다.
"이 미나미 님이 해결책을 알려줄까?"
"왓! 깜짝이야!"
갑작스럽게 나타난 눈동자와 일부러 낸 듯한 으스스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아스미는 하마터면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것까지도 모두 계산에 넣은 미나미였다. 그녀가 머리가 좋아서 그런 거라기보다는 아스미가 너무 알기 쉬운 탓이었다.
아스미는 놀란 가슴을 천천히 쓸어내리고는 불신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일단 들어보기로 하고 가방을 다시 의자에 내려놓았다.
"......해결책이란건?"
"피해서 고민이라면 다가가면 되는 거지. 뭐 아스미가 평소랑 똑같이 지냈다면 이케다가 아스미를 미워해서 피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까? 아마 말하기 부끄러운 일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는데 이럴 때야말로 연상이 먼저 리드를 해주는 게 좋지 않을까? 아무리 이케다가 똑 부러지고 어른스러워도 아직 중학생이란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미나미도 나도 중학생이면서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쏘아붙이려는 것을 참고 아스미는 계속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미나미의 말은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까. 미나미는 능글능글한 미소를 지으면서 남은 아이스티를 전부 들이켰다.
"아~ 역시 다른 사람이 사주는 건 더 맛있구나~ 나머지는 아이스티 한잔 더 사주면 말해주지!"
"…...나 가도 돼?"
싸늘한 눈빛으로 미나미를 바라보면서 아스미는 다시 가방을 집으려 했다. 그러자 미나미가 필사적으로 손을 저으면서 외쳤다.
"아, 잠시만! 잠시만! 미안! 미안! 진짜 해결책 말해줄 테니까!"
아스미는 얄밉게 윙크를 하는 미나미를 쏘아보았다. 이번에도 헛소리를 하면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카나타에게상담을 할 요량이었다. 미나미도 여기서 계속 헛소리를 하면 아스미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릴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더 이상의 장난은 자제하기로 마음먹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미나미는 계속 싱글벙글 웃는 입꼬리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눈빛으로 아스미를 바라봤다.
"음… 그러니까 대충 주말 즈음에 집으로 초대하는거지. 까짓거 하룻밤같이 자면서 얘기도 나눠보면서 부딪혀 보는 거야. 늦은 시간이니까 자고 가라면서 퇴로도 없애버리고!"
"그...러니까 그 이케다가 나를 피하고 있는데 초대했다가 거절이라도 당하면?"
미나미는 당장이라도 '아~ 네 연하의 애인은 지금 그럴 기회만 노리고 있으니까 빨리 초대나 하라고!'라고 외치면서 이야기를 끝내버리고 싶었지만 겨우 일생일대의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아내었다. 이렇게 잘 참았으니까 이케다에게는 나중에 상을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미나미는 선체로 계속 무릎을 떨며 불안해하는 아스미에게 한 번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스미 넌 진짜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일단 질러 보라니까! 빨리 라인 켜서 '주말에 우리 집에서 밤새워서 놀래?' 같은 메시지라도 보내!"
갑자기 커진 목소리 때문에 아까 들어와 있던 여대생 두 명이 이쪽을 또 바라보는 것 같아서 아스미는 창피해졌다. 큰 소리로 윽박지르는 미나미가 거북했지만, 마음만은 진심이 느껴져서 아스미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대체 자신이 왜 혼나는 건지 이해를 못 했지만 미나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아스미 자신에게 한걸음 내딛어 주었던건 이케다였으니까, 또 이케다에게 잠시나마 상처를 입혔던 것도 자신이었으니까 이번에는 뭔가 고민을 안고 있는 이케다를 위해 자신이 한걸음 내디뎌 손을 뻗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나미의 간단한 해결책을 받아들이기로 한 아스미는 천천히 의자에 앉은 뒤 스마트폰을 꺼내 라인을 켰다. 대화창 모음 최상단의 '이케다 유이'를 터치하는 아스미의 하얀 손가락이 미묘하게 떨렸다.
라인을 킨 채로 10분이 지나도록 대화창에 유이라는 이름밖에 못 친 아스미 때문에 열불이 터진 미나미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무더운 카페 밖으로 뛰쳐나가 버린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
더운 여름의 도서실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최고의 피서지라는 사실을 의외로 학생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방과 후 굳이 무더운 밖으로 이리저리 나가는 학생들을 이케다 유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 덕분에 한가로운 도서실을 지키며 좋아하는 책을 볼 수 있으니 이케다는 여름이 싫지 않았다. 다만 오늘은 같이 당번을 서는 선배가 오오무로 선배라는 게 이케다는 조금 거북했다. 아스미 선배는 급한 볼일이 있다면서 가버렸고 미나미 선배는 항상 그랬듯이 어느샌가 사라진 상태였다. 1학년 후배들을 붙잡아두기도 미안해서 이케다와 오오무로 둘이서 오늘의 도서 위원 일을 맡았다.
도서실을 기본적으로 정숙해야 하는 공간이기에 침묵이 감도는 이 분위기가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오오무로 선배와 단둘이 위원 일을 한 것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그때마다 이케다는 그날 아침에 처음 집은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이상하게 오오무로 선배와 위원 일을 하는 날은 대출하러 오는 학생도 적어서 온전히 독서에 집중할 수 있었기에 그날이 바로 책 한 권을 독파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에어컨이 너무 강했던 탓인지, 깜빡하고 카디건을 챙기지 못해서 추웠던 탓인지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에어컨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검은 활자에 집중할 수 없어진 이케다는 선배 앞에서 부 활동 중에 휴대폰을 하는 것도 모양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에 그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평소에는 자세히 볼 기회가 많지 않았던 오오무로 선배의 옆 모습이었다.
오오무로 카나타는 말그대로 문학소녀의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단정한 흑 장발에 비비크림 하나 바르지 않은 수수한 얼굴. 그럼에도 햇빛 한번 본 적 없는 것처럼 새하얀 피부. 그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 위를 덧씌우는 까만 안경. 흑백의 대비가 강렬한 오오무로는 섵불리 다가가기 힘든 분위기였다. 실제로 말수도 적은 편이었고 목소리도 작아서 1년간 같이 부활동을 한 이케다도 오오무로의 목소리가 어땠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케다가 오오무로의 옆모습을 찬찬히 훑는 그 순간에도 오오무로는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난 집중력이라고 생각하던 그때 이케다는 책의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것을 눈치챘다.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열중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할 무렵 오오무로의 연분홍색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목소리를 냈다.
"이케다 양...... 혹시 저한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요?"
의외로 밝고 높은 목소리에 이케다는 흠칫 놀랐다. 천천히 고개를 돌림에 따라 살짝 흔들리는 오오무로의 흑장발이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는 이케다였지만 그래도 예쁜 것에 눈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아스미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케다 양?"
"아, 죄송해요. 오오무로 선배...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조금 책에 집중이 안 돼서......"
넋 놓고 바라보던 걸 들키기 전에 이케다는 서둘러 얼버무렸다. 오오무로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린뒤 검은 테 안경을 살짝 고쳐 쓰고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안경을 고쳐 쓸 때 슬쩍 보인 하얀 손가락과 가는 손목의 조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가냘팠다. 꽉 움켜쥐면 똑 부러져버릴 것 같았다.
"이케다 양, 아스미 양이랑 사이좋게 잘 사귀고 있어요?"
여전히 시선을 활자에 향한 채로 오오무로가 한마디를 던졌다. 이미지랑 다르게 장난기가 섞인 청량한 목소리가 이케다의 귀를 때렸다. 갑자기 나온 아스미의 이름에 오오무로의 하얀 손목에 정신이 팔려있던 이케다가 꽤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이케다가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이 들은 말을 반추하는 사이 오오무로가 다시 고개를 돌려 이케다를 바라보았다.
"후후. 이케다 양 알기 쉽네요. 너무 티 내는 거 아니에요?"
이케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당황스러웠다. 시시각각 빨개지는 얼굴과 목덜미의 색상을 숨기지도 못하고 이케다는 시선을 바닥으로 깔았다.
"어…. 언제부터 아셨어요?"
"음...... 작년 겨울?"
작년 겨울이면 아스미와 사귀기 시작한 지 1달 조금 넘었을 시점이었다. 거의 처음부터 들켰다는 사실에 대체 어디서 티가 난 건지, 혹시 다른 학생들도 알고 있는 건지, 오오무로 선배는 입이 무거워 보였지만 미나미 선배도 눈치채고 있는지 온갖 상상들이 이케다의 머릿속에서 용솟음쳤다.
"걱정 말아요. 미나미한테는 말 안 했어요. 뭐 이미 눈치채고 있을 것 같지만."
오오무로가 이케다의 생각을 읽은 듯이 말하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오오무로가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이케다였다. 그래서인지 그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또 정신을 놓고 말았다. 기대하던 반응이라는 듯이 오오무로는 입꼬리를 조금 더 올려 미소의 깊이를 더했다. 눈꼬리가 호를 그리며 살짝 휘어져 매혹적이었다. 수 초의 시간이 지나고 겨우 매혹의 늪에서 빠져나온 이케다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머뭇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그... 어떻게 아신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던진 질문에 대해 오오무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대답했다
"그야 저도 미나미 양이랑 사귀고 있는걸요.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들었어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던진 폭탄 발언에 이케다는 다시 한번 굳었다가 눈을 크게 뜨고 무심코 큰 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으려다 손으로 입을 막으며 참아냈다. 이곳은 정숙해야 하는 도서실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오오무로도 기다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올리며 정숙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미소를 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포즈마저도 어딘가 퇴폐적이어서 이케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러니까 꼭 바람 피우는 기분이라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케다는 방금 들은 폭탄 발언에 대해 천천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미나미와 오오무로. 겉으로 보기엔 완전 정반대인데 둘이서 사귀고 있다니. 이케다는 스스로 아스미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했기에 연애는 역시 비슷한 사람들끼리 끌린 결과라 생각했었다. 물론 정반대 성격의 사람들도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지만 그래도 이케다는 비슷한 사람끼리의 연애에 더 마음이 갔다. 그래서 눈앞의 커플에 대해 궁금증이 샘솟았다. 이케다는 여전히 즐거운 듯 가녀를 바라보고 있는 오오무로의 검은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질문을 던졌다.
"이런 질문 조금 무례할지도 모르지만... 혹시 미나미 선배의 어떤 면에 끌리신 건가요?"
직구로 물어온 이케다의 질문에 조금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오오무로였지만 곧바로 원래의 부드러운 눈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턱에 손가락을 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동작 하나하나가 우아하게 이어졌다. 오오무로가 대답을 생각하는 짧은 침묵 속에서 이케다는 오오무로의 옆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스미 선배도 책에 집중하고 있을 때는 비슷한 분위기였다는것이 떠오르자 이케다는 몸이 조금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이 없는 것을 확인하며 이케다는 아직도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오오무로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나미는 나랑 닮은 점이 꽤 많아요. 그래서 끌린 걸지도 모르겠네요."
침묵을 깨고 나온 대답이 뜻밖이었다. 활발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미나미와 문학소녀 그 자체인 오오무로는 그렇게 비슷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자신이 사람을 보는 눈이 부족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케다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이 아스미 선배를 잘못 보고 있다면? 아스미 선배가 싫어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면? 그런 고민에 생각이 미치자 조금 무서워졌다. 갑자기 에어컨 바람이 너무 차갑게 느껴져서 이케다는 몸을 조금 떨었다. 이케다는 조금 무서워져서 그냥 자신이 선배들에 관해 관심이 적어서 오오무로와 미나미 선배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라며 애써 달래기 시작했다. 아스미에게 폐를 끼친다는 두려움보다는 선배에게 무관심하게 대했다는 죄책감이 차라리 편했다.
고민하는 표정으로 옅게 어깨를 떨고 있는 이케다를 보며 오오무로는 차분한 동작으로 읽던 페이지에 책갈피를 끼우고 책을 덮었다.
"그러면 이케다양, 나도 똑같은 질문을 해도 될까요? 아스미양의 어떤 점에 끌린 건가요?"
죄책감으로 두려움을 덮으며 떨고 있던 이케다였지만, 그녀는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거의 즉답으로 대답했다.
"음...... 사실은 첫눈에 반했어요. 책 빌리러 처음 도서실에 왔다가 아스미 선배랑 우연히 눈이 마주쳤는데 그때 본 그 보라색 눈동자에 빠져버렸어요.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푹 빠져 버려서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이케다는 심장의 고동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추웠을 텐데, 갑자기 온몸에 뜨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죄책감으로 조금 덧씌워놓은 두려움마저 첫 만남에서 본 그 자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조금씩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오오무로는 그런 이케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도 쨍쨍한 햇살이 도서실의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눈이 부신지 눈가를 조금 찡그리면서도 밝게 불타고 있는 태양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멀리서 보이는 푸르른 산자락으로 옮겼다. 잠시 침묵이 깔린 도서실을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가 채우고 있었다.
"응, 아스미의 눈동자는 정말 예쁘지요."
오오무로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창밖에서 이케다에게로 옮겼다. 정면에서 이렇게 마주 보니 오오무로도 아스미 못지않은 매력적인 눈을 가지고 있어서 이케다는 조금 설레었다. 하지만 약간의 설렘 이상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깊고 경이로운 밤하늘을 보는 신비로운 느낌은 들었지만, 마음을 끌어당기는 종류의 눈빛은 아니었다. 이케다는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사랑하는 아스미 선배와는 다르다는 걸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예쁜 눈은 예쁜 눈이었기에 묘하게 얼굴을 간지러워 이케다는 몸을 비비 꼬았다.
안절부절못하는 이케다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 오오무로는 천천히 일어나서 들고 있던 책을 가방에 넣었다. 이케다는 의아해하면서 오오무로를 따라 일어섰다.
"아스미는 분명 뭐든지 받아줄 거예요. 엇나가는 일만 아니라면. 그러니까 이케다양, 너무 자신의 바람을 숨기지 마세요."
"아...네...?"
갑작스럽게 들은 충고에 이케다가 의아해하는 사이 오오무로는 보기보다 잽싼 동작으로 가방을 둘러매고 도서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럼, 내일 봐요. 이케다양."
"앗! 네... 오오무로 선배, 내일 또 봐요."
이케다는 얼떨결에 작별 인사를 하며 오오무로를 배웅했다. 오오무로는 그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복도 저편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정말로 빠른 걸음걸이였다. 역시 키가 커서 그런 건가 생각하면서 이케다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홀로 도서실에 남은 이케다는 그제야 시계를 보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했다.
"선배... 도망치신 거예요?......"
이케다는 오오무로 선배가 미나미 선배와 닮았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차가운 도서실과 대조적으로 아직도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바깥을 보며 이케다는 한숨을 쉬고 도서실 대출 창구에 앉아 책을 폈다. 하교 시간까지 남은 1시간 동안 읽히지도 않을 활자랑 씨름할 생각을 하며 우울해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교복 치마에서 서둘러 휴대폰을 꺼냈다. 스마트폰에 달린 별 모양 고리가 흔들거렸다.
'유이,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돼?'
사랑하는 선배에게서 온 라인을 보며 이케다는 오오무로 선배의 충고를 떠올리면서 미소 지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이케다는 스마트폰에 메시지를 타이핑 했다.
'아스미 선배, 오늘은 어때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캐릭터를 직접 만들어 내는건 정말 힘든 일이야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