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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못생긴 여자가 담배 피면 꼴 보기가 싫다(中-1)

ㅇㅇ(112.169) 2021.02.18 20:03:11
조회 1346 추천 20 댓글 1
														


=====


“자, 짠~”

“짜아안ㅡ”

사람을 좋아하진 않지만 사람 구경은 좋아하는 기묘한 경우가 있다. 거대한 테이블을 잔뜩 둘러싼 사람들과 사람들. 기막힌 비율로 섞인 알코올과 사카린의 위력이 볼 근육의 힘을 풀어놓으면, 그 위에 풍선처럼 떠있는 것은 붉은 미소. 눈 앞에 펼쳐진 빨간색 향연은 조금 추하기도 해서, 장미꽃밭이라 하기엔 장미에게 미안했고 성냥개비라 하기엔 조금 비인간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질없는 상상을 멈추고 손에 들린 잔을 비우기로 했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핥고 내려가면 이내 알 수 없는 화학작용이 만들어낸 열기가 스멀스멀. 정치외교학도의 볼품없는 두뇌로 그 화학작용의 원리를 떠올리려는 것은 뭔가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차가운 맹물만 겸손함으로 홀짝였다.

사람 구경을 좋아한다.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1학년 새내기다. 매일 밤마다 어딘가에 술자리가 있다. 이런 상황에 학교 주변에서 자취를 한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파도처럼 요동치는 인간 뭉터기에 끼어 여기저기 쏘다니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 뭉터기의 육중한 움직임엔 캠퍼스 라이프를 향한 로망, 대학교 술자리에 대한 환상, 그리고 지난했던 수험기간이 11개월만에 낳은 우량한 보상심리가 지저분하게 섞여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사람 구경을 좋아했으니까. ‘이런 내가 싫지 않은 느낌?’ 이라는 누군가의 유행어가 떠오른다. 처음 접했을 땐 왠지 씹덕같아서 싫었지만, 일단 핏줄 안의 알코올 농도와 혈당 수치가 기분 좋게 달아오르면 뭐가 됐든 재밌고 좋은 것이었다.

학교 주변에 자취방이 있다고 해서 육체와 정신이 아스팔트 바닥의 껌 찌꺼기마냥 눌러붙어 굴러다닐 정도로 마시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일단 어느 기점 부터는 술을 마셔도 마시는 걸 기억하지 못하게 되는데, 세상에 이것 만큼 돈 아까운 일도 없으니까. 먹고 마시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과 쌩돈을 땅에 버리는 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구슬픈 음악을 틀어놓고 양쪽 다리에 고무캡을 씌운 채 팔로만 걸어다니는 거렁뱅이의 주머니에 지폐를 구겨서 넣어주고 말지.

“프후”
“...”
“아”

핏줄을 타고 손가락까지 퍼진 취기가 도어락 버튼을 때리듯이 누르기 직전,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세월아 네월아 퍼마시지 않는 또 다른 이유. 그 이유가 어쩌면 돈보다 더 중요할지 모른단 생각에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잔뜩 성이 나있던 검지가 배고픈 진돗개의 꼬리처럼 살며시 고개를 떨군다. 취했다고 괜히 세게, 혹은 빨리 누르다 틀려서 소리 나면 깰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복어의 독을 발라내는 일식 조리사의 몸과 마음으로 조심 또 조심하며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나. 문이 열리는 소리 때문에 깰 수도 있다면서 나이 90먹은 노인의 속도로 느리게 또 느리게 문고리를 돌려 살금살금 집 안에 기어들어오는 나.

방에 불은 꺼져있다. 오늘은 다들 막차 챙긴답시고 일찍 마시기 시작해서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닌데, 하면서 넌지시 룸메이트의 침대를 신발장에서 바라본다.

“...어디갔대”

호텔처럼 정리되어 있는 베개와 이불. 어두운 새벽에 졸린 눈 비비며 보면 달빛에 따라 그 색을 달리하던 신비로운 하얀 얼굴이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같이 살던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 사람이 가장 있을 법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일이 몸에 배기 마련.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가벼워진 다리를 베란다 쪽으로 내딛는 것은,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의 귀가 후 루틴이 됐다. 커튼이 감추고 있는 오른쪽 창문. 그 너머에 있을까. 내려앉은 어둠이 아직은 그리 짙지 않은 어느 봄날 밤. 나는 그렇게 겨울을 찾는다.

“아-”
“왔어?”

같이 사는 누군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살며시 들어온 찰나, 사실은 잠들지 않은 그 누군가의 안개꽃같은 미소를 눈에 담는다는 건 굉장히 포근한 일이었다. 나를 부르는 파란 목소리. 절멸하던 노을이 피를 토한 흔적을 깨끗이 닦아주는 어스름의 색깔. 겨울의 음성은 누군가를 찌르지 않는다. 그 누구도 찌르지 않는다. 입술 언저리에서 그저 빙빙 돌며 움직이다가 창문 너머에 부딪히며 먹먹하게 사라진다. 연기처럼. 그녀의 손가락 주변에 꼬불거리는 저 담배연기처럼.

“뭐해요 불 다 꺼놓고?”

“음 그냥~”

베란다 딸린 자취방에 홀로 남은 고요함이 몰래 그녀의 마음 한 켠을 만지작대기라도 한 걸까. 난간 위 재떨이에 고꾸라져 영혼처럼 연기를 뱉는 꽁초를 뒤로하고, 조금 움츠린 겨울이 내게 온다.

“안 추웠어?”
“좀 쌀쌀하던데”

“언니는 잠옷을 입고 나가있으니까 춥죠”

“그런가”

“그래요”

“...”
“푸훗, 읏흐음-”

“...왜 그래요?”

“오래 마셨구나?”

“아, 네 뭐..”

“빨리 양치 안 하면 치아 상해”

여러모로 술 냄새가 나니까 어서 씻어주길 바란다는 말이다. 겨울의 음성이 그 누구도 찌르지 않는다는 건 이런 거다. 저 파란 목소리가 ‘술을 얼마나 쳐마셨으면 아구창에서 똥내 뒤지니까 드가서 가그린으로 목욕하고 나와’라고 말하는 광경을 조용히 상상해본다. 정말로 그런다면 분명 누군가는 심장마비나 쇼크로 죽을 거다. 그녀의 친절함에 나는 입을 가리고 손바닥을 찌르듯 말을 잇는다.

“아, 미안해요”
“술냄새 났죠”

“아니야 안 그래”
“먼저 잘게?”

“자요”

그러고 혀를 닦는 데만 2분 넘게 쓴 것만 같다. 그녀에게 잘 보여서 나쁠 것도 없고, 밉보여서 좋을 것은 더더욱 없다. 잘 보이고 어쩌고를 떠나서 같이 살기에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찌됐든 우리가 사는 원룸은 좁진 않지만 넓지도 않고, 그 공간 속에 나와 겨울의 냄새가, 날숨이, 그리고 각종 흔적들까지 얽히고설키는 걸 피할 수는 없으니까. 그녀가 조금 지저분하게 사는 사람이었다면, 나도 어느 정도는 일상적인 너저분함에 스스로 면죄부를 줄 수 있을 거다. 그래 지나치게 맑은 물엔 고기도 안 산다고 하질 않는가. 그러나

“…”
“...”
“...”

“어쩜 저렇게 조용히 잘까 사람이”

공기 입자들이 코와 입술을 거치며 흘리는 유약한 목소리까지 멎게 하는, 그저 영혼처럼 잠든 저 투명함을 가만히 보고있으면 머리맡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오늘 지은 나의 죄를 나지막히 고백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껴졌다. 오늘 술에 취한 인간들의 빨간 얼굴을 보며 정말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장미를 떠올렸습니다. 당신이 장미의 신은 아니겠지만 혹시 두 분께서 구면이시라면, 이 송구함을 대신 전해주세요.

그렇게 생각하면 맑은 물에 고기가 살지 않는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겨울도 나도 이 깨끗한 방 안에 인간으로 함께 살고 있으니까. 맑은 물 속의 고기로 함께 헤엄치고 있으니까. 아니지. 어쩌면 나만 고기고 그녀는 고기 아닌 다른 무언가가 아닐까. 예를 들면 밥 주는 사람이라던가. 그러고보니 처음 만난 날 방 정리가 끝나고서도 그녀가 저녁밥을 직접 해주었다. 뭘 해줬더라. 그러고 며칠이나 지났더라. 하나. 둘.. 셋… 넷…. 다ㅅ….. ㅇ…… …….

그렇게 며칠 전 일이었는지 숫자를 세다가 어처구니 없이 눈을 감는 나였다. 그래도 매일 밤 하염없이 양의 머릿수를 세고 또 세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여섯을 다 헤아리기도 전에 어제의 나와 이별할 수 있는 건 축복이나 다름없다.

“~♬”

그리고 누군가의 콧노래. 감긴 눈이 만들어낸 어둠 너머에서 파란 음성이 들려와 나를 깨웠다.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면 눈 앞에 보이는 것은.

“♪~”

“...”
“언니?”

“아”
“일어났어?”

“학교 가요?”
“오늘 토요일 아닌가..”

“토요일 맞아 오늘”
“학교는 안 가고”

“근데 뭐하러 아침밥을 해요”
“그냥 누워서 쉬지”

“해장국 끓여”
“우리 먹을 거”

“해장국…요?”
“언니도 먹는다고요?”
“언니 술 마셨어요?”

“푸흡...”
“아니”
“너 말야”
“유우리 먹일려고 끓인다구”

이럴 땐 내 이름이 ‘우리’인 게 참으로 성가시기 그지없다 생각한다. 그 점만 빼면 대체로 좋아하긴 하다만, 나이가 조금 찬 선배들이 얼굴을 잔뜩 붉히곤 좋다고 신난다고 ‘우리의 의리’같은 농을 게워내면 머릿속이 ‘개명’이란 두 글자로 발작하긴 한다.

“뭘 그렇게까지 해줘요”
“나 버릇 나빠지게”

“안 그럴 거 다 알아”
“상좀 펴줄래?”

이윽고 상 위에 올라온 ‘해장국’이란 녀석은 룸메이트 나부랭이가 받아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분하게 잘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검은색 뚝배기. 같이 생필품을 사러 다이소에 갔을 때 ‘저 언니는 저걸 왜 사나’ 싶었지만 가만히 있었는데 사실은 그게 복선이었던 셈이다. 뚝배기가 검은색이었음에 감사하자. 보라색이었으면 어제 술 먹고 집 오는 길에 차에 깔렸다.

맑은 국물엔 콩나물이니 북어채니 이것 저것 들어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모양새고 냄새고 너무 완벽해서, 내가 잠든 사이 24시간 해장국집에서 사다가 뚝배기에 담기만 한 것 아닌가 하는 배은망덕한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그도 그럴 게 내가 뭐라고. 한 지붕 아래 같이 살 뿐인 연하의 못생긴 핏덩이에 불과한데. 그런 주제에 24시간 해장국이라니 참으로 더러운 상상력이다.

“언니”
“진짜 나 먹으라고 끓여준 거에요?”

“해장국 싫어해?”

“아뇨 그럴리가요”

그래 더러운 상상을 한 죄를 용서받을 최선의 방법은 제대로 ‘해장’당해버리는 것이겠지. 국물 밑에 내려앉은 다진마늘 분자까지 죄다 핥을 기세로 숟가락을 들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고기고 그녀가 주인이다. 눈 앞에서 쪼글쪼글 끓는 게 내가 사는 맑은 물이다.

“어때?”

“...”
“해장국 맞아요?”

“맛 없어?”

“아뇨”
“술 땡겨요”

“푸흣”
“아 웃겨”

‘이거 먹으니까 술 땡긴다’는 말이 술 마시는 사람이 음식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 언젠가 엄마도 나를 낳게 된 시발점에 이 멘트가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겨울이 나의 무언가를 낳을 일은 없겠지만.

“언니는 안 먹어도 돼요?”

“응 나는 막 뜨거운 거 별로 안 좋아해서”
“아, 국에 머리카락 들어가겠다”

“읏”
“묶어야겠네”

“...”
“앉아...있을래?”
“내가 묶어줄게”

“네?”
“아… 네”
“고마워요”

굳이? 그렇게까지? 라는 생각을 떠올릴 참에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 선반에 있던 머리끈을 들고 내게 다가오는 그녀. 진한 인기척이 등줄기를 감싸 안는다. 내 뒤에 바짝 붙어 자리를 잡고 앉으면, 차가운 겨울의 이름으로는 떠올리기 힘든 따스한 향기가 투명한 물 속에 떨어진 한 방울 잉크처럼 잔잔하게 퍼진다. 우리를 감싼 분위기 또한 그렇게 향기의 형태를 띤다. 보이지 않지만,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향기 입자처럼 은은하며 뚜렷한 어떤 것. 섭씨 100도를 돌파한 해장국의 거품처럼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전부 긁어 파파고에 입력한다면 분명 ‘분위기’라는 답을 내어줄 것이다.

“해보고 싶었거든”

“다른 사람 머리 묶는 거요?”

“응”
“정확히는 동생 머리”
“난 동생이 없어서”

어깨선 살짝 아래까지 내려오는 나의 머리칼이 그녀의 뜻에 복종하며 하나의 지점에 헤쳐모인다. 목선을 쓸어넘기는 겨울의 손가락은 눈송이의 온도. 분명 차갑지만, 스산하다 말하기엔 유난스러운, 그래서 버틸만 하기에, 어찌됐든 기분 좋은, 딱 그 정도.

따뜻한 해장국을 앞에 두고 그녀의 차가운 손길을 등지고 있으면, 봄을 향해 내딛으며 겨울과 멀어지는 2월 중순의 날씨 속에 서있는 것만 같았다. 본능이 눈썹에게 ‘지금은 찌푸리는 게 맞다’고 하면 ‘그래 니 말이 맞아’라며 되받아도 이상할 것 없는 일교차. 늦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땐 면으로 된 티 위에 두께가 조금 있는 셔츠. 저녁 즈음 학교를 나설 땐 가방을 열어 고이 모셔온 가디건을 꺼내게 되는, 그런 온도.

“언니”

그러고보니 그녀는 언니였다. 이름 한겨울. 나이 23세. 나보다 3살이 많은 그녀는 원래 다른 학교에 있다가 올해 내가 붙은 학교에 편입해 온 이공계 학생. 전에 있던 학교에선 의대생이었다고 한다. 별로 물어볼 생각은 없었지만 그녀가 먼저 나에 대해 물었기에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알게 됐다. 지금은 무슨… 아 그래, 신소재공학과.

지금 생각해보면 실례인 것도 같지만 ‘그런 과도 있군요’라는 말이 척수반사처럼 나왔을 때 그녀가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던 게 기억난다. 더러운 인간 세상의 때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 미소. 신소재보다는 신인류에 가까운 존재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신소재공학에 한겨울만큼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나 싶다. 전에 없던 인간이 전에 없던 소재를 만드는 셈이니 여러모로 착 달라붙는다. 혹시 모르지. 졸업할 때 쯤 되면 전국 신소재공학과 홍보대사가 돼있을 수도.

“왜?”

“언니 입장에선 좀 어이 털리는 말일 수도 있는데”
“이렇게 안 잘해줘도 돼요”
“진짜로요”

“...”

“아 물론 해장국 진짜 고맙고”
“너무 맛있고 어…”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먹을 건데요”
“주말 아침이잖아요”

“부담스러워?”

“음..”

“...”

부담스럽다기보단”
“그냥 언니도 쉴 땐 쉬었으면 좋겠어요”
“전 진짜 들개같은 년이라”
“기한 좀 지난 삼각김밥 폐기도 그냥 육개장에 말아서 먹고 그러거든요”

“푸흡”

“...네 뭔 소린지 알죠”

“흣, ㅎ음- 응 알지”

“...육개장에 폐기 말아먹는 게 그렇게 웃겨요?”

“아ㅎ니햐 안.. 흡, 흐우”

이해할 수 없는 웃음 포인트. 별난 여자다. 여러모로.

“아무튼 주말엔 쉬어요”
“평일에 반찬 해주는 것도 고마워 죽겠는데”

내 수업은 오전, 겨울의 수업은 오후에 전부 몰려있다. 나 같은 경우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일과를 마쳐야 술을 일찍부터 마실 수 있다는, 부모 가슴 깊숙이 말뚝 박는 이유 때문이다. 그 말뚝이라는 게 하도 날카로워서 아마 반경 100km 안의 모든 흡혈귀를 밀키스 색깔로 녹여내릴 거다.

아무튼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를 간 사이 잠에서 깬 그녀가 나와 먹을 반찬을 만든다는 걸 알았을 땐 다소 혼란스러웠다. 여기가 자취방이지 신혼집은 아니지 않은가. 룸메이트가 평일엔 밥 해주고 주말엔 해장국을 끓여준다고 집에다 말하면 향수병이 악화돼서 정신분열증이 온 거라 생각할 거다.

“고맙다고 죽는 게 어딨니”
“반찬은 맛있었어?”

“그럼요”

“다행이다”
“그럼 계속 해줘도 괜찮지?”

라고 묻는 목소리의 질감은 유분이 하나도 없는 수분크림과도 같아서, 듣는 것 만으로도 고막이 촉촉해지는 것 같았다. 쌀쌀한 봄날 아침의 건조함을 잃은 귀. 그 옆을 스치는 그녀의 손은 눈송이를 실은 느린 바람. 귀 앞으로 조금 헝클어진 옆머리를 조심스럽게 잡아 귀 뒤로 넘겨준다. 찬 기운이 목덜미 주변에서 아지랑이를 틔우면, 나도 모르게 어깨를 살짝 떨게 된다.

“너무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러진 않아도 돼”
“좋아서 하는 거니까”

“...알았어요”
“그러면 굳이 말리진 않을 게요”

“...”
“우리는 있잖아...”
“그런 점이 좋아”

“네?”

“이 사람은 이렇구나”
“이렇게 하고 싶은가보다”
“하면서 그냥 받아들이고 넘기는 거”

“...”

“묶기 끝~”
“나도 빵 한 조각만 가져올게?”

내 뒤로 완연했던 향기가 점점 멀어져 머리맡 너머에 흩어진다. 화장실로 다가가는 뒷모습. 나긋한 움직임 속에서 나풀거리는 파자마 소매를 보고 있으면, 느닷없이 피었다 며칠 만에 져버리는 벛꽃처럼 성급한 질문을 던지고 싶어 진다. 겨울의 향기 위에 봄에 피는 꽃잎을 띄우는 것은 얼핏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지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쿠라니까. 그래 그녀는 나의 사쿠라니까.

“언니는요”

“응?”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잘 해줘요?”

“...”

“...”
“아니ㅁ”

“국 다 식겠다”

“아”

“다 먹고 설거지만 좀 해줄래?”
“나...는”
“아 샤워”
“샤워 좀 할게”

“아, ㄴ, 네 그럼요”
“청소도 할 테니까 천천히 씻어요”

그러자 싱긋, 가볍게 흘린 미소는 책갈피가 되어 몸 속 어딘가에 깊숙히 끼워졌다. 겨울은 얼굴부터가 웃는 상이고 내 앞에선 자주 웃었지만, 어쩐지 방금 슬쩍 보여줬던 은은한 입꼬리는 어딘가 특별해서 그 모습이 금방 지워지진 않을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면 책갈피는 아마 뇌 주름 사이 어딘가에 자리잡지 않았나 싶다. 이게 그 사이비 신도들이 목놓아 외치던 베리칩의 정체일까. 그들이 그들만의 신을 정말로 목도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겨울의 미소를 먼저 영접했다면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굳이 수치화 하자면 666배 정도 더 나은 삶.

‘쏴아아-’

벽 너머 샤워헤드가 뿜는 물이 룸메이트의 몸을 적시는 소리. 그 옆에서 나는 해장국으로 위장벽에 묻은 허여멀건한 자국들을 씻어냈다. 어젯밤 들이킨 알코올이 남기고 간 흔적들. 그러고보니 언니는 빵을 가져와서 먹는다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웬 샤워?

“...”
“맛있어”

겨울의 해장국은 끓였다기보단 거의 달였다 싶은 수준으로 맛이 깊었다. 진심으로 술이 땡겼지만 엄연히 해장국이지 술국은 아니었기에 그저 경건함과 감사함으로 잔에 물만 채워 마셨다. 한 모금에 감사합니다. 두 모금에 고맙습니다. 세 모금에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
“잘먹었다”

바로 설거지를 해도 되지만, 잠시 가만히 앉아 주말 아침 해장국이 자아낸 충족감을 만끽하기로 한다. 깨끗하게 빈 뚝배기를 앞에 두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의 축복을 등지고 있으면, ‘등 따시고 배 부르다’는 표현을 만들어낸 조상들의 지혜에 탄복 하게 된다. 그런 천재들의 후손으로 태어난 나의 정치외교학은 지금 어디에 와 있을까. 흠. 생각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쏴아아-’

빠르게 설거지를 끝내고 싱크대 물을 잠궜지만 수돗물의 힘찬 소리는 여전했다. 항상 시작점에서 결승선까지 거리가 꽤나 길었던 그녀의 샤워. 그도 그럴 게 일단 이름부터가 한겨울이기도 하고, 다른 신체부위는 만져본 적이 없으니 잘 모르지만 손 하나는 확실하게 차다. 그녀가 적정 체온을 유지하려면 더 뜨거운 물이, 더 오래 필요한 게 아닐까. 천상 문과의 비루한 추측이다. 머리 굴린답시고 하는 꼴이 참으로 볼품없어 혼자 코웃음쳤다.

‘쏴아아-’

‘위이잉-’

베란다 창문이 받아내는 은혜로운 채광에 무심한 시선을 던지며 한 손으론 무선 청소기를 왔다갔다.

‘위이잉-’

“...”

사람이 멍하니 있다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말해놓고 아차 싶은 것들이 징그러운 절지동물의 형태로 기억의 저편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는 순간들. 절지동물과 말실수 중 뭐가 더 싫냐고 물어보면, 아마 오랜 고민 끝에 말실수를 고를 거다. 벌레는 뒤지기라도 하지.

ㅡ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잘 해줘요?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면 너가 어쩔 건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해도 이상할 거 없는 질문과 타이밍이었다. 한 쌍의 벚꽃잎 사이를 뚫고 나온 목소리가 그녀의 손처럼 차가웠다면 어땠을까. 김이 피어오르는 뚝배기 앞에 멍청하게 앉아 있던 나는 무엇을 했어야 할까.

‘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면’은 뭐 그렇다 치자. ‘너가’, ‘어쩔’, ‘건데’라는 세 개의 탄환을, 이른 아침 해장국의 따스함에 녹아내린 몸과 마음이 버텨낼 수 있었을까. 스치기만 해도 치명타라는 어느 예능의 전설적인 자막이 떠올라 괜시리 소름이 돋는다.

‘그래도 웃어줬으니까’, 라고 자기위로를 하면 야속하기 그지없는 나의 기억력은 ‘중간에 말 끊어먹은 건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되묻는다. 머릿속에 소크라테스와 돼지를 함께 키우며 산다는 건 야속한 일이다. 해장국을 두둑히 먹었으니 배고픈 쪽은 없겠다만.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배부른 걸론 모자른지 재수없게 말이나 끊어먹는 소크라테스보단 배불러서 좋다고 흐뭇하게 웃는 돼지 쪽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미소로 건네준 책갈피를 이리저리 굴린다. 책갈피의 뒷면에 그려진 것은 아마도 3월의 붉은 사쿠라. 뒤집어보지 않았지만 어쩐지 어떻게든 알 수가 있었다. 삼광인지 홍단인지까진 모르겠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라는 불안감은, 행복한 돼지의 배부른 미소 저편에 엎어놓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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