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마지막 탈출 시퀀스를 또다른 세계의 시로코에게 쓰고 난 후.
무너지는 방주에서 모든 걸 내려놓고 추락하던 그 순간.
중력에 이끌리는 그 감각은, 두려움을 넘어 다정함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난, 왠지 모를 안도감과 함께 지면에 추락했다.
그래야 했는데.
"으... 으음... 여긴?"
나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단단한 지면이 아니라, 푹신한 의료용 침대였다.
그리고 그런 내 옆에 있던 것은...
"아무리 그래도 무모해요, 의장님! 이 자가 선도부 측의 스파이라면...!"
"그렇다고 해도 부상자다. 적이어도 치료할 의무가... 아, 일어났나?"
"마코토랑 이부키...? 그럼 여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그곳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게헨나의 응급의학부실. 내가 왜 이곳에 있지?
"잠깐, 그렇다면...! 마코토! 혹시 아코와 카요코는 게헨나로 돌아왔어? 다들 탈출 시퀀스를 써서...!"
"자, 잠시만요! 함부로 의장님 손을 잡으시면...!"
"괜찮다, 이부키. 아무래도 갑자기 일어나서 머리가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일단 진정해라."
"진정하라니! 아이들이...!"
"그것보다도 당신."
마코토의 목소리가 순간 냉랭해졌다. 왠지 모를 오싹함까지 느껴질 정도로.
난 그제서야 위화감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어떻게 우리 이름을 알고 있었지? 게헨나 일대에서 당신같은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어?"
나와 초면이라는듯 경계하는 마코토. 어딘가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이부키.
무엇보다 색채의 침공을 전혀 모른다는 분위기.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야? 만마전의 의장 하누마 마코토잖아? 평소에 게헨나랑 교류도 잦았고, 거짓된 성소 공략전도..."
"거짓된 성소?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는데. 일단 우린 당신 같은 어른을 오늘 처음 본다만."
"그리고 게헨나와 교류했다고요? 당신, 조금 타긴 했어도 그 코트는 총학생회 소속인 것 같은데... 거긴 이미 유명무실한 기관이 된지 오래잖아요."
"아니, 뭐?"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
이 세계는,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아니야, 이럴 수는... 아 맞다, 싯딤의 상자! 아로나라면 알고 있을지도...!"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옆에 놓여있던 내 태블릿을 켰을 때,
[어... 그러니까, 반갑... 습니다?]
"그...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
거기에는 프레나파테스의 비서였던, 까만 아로나가 있었다.
"일단 물이라도 한 잔 마셔라. 좀 나을거다."
"어, 고마워."
마코토한테 냉수를 한 잔 얻어마신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고맙게도 까만 아로나가 상황을 요약해서 설명해준 덕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가 수월했다.
"그니까, 내가 방주에서 추락하던 와중에 너랑 우리 쪽 아로나가 그걸 구하려고 했는데... 방주의 차원 이동 장치가 연산에 간섭을 했다?"
[네, 그 탓에 저희는 지금 당신이 있던 세계와는 다른 곳에 추락한 상황이구요. 당신의 아로나는 그 충격으로 현재 작동을 정지한 상태입니다.]
"어, 뭐 그래... 슬슬 납득이 되네."
여기가 아예 다른 차원이라면, 아이들의 성격이 묘하게 바뀐 것도 납득이 되었다.
"그나저나 샬레의 선생이라고 했나? 아까 선도부의 수석행정관을 찾는 것 같던데..."
"아, 맞아! 그러고보니까 선도부는? 그 아이들은 어디에..."
선도부. 그 이름이 나오자, 두 사람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저기... 나 혹시 말실수했어?"
"저기, 선생님. 일단 당신이 진짜 평행세계에서 건너왔다는 전제 하에, 당신 세계에서 선도부가 어떤 조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선도부는 현재 이 게헨나에서 무력으로 군림하는 자들이다. 우리 만마전은 저항 세력을 규합한 사령부로서의 조직이지."
"엥?"
아니, 이건 애들 성격이 바뀐 것보다 충격적인데.
"그 말은, 너희..."
"그래, 우린 반군 세력이다. 선도부와의 전투를 이어가던 중, 당신을 만난거지."
반군? 아이들끼리 전쟁이라도 벌이고 있다는 건가? 그 게헨나에서?
"그럴수가..."
"잡설이 길었군. 치나츠였나? 그 응급의학부 학생 말로는 이렇다 할 부상은 없다더군. 옷은 옆에 놔뒀으니 갈아입고 와라. 난민보호소로 안내해주지."
말을 마친 마코토가 자리를 뜨자, 이부키도 종종걸음으로 뒤쫓아갔다.
"겨우겨우 이해했나 했더니, 하나도 모르겠구만... 전쟁이라니."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해야할 일은 확실했다.
"어차피 이런 세계에 와버렸고 당장 돌아갈 방법도 없으니... 애들 싸움을 말리는 게 어른이겠지."
불에 탄 코트를 벗고 만마전을 연상시키는 적과 흑의 정장을 걸친 나는, 응급의학부실을 나섰다.
"그래, 만마전 놈들 쪽에서 고에너지 반응이 나타났다고?"
"네, 히나 부장님.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져서 정확한 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게헨나 선도부실. 그곳에서는 부장 소라사키 히나가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코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하누마 마코토와 탄가 이부키가 응급의학부실로 급히 이동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혹시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능성을 열어둬서 나쁠건 없지. 거긴 중립 지역이니 직접 대치할 수는 없겠지만... 미행이라도 붙여놔라."
"네, 분부대로."
아코는 히나의 명령대로 어딘가로 연락하여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아비도스 쪽은 어떻게 됐지? 아직도 협상 중인가?"
"그건... 면목 없습니다. 저희는 뇌제의 무기만을 찾으면 바로 돌아가겠다고 했지만, 아시다시피 '샌드맨'이 워낙 고집불통이라..."
"... 뭐, 됐어. 애초에 기대도 안 했으니까."
"그 얘기는..."
"곧 있을 전면전이 실패하면 바로 아비도스 쪽으로 갈거다. 아무리 그 여자라도 쪽수로 밀면 답이 없겠지."
커피잔을 비운 히나는, 비열함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게헨나의 질서를 뇌제 이전으로 돌려놓는 것... 그 비원은 멀지 않았다."
*****
오랜만에 써보는 장편입니다.
원래는 만우절에 맞춰서 써볼까 했는데, 장편은 각오가 필요한지라 며칠 미뤘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세계 주작은 뭐야 씨 발 년
아무튼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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