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의 섬나라에서 뜻밖의 한국어가 들려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쿠바 현지 곳곳에서 한국어를 구사하는 청년들이 속속 등장해 방문객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공항 인근 통신사 매장에서 유심 개통 문제로 한국인 지인과 통화하던 중이었다. 직원들 사이에서 스페인어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한국인인가 봐, 신기하다." 숙소 도착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에어컨 고장으로 프런트에 전화를 걸자, 영어로 응대하던 여직원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 "안녕하세요, 한국어 배우는 베아트리스예요." 유창한 한국어였다.
입국 수시간 만에 연달아 마주친 광경이었다. 미국의 경제봉쇄로 관광산업이 위축된 이 나라에서 한국 여행객은 극소수다. 영어나 러시아어, 급증하는 중국 관광객을 겨냥한 중국어가 훨씬 실용적일 터였다. 그런데 왜 이토록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어에 매달리고 있을까.
해답은 K컬처의 폭발적 확산에 있었다. 드라마와 음식, 무엇보다 K팝이 쿠바 청년층 사이로 급속히 침투했다. 중남미 전역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한국 문화는 가장 '힙'한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실권자 카스트로 가문 자녀들마저 스트레이 키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떠돈다. 미겔 디아스카넬 대통령의 부인 역시 한국 드라마 애청자로 알려졌다. BTS와 블랙핑크 같은 대형 그룹뿐 아니라 국내 중소기획사 소속 아이돌까지 이 먼 섬에서 팬층을 거느리고 있다.
28세 엘레나 디아스에게 한국은 언젠가 반드시 밟아보고 싶은 땅이다. BTS와 블랙핑크로 K팝에 입문했고,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가 동아시아 국가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지금 초등학생들 사이에선 스트레이 키즈가 절대적 인기를 누린다고 그녀는 전했다. 이역만리 쿠바에서도 '초통령'은 K팝 아이돌인 셈이다.
호텔 직원 베아트리스 가르시아의 이야기는 더욱 인상적이다. 처음엔 방탄소년단 팬이었다가 현재는 스트레이 키즈로 갈아탔다. "현진은 완벽한 아티스트예요." 스페인어가 모국어인 그녀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까지 구사하는 어학 천재다. 다섯 언어 중 가장 자신 있는 건 오히려 한국어라고 했다.
오후 7시부터 이튿날 오전 7시까지 이어지는 야간 근무가 그녀에게는 귀중한 학습 시간이다. "집에선 밤이면 전기가 끊겨 공부할 수 없어요. 야근 중 한가한 밤이 최고의 기회죠." 웃음 띤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꿈이요?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정말로요. 한 번도 국경 밖을 나가본 적 없지만, 기회가 온다면 꼭 가고 싶어요. 스트레이 키즈 공연도 직접 보고 싶고요."
이런 열망은 베아트리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5년째 한국어를 익히는 호세 마르티네스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며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문화를 체험하고 음식도 맛보고 싶다"고 밝혔다. 친구 다니엘 가르시아도 거들었다. "어렵지만 흥미로운 언어예요, 한국어는. 한국 문화도 너무 재밌고요. 꼭 한국 땅을 밟아보고 싶습니다."
쿠바 청년들의 한국 문화 사랑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냉전 시절 팝 음악에 빠져들며 미국을 그리워하던 소련 젊은이들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비틀스와 밥 딜런, 데이비드 보위, 블론디 같은 영미 팝이 소련 체제 붕괴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건 여러 연구로 입증된 사실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선율이 러시아 청춘들에게 스며들었듯, 지금은 K팝이 쿠바 젊은 세대에게 비슷한 열망을 불어넣고 있는 듯했다.
칠흑 같은 정전 속에서 이들은 BTS의 '피 땀 눈물'을 들으며 버텨내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도, 호세와 다니엘도 그렇게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가며 공부를 이어갔다. "저뿐 아니에요. 제 주변에서 한국어 배우는 친구들, 안 배우는 친구들까지 대부분 한국에 가고 싶어 해요." 베아트리스가 남긴 말이다.
한국을 향한 뜨거운 동경을 품은 쿠바 청춘들을 뒤로하고 14일 출국길에 올랐다. 공항 심사대에서 다시 한 번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심사관들이 '리퍼블릭 오브 코리아' 여권을 들여다보며 미소 짓고 속삭였다. 입국 때와 달리,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익숙해진 시선을 등 뒤에 느끼며 출국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