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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팬대] 그 해 초여름

ㅇㅇ(1.227) 2020.07.21 20:45:40
조회 595 추천 19 댓글 6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 초여름은 특별했다. 여느 때처럼 비가 온 다음날, 나는 죽순을 캐기 위해 한가로이 죽림을 거닐고 있었다. 삽 한 자루를 어깨에 걸치어 매고, 대나무 바구니를 반대편 손으로 집어 든 채 휘적휘적 걸어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산책이었다. 기실 내 속뜻은 유보에 있었으니, 달리 별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한참을 그리 걷자니 우후죽순 돋아나 있는, 말 그대로의 죽순들이 눈에 선히 들어왔다. 하지만 그보다 내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으니, 푸르뎅뎅한 죽순 모양의 돌덩어리 하나가 떡 하니 지면에 박혀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실은 익히 알던 죽순보다 납작하고 퉁퉁한 것이 죽순으로 오해할 만한 모양은 아니었지만, 그 형태는 그야말로 죽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곧게 말하자면, 한때는 귀족 가문의 자제였다고는 하나 억겁의 세월 동안 호사품을 가까이 한 적이 없는지라,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고 그 죽순 모양의 도자기를 주워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눈에도 그 물건은 과연 값져 보이는 것이었다. 대나무 가지를 닮은 주둥이와 손잡이 하며, 죽순 모양의 몸뚱아리에 새겨진 반양각의 선과, 음각선이 그려내는 잎맥들. 그리고 죽순의 꼭지를 그려낸 듯한 상단부. 은은한 광택이 번져오는 것이 실로 아름답다 평할 만 하였다. 뚜껑인 듯 싶은 부분을 열어보려 하였으나, 힘을 가할 때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아 속히 포기하기로 하였다. 그러하다. 나는 이미 이 오묘한 물건에 사로잡혀 짐짓 내 것 인양 중히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자니 스산한 바람이 나를 휘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여 누가 볼세라 나는 당초의 목적인 죽순은 진즉 포기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삽과 바구니를 한 손에 그러쥐고, 도자기를 마치 젖먹이를 안 듯 품에 들고는 씨근덕거리며 달려가는 내 모습은 꽤나 가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당시의 나는 그 물건에 심취해 있는 것이었다. 어느새 가택 앞에 도착한 나는 잡다한 물건들은 내던지고, 그 다기를 신줏단지 다루듯 내 방의 탁상 위에 모셔놓은 것이다. 손수건으로 긴 세월 쌓인 듯 보이는 흙먼지를 닦아내자 고색창연한 자태는 더욱더 빛이 나는 듯 하였다.

그 날 이후로 내 집념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식사도 마다하고 다기를 다루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았다. 평생 가보지도 않았던 도서관들을 차례차례 방문하여 도자기를 관리, 보존하는 법을 찾아보았다. 평소엔 대충 끓여먹던 차 또한 우려내는 방법, 다도의 순서, 다구의 사용법 등을 일일이 배워나가며 언젠가 그 다기에 끓일 차를 구상하였다. 한 번은 반인반수 친구가 찾아와 이런 말을 하였다.


자네, 신선놀음에 너무 빠지는 것이 아닌가? 나도 자네 다관의 훌륭함에는 동의하네만, 식음을 전폐해서야 주객전도가 아니겠는가?”


내가 그에 응답하기를,


이봐, 케이네. 나는 봉래인이야. 주와 객을 모두 잃어버린 지 오래인데, 까짓 신선놀음이 어떠하단 말이야?”


친구가 그에 반박하기를,


스스로 인간임을 주장한 것은 그대가 아니었는가? 무릇 인간이라면 인간다운 생활 태도를 유지하고, 남에게 본보기가 될 만한 경건한 삶의 견지를 가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내가 그것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부정하기를,


내가 진정 인간이라면 그리 해야지. 그리고 난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 이런 폭발적인 몰입과 욕망 어린 탐구야말로 인간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가 아니겠어? 케이네는 인간미나 삶의 목적이 절대적인 한 점으로 응축될 수 있다고 생각해?”


친구가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하기를,


말을 말게. 보나마나 정의론으로 날 끌여들이려는 속셈이겠지. 자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그러나 조심하게.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


나는 친구를 배웅하면서 생각했다. 무엇을 조심하란 말인가? 그러나 그 단상은 금세 잊혀졌다. 할 일은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번은 내 숙적이 찾아오기도 하였다. 생각하건대 그녀 또한 내가 없어지자 무료함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가 퉁명스럽게 이르길,


모코우, 대체 몇 날 며칠을 이 도자기에 빠져있는 거야? 나에 대한 살의나 복수심은 잊어버린 거야?”


내가 비꼬듯이 말하길


마치 놀아달라 떼쓰는 어린애가 따로 없군. 나는 내 삶의 새 목표를 찾아냈건만, 어찌하여 나를 괴롭히려 드느냔 말이야. 날 귀찮게 말고 저리 꺼져.”


그러자 숙적이 분노하여 내뱉길,


네게 있어 내 가치는 이 도자기에조차 이르지 못하는 것이었어?”


나 또한 일을 방해받은 것에 분개하여,


그래, 네 녀석은 이 도자기만큼의 가치도 없어. 더 이상 날 방해한다면 강제로 쫓아내겠어.”


숙적이 격분하길,


비켜! 이까짓 물건 부숴버릴 거야, 이 개자식!”


내가 당황하여 이르길,


시발, 잠깐만, 진정해, 미친놈아!”


그 뒤로 한바탕 격한 몸싸움이 오고 갔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참 후,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돌아간 내 숙적은 적잖이 만족한 듯 보였다. 하지만 나로써는 당분간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관련 방면에서 적잖은 지식을 쌓은 나는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물건이 청자라는 것도 알아냈고, 물 건너에서 건너온 귀중품이란 것도 깨달았다. 이 또한 피로가 쌓이지 않는 봉래인의 특성상, 남들의 두 배 가까이 되는 가용시간 때문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여하튼 자만심에 빠진 나는 여러 지인들을 불러 도자기를 감상하며, 그것으로 차를 따라 마시는 다도회를 열고자 하였다. 모름지기 자기과시욕에 빠지기 쉬운 것이 예로부터 사람이었고, 나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난점이 있었으니, 처음 습득했을 때부터 열리지 않았던 덮개가 문제였다. 무언가 결합부에 이물이 끼이기라도 한 것인지, 뚜껑은 덜거덕거리며 도통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힘을 주어 강제로 뽑아내자니 자칫하다 손상이 갈 것이 두려웠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소인의 힘을 빌리기로 하였다. 여기서 잠깐 얘기를 해보자면, 하쿠레이 신사의 곤충채집통 혹자는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만, 사실이다 에 더부살이하고 있는 난장이는 그 수중에 있는 요술망치로 무언가를 늘이거나 줄이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을 알고 있던 나는 그 소인에게 부탁을 하여 내 몸을 다관의 주둥이 쪽으로 넣어 결합부의 상태를 살펴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후의 다도회에 초대하겠다는 명목으로 요술망치의 힘을 청하자, 그 소인은 예상 외로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되려 내 소원이 소박한 것에 일견 경탄하는 눈치였다. 나는 괜스레 고양된 기분으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갔다. 잠시간의 준비를 마친 후, 나는 그녀의 요력에 의해 손톱보다 작은 크기로 작아질 수 있었다. 막상 작아져 보니, 그 압박감은 상당한 것이었다. 도자기는 마치 전설의 바벨탑이 이러하랴 싶을 정도로 거대하게 보였고, 내 뒤에서 작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 소인은 이부키도지가 작아보일 정도로 위용이 넘쳐보였다. 나는 스스로가 봉래인임을 망각할 정도로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며 다기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하지만 내 어설픈 시도는 금세 좌절되었는데, 길게 빠진 입구 중턱을 꽉 막고 있는 무언가 때문이었다. 나는 한참을 더듬어보다가 그것이 죽순임을 알아차렸다. 솔직히 말하건대,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충격이었다. 죽순 모양 도자기 안에 죽순이 자라고 있다니. 말장난이었다면 상당히 감흥이 없었을, 하지만 실제였기에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


우선 원래대로 몸을 되돌린 나는 소인을 바래다 준 뒤, 다시금 생각에 빠졌다. 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인가? 처음에 든 상념은 나 자신에 대한 조소였다.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살았길래 도자기 안에 죽순이 자라는 것도 모르고 살았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무게중심이 뒤뚱뒤뚱하는 것이 퍽이나 이상하다 싶긴 했었다. 그리고 3개월 전에는 무게도 더 적었을 테고, 집 안에 옮긴 뒤로는 건드린 적이 거의 없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는가, 하는 자기 변호도 들었다. 두번째로 든 생각은 대체 어떻게 저 안에서 죽순이 자랐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아니, 당연히 출입구는 한군데 밖에 없을 터이다. 다기의 주둥이로 물과 흙과 빛이 들어가 영양을 보급해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다만 그토록 좁은 구멍인 탓에 용케도 죽지는 않았지만, 생육 또한 부진한 탓에 3개월이 넘도록 죽순인 채로 살아온 것이겠지. 빠르면 10일 만에 죽순이 대나무로 변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한 고민은 저 죽순을 어떻게 할 것인가, 였다. 마음 같아서는 냉큼 뽑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좁은 주둥이와 틀어막힌 덮개 탓에 그 또한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유약의 다채롭고 영롱한 광택 너머로 반쯤 썩어있는 죽순이 자라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망상에 빠졌다. 심기가 참으로 불편했다. 그 때부터 내가 몰두한 일은 죽순을 깔끔하게 처리하는 일이 되었다. 불로 태워 씻어내는 방법을 생각해보았으나, 청자에 흠이 생길까 두려웠다. 아까처럼 몸을 작게 한 다음 일일이 잘게 부숴버리는 방법도 고려해보았으나, 그러기엔 마땅한 파쇄 도구도 없었고 시간도 너무 많이 걸렸다. 결국 이렇다 할 타개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시간만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동안 나는 끝없는 의심과 걱정의 늪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혹시나 죽순이 청자를 뚫고 자라나면 어쩌지. 도자기 내부와 죽순이 마찰하면서 상처가 생기면 어쩌지. 등등.


아이러니하게도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잠이 들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맙소사, 봉래인에게 잠이라니. 내가 얼마나 심적으로 저 몹쓸 죽순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 죽순을 지워버리지 않고서야 편하게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청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뚜껑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으드득하는 굉음이 귓가에 울려퍼졌다. 하지만 힘을 가했음에도 쉽사리 결합부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기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 나는 하체를 고정시키고 몸을 비틀며 뚜껑에 전력을 가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가 휙 돌아갔다. 나는 그대로 균형을 잃고 말았다. 휘청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나는 간절하게 결합부를 들여다 보았다. 금이 가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방법이 도박수라는 것을. 사실 처음부터 예정된 결과였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악물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손가락을 청자에 쑤셔넣었다. 그리고 죽순을 헤집듯이, 때로는 간지럽히 듯이 하며 간신히 꺼내었다. 뱀이 똬리를 튼 듯 구부러져 자라있는 죽순은 거무튀튀했고, 군데군데가 벗겨져 있었다. 분기가 솟구쳐 올랐다. 나는 냅다 창문 너머로 죽순을 집어던졌다. 날아가며 정체 모를 액을 흩뿌리며, 죽순은 풀밭에 나뒹굴었다. 이에 더욱 분개한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 죽순이 떨어진 풀밭에 달려들었다. 그리곤 미친 듯이 짓밟기 시작했다. 발이 아파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껍질이 갈라지고 속이 으깨어 질 때까지 나는 마구 짓밟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남는 것은 나 자신 뿐이었을 때, 나는 울었다.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풀밭에 그대로 드러누워 울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별빛이 보였다. 모든 것에게 미안했다. 나 자신을 괴롭도록 방치한 나 자신을 위해 울었다. 꿋꿋이 살아남았음에도 내 욕심 때문에 짓이겨진 죽순을 위해 울었다. 비할 데 없는 가치를 지녔음에도 내 충동 때문에 망가져 버린 청자를 위해 울었다. 하염없이 울었다.


기절할 듯이 울었음에도 혼절은 하지 못했다. 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내가 한 만행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근처의 풀밭을 모두 태우기로 결심했다. 도자기 또한 녹여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문득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서야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후회를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엇을 돌이킨단 말인가?


아니, 바꿀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지.


다음 날, 나는 영원정에 찾아갔다. 내 숙적은 잠시 자리를 비운 듯 했다. 나는 약사에게 감로수 하나를 사겠다고 했다. 그녀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당연히 있다는 듯 건네주는 감로수를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이제부터라도 다시 공주님의 상대를 해주세요. 오늘도 당신이 오지 않는다고 하루 종일 우울해 했어요.”


둘째는?”


대나무, 잘 키워보세요.”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영원정을 나섰다. 나는 듯한 가슴을 부여잡기 위해 두 발을 땅에 디뎌야만 했다. 더 이상 내 불완전한 인생을 완성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내 절망으로 얼룩진 과거를 묻기 위해 무언가에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다. 벗들과, 지인들과, 때론 추억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즐겁게, 유쾌하게,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청자는 케이네에게 선물로 주자. 분명 잘 다뤄주겠지.”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태양이 맑게 빛나는데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우비였다.


특별한 초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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