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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전쟁 -29-

김유식 2003.04.02 14:43:10
조회 5418 추천 1 댓글 0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전 11시 20분.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

  "시내로는 안 갑니꺼?"

  영문도 모르고 새벽부터 일찍 소집을 당해 오사카까지 오게된 박정상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의 칭얼거림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최명규도 조용했고 김재수나 유형남, 한양수 등은 얼굴만 굳힌 채 간사이 공항에서 시간만 보냈다. 오사카에는 요시이와 미키도 같이 왔었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로얄비치 관광호텔 나이트 클럽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법무부에 이중은을 비롯한 해운대파 핵심 조직원들에 대한 출국 금지를 요청하려 했지만 때는 늦어있었다. 해운대파의 대부분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최명규와 그의 동생들은 일본으로 이미 출국을 마친 상태였다.

  해운대 경찰서에서 벌어진 용의자 자살 사건은 관계자들에게 총기 사건만큼이나 큰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는 자살 사건이 아닌 피살 사건이었지만 경찰서 내에서 일어난 사건인 만큼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서로 쉬쉬했다. 몇 언론들은 "중요한 용의자 경찰서 안에서 자살"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뽑았고, 지방의 작은 신문사들은 경찰관이 용의자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도했다.  

  폭력 조직과 관계가 있는 경찰관이 중요한 용의자의 목에 칼을 댔다면 이는 선진국형 조직 폭력 범죄로, 단순하게 취급될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미국만 해도 연간 상상도 못할 만한 액수를 용의자나 증인 보호에 쓰고 있고 유럽의 국가들이나 일본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경찰이 최명규와 해운대파를 검거하기 위한 결정적인 제보를 받은 것은 오늘 오전이었다. 동양 관광호텔 나이트 클럽의 지배인인 조준현이 밤새도록 고민하다가 검찰에 보호를 요청함으로서 이승복이 없어진 대신 새로이 중요한 증인을 얻게 되었다.

  전날 저녁 조준현은 해운대 경찰서 안에서 이승복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화들짝 놀랐다. 일주일 전 동양 관광호텔에서 최명규와 다섯 명의 일본인 야쿠자들과 함께 만난 적이 있는 조준현은 이승복의 권총 난사사건에 대해 누구보다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더욱 불안했다.

  '이승복은 절대로 자살한 것이 아닐 것이다.'

  분명 그날 최명규의 지시로 다섯 정의 권총을 받아갔던 동생의 이름은 이승복이었다. 그의 죽음이 차갑기로 소문난 최명규의 사주로 인한 것이라면 자신의 목숨도 위험했다. 최명규가, 같은 조직의 동생도 죽이는 판에 교도소에서 겨우 한 번 만난 적밖에 없는 자신은 더더욱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른 곳에서 밤을 지새고 아침이 되자 경찰서로 달려가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경찰서도 결코 안전한 곳이 못된다는 생각에 이승복 사건의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검사에게 직접 연락했다. 검사는 조준현의 신병확보를 위해 검찰 수사관들을 급파했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전 11시 21분.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

  멀리서 미키가 몇 명의 야쿠자들을 데려오는 것을 보고 최명규가 입을 열었다.

  "오사카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영국으로 간다. 히라타 조직의 부탁으로 손봐야 할 놈들이 있어."

  박정상이 계속 투덜거렸다.

  "하고마! 우리도 할 일이 태산같은데 외국까지 가서 무슨 일을 한다꼬요?"

  "이건 형님께서 직접 내리신 오더다."

  최명규가 이중은에게 거역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동생들은 입은 다물었다. 이중은이 시켰다면 뭐든 해내는 최명규였다.

  여권 만기일이 지난 데다 수배 중이었던 유형남은 요시이가 만들어준 위조 일본 여권으로, 나머지 해운대파의 조직원들은 지난 1월 일본에 가면서 만든 여권으로 전일본공수의 912편 여객기를 통해 런던으로 향했다. 최명규와 유형남을 제외한 동생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로 영국에 가는지 잘 알지 못했다. 몇 달간 해야하는 잠수치고는 꽤 거창하다고 생각했다. 동행자로는 히라타 구미의 조직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이끄는 것은 미키였다. 조직원들은 미키를 조장으로 부르며 깍듯이 대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어색했다. 이들이 새로 히라타 구미에 편입하게 된 조직원들이라는 사실은 최명규도 알지 못했다.

  미키는 가급적 많은 조직원들을 데려가고 싶어했으나 7대목의 명령으로 세 명밖에 데려갈 수 없었다. 이것도 요시이의 생각이었다. 미키가 인솔하는 인원보다 최명규가 인솔하는 인원수가 많으면 미키보다는 최명규에게 공을 돌릴 수 있겠다는 속셈에서였다.

  "형님. 일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유형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동생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하게 물었다. 최명규에게 묻기는 했으나 그것은 그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꼬였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최명규는 오늘 아침 이중은과의 통화에서 자신을 비롯한 핵심 조직원들에게 모두 지명 수배가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시 부산으로 갈 수 있을까?'

  요시이는 그에게 영국에서의 비자는 6개월을 받게 될 것이며, 영국 입국 후에는 위조한 일본 여권을 주겠다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 처리가 제대로 안될 때는 위조 여권을 줄 수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이후 런던 시간) 센트럴 런던.

  아사히 UK. 특수영업팀에 대한 테러는 더 이상 없음에도 특수영업팀의 직원들은 본사의 지시로 인해 출근하지 않았다. 싸움에 굶주린 미키는 히드로 공항에서 벗어나자마자 적이 미적미적하게 굴 때 오히려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바로 일을 시작하자고 했다.

  도오야마를 통해 받은 자료에는 한국 명성맥주의 이사 중 한 사람이 런던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곧 병원에서 입원 중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가 아사히 UK.의 모리시타에게 맞아 입원했다는 사실은 아직 몰랐다. 단지 테러를 일으킨 명성맥주의 우두머리라면 입원 중이건 아니건 한시라도 빨리 히라타 구미의 맛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조직이든 두목을 쓰러뜨리고 나면 상대하기가 쉬웠다. 40년 가까이 폭력으로만 살아온 미키가 몸소 체험한 바로는 그랬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 런던 세인트 제임스 공원.

  김도현은 기분이 나빴다. 아무리 같은 클래스라지만 이렇게 매너 없는 친구들이 있다니....군에서 제대하고 처음 가지는 데이트였는데 군식구들이 셋이나 늘었다.

  소호에 있는 영어학교에 처음 등교한 날부터 김도현은 알 수 없는 야릇한 흥분에 휩싸였다. 중급 영어 클래스에 들어간 그는 같이 공부하는 열 명의 학생들 중에서 그림처럼 예쁘게 생긴 아가씨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왕메이린(王美林)이라는 이름의 스무 살 먹은 아가씨는 등 안에 날개를 숨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예쁘고 깜찍했다. 북경에서 왔다는 그녀의 미모는 김도현이 한국에 있었을 때 좋아하던 20대 초반의 여성 4인조 그룹 멤버들보다 낫다고 느낄 정도였다.

  수업 개시 첫날부터 김도현은 왕메이린에게 친근하게 대했다. 쉬는 시간마다 우유를 넣은 홍차를 사다 주었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가급적 옆에 앉으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같은 클래스에 있는 다른 두 명의 홍콩에서 온 짱꼴라들이었다. 한 명은 작달막하고 몸집이 비쩍 마른 자오이(趙一)라는 녀석이었고, 다른 한 명은 큰 키에 비대한 몸집을 가진 시랭(石冷)이라는 놈이었다. 언제나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두 사내 녀석도 역시 왕메이린의 근처에서 떠나질 않았다.

  왕메이린과 같은 중국인이라는 것을 빼면 아무 것도 호감 가는 것이 없던 두 사람에게 김도현은 체면을 차리느라 역시 홍차를 사다 줄 수밖에 없었고 억지로 웃는 얼굴을 해야했다. 홍콩은 오랫동안 영국의 치하에 있어서 영어가 공용어나 마찬가지였는데 홍콩에서 런던으로 영어 공부하러 왔다는 이들은 둘이서만 붙어 다녔고 사교성도 없었지만 왕메이린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다.  

  김도현에게 힘을 주는 것은 왕메이린의 미소였다. 김도현은 영어 공부를 위해 먼 영국에 오게된 것이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느꼈다. 왕메이린이 보고 있다는 생각에 수업 중에는 진지했으며 쉬는 시간에는 차 배달을 하느라 바빴다.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다고 왕메이린도 가끔씩 학교 휴게실에서 김도현에게 커피를 대접하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선수치고 돈을 내는 것은 자오이가 아니면 시랭이었다.

  오늘 오전 쉬는 시간에 김도현은 용기를 내어 같이 샌드위치를 사들고 세인트 제임스 공원에 놀러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왕메이린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듣고 있던 자오이가 대뜸 안 된다고 대답했고 김도현은, 자신은 왕메이린에게 물은 것이지 자오이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자 왕메이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을 멈춘 그녀가 좋다고 말하자 이번엔 시랭이 자기도 같이 가겠다며 끼어 들었다. 같이 갈 수 없겠냐고 묻는 것이 아니었다. 무조건 가겠다는 통고나 마찬가지였다. 김도현은 불쾌했지만 왕메이린 앞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공원에 오게된 사람은 한 명의 일본인 여학생을 포함해서 모두 다섯 명이나 되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떼놈이 번다더니...'

  왕메이린에게 데이트를 하자고 말한 사람은 자신인데 엉뚱한 중국 사내 녀석들 두 명이 더 동행하게 되자 입이 뾰족하게 나왔다. 공원에서 두어 시간 떠듬거리는 영어로 대화하던 김도현은 한가지 꾀를 생각해냈다.

  홍콩식의 요리가 나오는 중국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자고 한다면 혹시 두 명의 홍콩 녀석들이 떨어져 나갈지도 몰랐다. 가장 원하는 상황은 왕메이린과 둘이서만 저녁을 먹으러 가게 되는 경우였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예상과는 달리 왕메이린, 자오이, 시랭은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한 명 남은 일본인 여학생만 찬성했다.

  '오우! 마이 갓!'    

  이미 말을 꺼냈으니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김도현은 떫은감을 먹은 표정으로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 런던 세인트 토마스 병원.

  히드로 공항에서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고 런던 시내로 나온 것이 오후 다섯 시경이었다. 미키는 오랜 기간 프랑스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안내원은 필요 없었다. 숙소를 정하기도 전에 그가 이끄는 세 명의 미키 구미 조직원들과 일곱 명의 해운대파 조직원들은 김창환이 입원하고 있는 세인트 토마스 병원을 찾아갔다. 빅벤 뒤, 웨스트민스터 브릿지 건너편에 있는 이 병원의 안내원은 아무 의심 없이 김창환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미키는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며 세 명의 조직원들을 데리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최명규도 질세라 따라 들어갔는데 미키는 이를 모른 척 했다. 매사에 꼼꼼한 최명규는 동생들이 병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언제라도 부르면 올라 올 수 있도록 조치해 두었다.

  2000년 2월 15일. 화요일. 오후 5시 10분.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

  12시간도 넘게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김근태는 따분했다. 뒤늦게 이승영과 같이 가기는 하지만 런던에서의 상황이 미묘해지면서 특별히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 유정후가 설명한 대로라면 한국의 명성맥주 런던 사무소가 일본 맥주사의 시비로 싸우게 된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로버트가 사고를 내고 모리시타가 잠적해 버리자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김근태는 런던에서 머무는 동안 흑인 아가씨나 한 번 건드려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유정후는 김택환에 대한 체면치레로서 동생들을 영국에 보냈다가 데려오기로 하고 마지막으로 이승영과 김근태를 보냈다. 가서 몇 일 쉬다가 이광혁 등과 함께 돌아오라는 것이 유정후의 지시였다.  

  명성맥주 런던 사무소의 직원과 이광혁이, 이승영과 김근태를 맞으러 히드로 공항으로 갔다. 김창환이 누워있는 병실을 지키거나 펍 블루 라이언을 오가며 소일하던 김응진과 백준영은 병원에서 이광혁이 오기를 기다렸다. 김택환은 형인 김창환을 잘 지켜달라며 부탁하고 갔지만 김창환에게는 더 이상 아무런 위험은 없어 보였다. 오늘도 김응진은 백준영과 함께 병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 805호.

  병실 문을 열려던 미키는 병실에서 나오려는 백준영과 마주쳤다. 백준영의 체격과 용모를 보고 한 눈에 싸움꾼임을 간파한 미키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제 아무리 날고뛰는 고수라도 기습에는 약해지기 마련이다. 광주파 두목 배윤업을 쓰러트린 경력의 백준영이 미키의 주먹을 맞고 병실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어찌나 주먹이 매서웠는지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두 번째 주먹마저 맞고 말았다. 싸움은 실력도 중요하지만 경험도 중요했다. 스무살을 갓넘긴 백준영에게 이런 기습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다. 하지만 두 대의 주먹을 맞고 뒤로 쓰러지려는 백준영에게 다가가던 미키도 경솔했다.

  병실 안의 사정도 모르는 채 마구 주먹을 휘두르며 전진한다는 것은 평소 미키의 행동 방식이 아니었다. 다만 의욕이 너무 앞서다 보니 백준영에게 두 번째 주먹을 날린 이후 자신에 대한 방비가 너무 약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키가 주먹을 휘두르기 몇 초 전 자리에 앉아있던 백준영이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갔을 때, '화장실에 갔다오겠다.' 라고 말했다면 아마 미키의 급습은 성공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백준영은 아무 말도 없이 병실 문을 향했고 이를 김응진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김응진은 미키의 주먹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중이었다. 첫 번째 주먹이 터지고 두 번째마저 성공하자 역시 노련한 파이터인 김응진이 앉고 있던 의자를 박차고 올라 병실 문 밖의 얼굴을 모르는 상대에게 긴 다리를 뻗었다. 그가 계산하고 내민 발차기는 항상 적중했다. 짜릿한 가격 느낌과 함께 상대방이 문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문밖에 얼마나 많은 적이 있을지 모르는 김응진은 자세를 낮추어 구르듯이 뛰쳐나갔고 휘청거리는 미키 외에도 적이 세 명쯤이 더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복도를 지나다니고 있던 사람들도 있어서 정확히 몇 명인지 셀 수는 없었다. 또 그럴 틈도 없었다. 미키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의 특기인 돌려차기를 선보였다.

  - 퍽!

  미키의 수많은 싸움 경험은 젊은 한국인 파이터의 순발력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입안이 터지며 피가 뿜어져 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말로 비명을 지르며 또다시 휘청거렸다. 이때 다른 누군가가 김응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가 허리춤에서 번쩍이는 물체를 꺼냈을 때 김응진은 비웃으며 그것을 발로 쳐냈다. 벽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를 듣지 않아도 그것이 잭나이프라는 것을 알 수 있던 김응진이 미키의 앞을 가로막은 세 명의 사내에게 주먹과 발을 사정없이 휘둘러댔다.

  복도에서 팔짱을 낀 채 이 싸움을 보고 있던 최명규는 김응진을 보고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한국의 폭력 조직 계보는 훤히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가 조금도 본 적이 없는 사내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는 중이었다. 김응진의 실력과 나이 정도라면 조금 어려 보이기는 해도 이미 한국에서 이름이 알려졌어야 했다. 최명규는 그가 한국에서 자란 것이 아닌 교포 싸움꾼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가끔씩 LA나 오사카에서 활약한다는 국외의 싸움꾼들이 한국 땅을 밟기는 하지만 실력은 형편없었다. 총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개개인의 싸움 실력보다는 화력이 중요했기에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자랑한다고 해도 상대해보면 소문 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미키가 맞고 있었지만 최명규는 섣불리 도와줄 수 없었다. 야쿠자들은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기에 행여 잘못 도와주었다가는 미키가 최명규에게 화를 내며 덤벼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장이 불리한 상황에 빠지자 세 명의 미키 구미 조직원들이 김응진한테 달려들었으나 그는 조금도 밀리는 기색 없이 잘 싸웠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김응진이 이기기에도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멀리서 호각소리가 들리고 병원 직원들이 뛰어왔다. 병원 복도 바닥에 쓰러져 있던 미키가 소리 없이 일어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805호 안으로 들어서자 자신에게 맞아 쓰러진 백준영과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있는 김창환이 눈에 들어왔다.

  '저자가 우두머리다.'

  김응진에게 두 대 맞고 난 후에 판단력이 흐려진 미키는 구두 밑창에서 날이 짧은 칼을 꺼냈다. 그는 7대목에게 깨끗한 일 처리 능력을 보여야 했다. 불과 5일전에 깨진 병이 박혔던 김창환의 목에 다시 칼이 박히고 그는 비명 한 번 질러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미키는 날이 짧고, 폭이 넓지 않은 칼을 쓰면서도 정확히 김창환의 인후를 두 동강냈다.

  병실에 들어간 미키와 또 그가 벌인 일을 모두 보고 있던 최명규는 자리를 떠야했다. 혼자만 도망가면 소용없었다. 먼저 미키를 내보냈다. 그리고 자신은 김응진에게로 다가가 공격하는 시늉을 했다. 그 틈을 타서 세 명의 미키 구미 조직원들이 도망치는 조장을 따라 나섰다. 김응진이 쫓으려 했지만 최명규의 공격에 길이 막혔다.


  최명규는 김응진을 보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빛으로 병실 안을 가리켰다. 눈이 휘둥그레진 김응진이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가다 나오려던 백준영과 부딪힐 뻔했다. 어느덧 정신을 차린 백준영이 김창환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보고 의사를 부르기 위해 나오려던 참이었다.

  미키가 세 명의 수하들과 함께 김재수 등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뛰는 것을 보고 최명규는 반대편 복도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사람들이 웅성대면서 몰려들었고 병원 경비원들도 보였다. 그 틈새를 빠져 나와 병원 후문에 이르자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최명규는 그것이 자신을 잡기 위한 소리인지 아닌지 몰랐으나 일단은 튀고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웨스트민스터 브릿지를 건너, 사진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빅벤 쪽으로 온 최명규는 난감했다. 아직 숙소나 연락처를 정하기 전이라 이대로 동생들과 헤어진다면 어떻게 만나야 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부산의 대양 프로덕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방법이 있었지만 쉽게 만나게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또 들려왔다. 다시 병원으로 방향을 바꾸려던 최명규는 마음을 고쳐먹고 주위를 살피며 북동쪽으로 걸었다. 동생들을 찾으려면 다시 병원에 가보아야 하겠지만 오늘은 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느꼈다.

  백인과 흑인들이 와글거리는 거리에서 최명규는 두 명의 동양인을 만났다. 남, 녀 한 명씩이었는데 남자의 배낭에 태극 마크가 붙은 것을 보고 반갑게 다가갔다.

  "저 실례합니다. 한국분이시죠?"

  김도현은 눈매가 매섭게 생긴 사내가 자신을 보며 다가올 때까지 경계하는 마음을 품었다가 그가 한국말로 물어오자 안심했다.

  "아! 한국인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최명규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여권과 한국 지폐와 수표뿐이었고 그는 런던 지리는 물론이었거니와 영어도 할 줄 몰랐다. 이 학생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고생문은 훤하게 뚫린 것이었다.

  "무슨 일로?"

  김도현이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으나 최명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슨 일로? 뭐라고 대답하지?'

  부산에서 런던까지 피신해 왔다고 할 수는 없었고 그나마 양복을 입고 있으니 업무 차 방문했다고 둘러대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예. 회사에서 출장을 나왔는데 일행과 헤어졌어요. 이거 아무런 연락처도 모르고...."

  "그럼 회사로 전화해 보시면 되잖아요?"

  김도현의 대답에 최명규는 찔끔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부끄러워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국제 전화 거는 방법도 모릅니다."  

  "에구. 그럼 저 따라오세요."

김도현이 공중전화 부스를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최명규의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저...아직 환전도 못했는데 한국 돈도 바꿔줍니까?”

이 말을 들은 김도현이 한심하다는 듯 최명규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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