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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 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22)
아이들은 불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불을 피해 안전한 곳에 숨어 있으려고 한다. 그러나 화재가 나면 불보다 무서운 게 연기다. 환기가 되지 않는 밀폐된 공간에 있으면 연기에 질식하기 딱 좋았다. 연기를 피해 숨을 쉬려면 밖에 나와 있어야 하는데, 아이들의 보금자리는 하필 땅 밑에 위치했다.
“어떻게 들어가야 해?”
이 근처에 아이들이 없는걸 보니, 십중팔구 땅 밑의 집에 있는 게 분명했다. 화재 따윈 코웃음을 쳐도 될 만큼 잘 지어진 집이라면 집 안에 있는 편이 안전하겠지만, 후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면 네버랜드 내에 안전한 곳 따윈 없었다.
“땅을 파면 돼?”
“아냐. 선장님 말씀에... 이거로군. 잘 봐둬.”
누들러는 키가 작은 나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나무에는 아이들의 몸 치수에 맞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이들은 이 구멍을 출입구로 삼아 자유로이 드나든다.
그는 제 몸에 맞게 나무속을 깎아 내어 구멍을 늘린 다음, 몸을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다음에 숨을 참고 아래로-”
말과 함께 누들러가 사라졌다.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해적들은 나란히 줄서서 몸을 숙이고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곧 “빨리 비켜 멍청아!” 라든가, “손! 손이 꼈어!” 따위의 비명소리가 나왔다. 그들을 믿고 아이들 구출을 명령했던 엘사 J. 후크가 이 꼴을 봤더라면 거나하게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얼른 꺼져!”
“알았으니까 움직이지, 으, 으왁!”
맨 마지막으로 들어와, 인간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게 된 쿡슨이 구르듯이 아래로 추락했다. 그는 아픔을 호소하기도 전에 동료들의 욕을 왕창 집어먹었다. 억울하기 그지없었으나 뭐라고 볼멘소리라도 하면 2차 욕설이 더 날아올 게 뻔했으므로, 흙먼지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쿡슨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쳐들었다. 표정을 잔뜩 굳힌 아이, 크리스토프가 이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쿡슨과 크리스토프의 시선이 마주했다.
“어...”
크리스토프는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소리를 지르며 모두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해적들을 보니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이게 아닌데. 야, 꼬마! 잠깐! 기다려!”
쿡슨을 선두로, 해적들이 크리스토프의 뒤를 따라 굴이나 다름없는 복도를 기어갔다. 그러자 작은 침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커다란 방 하나가 나왔다. 그곳엔 피터 팬을 제외한 네버랜드의 아이들이 모여있었다.
제각기 담요를 뒤집어 쓴 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아이들은 해적들의 난입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각자 손에는 단검 따위의 무기를 쥐고 있었다.
이 아이들을 상대로 맨몸으로 맞서라고? 체코는 작게 혀를 찼다. 아무리 어리다지만 저들은 폭력과 살인에 익숙한 아이들이다. 새끼여도 맹수는 맹수. 찔리면 상처가 생기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누들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린 너흴 구하러 왔어.”
“거짓말! 해적 말은 안 믿어!”
컬리가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놀란 누들러가 뒤로 피했지만, 이와는 반대로 한발 앞으로 나서는 해적이 있었다. 칼이 단단한 손에 막혀 옴짝 달싹하지도 못했다. 스타키의 손에서 주륵주륵 피가 흘러내렸다.
스타키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난 널 공격하지 않는다. 널 정중... 소중하게 데려가려고 온 거야.”
“거짓말!”
“거짓말이면 날 죽여도 좋다. 난 죽어도 너흴 보호하라는 선장님 명령을 지킬 거다.”
대단한 충성심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반응을 보인 건 다른 쪽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떠들었다.
“선장님? 후크 선장?”
“후크 선장이 우릴 보호해준다고?”
“어째서? 어른들은, 해적들은 우릴 죽이려고 했잖아!”
그건 너희들이 먼저 공격해서잖아! 체코가 울컥해서 받아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누들러가 그의 입을 막았다. 누구 잘못인가를 탓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데, 시간은 이들을 기다려주지 않을 것이다.
이러다 사이좋게 죽으면, 죽어서도 엘사 J. 후크를 볼 면목이 없다.
“여긴 너무 위험하다. 우릴 따라와라. 보호해 주겠다.”
“거짓말!”
해적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데려가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그냥 기절시켜서 보쌈하듯 데려갈까 아니면 말로 한 번 설득을 해볼까 등의 의견이 말 대신 눈빛으로 전해졌다.
아이들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와중에 해적들이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아 챈 크리스토프가 아이들에게 말했다.
“해적들을 따라가자.”
너무도 뜻밖의 말에 놀란 컬리가 물었다.
“뭐? 너, 제정신이니?”
“타죽는 것보단 나아! 컬리, 칼을 내려놓자.”
“하, 하지만...”
컬리가 망설이자, 쌍둥이가 바로 반대 의견을 내었다.
“칼을 놓으면 안 돼! 저들은 어른이니까 우릴 죽일 거야.”
“그래. 좀 있으면 팅커 벨이랑 대장이 와서 이들을 혼내줄거라구!”
그러자 크리스토프는 울듯이 소리쳤다.
“대장은 오지 않을 거야! 대장도 팅커 벨도 없어졌는걸! 대장은... 피터 팬은 오지 않을 거야!”
크리스토프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이곳에 살면서 재미난 모험도 하고, 열매를 따고, 낚시를 하고, 사냥을 하고, 어른들과 싸우고, 죽이고, 다치고.
칼에 찔린 고통은, 그간 겪었던 힘든 일이 장난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팠다. 마음 내키는 대로 놀았지만, 마냥 행복하진 않았다. 이곳에는 ‘보호’라는 게 없었다. 이곳에는 아이라는 이유로 죽이려 드는 어른들이 있었다.
적어도 고아원에서는 자신이 아이라는 이유로 죽이려는 어른들은 없었다.
“난 여기에 오면 좋은 일만 있을 줄 알았어. 근데 이게 뭐야? 대장은 없고, 날 괴롭히는 어른들만 잔뜩 있잖아! 여긴 조금도 행복하지 않아. 차라리 고아원에 있는 게 나았다구!”
제 말을 잘 다듬지 못하고 봇물 터지듯 마구잡이로 쏟아내다, 끝내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아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크리스토프를 쳐다보았다. 그는 씨익씨익 거칠게 숨을 쉬다가, 결국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그의 울음이 몇 아이들에게 전염되어, 따라 울기 시작했다. 컬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크리스토프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엄마... 나, 엄마가 보고 싶어.”
슬라이틀리가 훌쩍거리며 엄마를 찾았다.
집. 엄마. 해적들은 눈을 내리깔았다. 이것들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것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엄마에게 데려다줄게. 이제 괜찮아. 괜찮아.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엄마에게. 집으로.
쿡슨은 슬라이틀리를 안아들었다. 스타키는 손에 들린 칼을 땅에 떨어뜨리고는 컬리의 손을 잡았다. 피가 흐르는 손이 징그러울 텐데도, 컬리는 그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누들러도 엉엉 우느라 정신이 없는 크리스토프를 안았다. 나머지 두 명도 쌍둥이와 다른 아이들을 챙겼다.
“집으로 가자.”
허공에 얼음 꽃이 몇 송이 피고 졌다. 꽃들은 하나같이 꽃가루를 뿌리며 흩어졌다. 싱그러운 단내를 풍기며,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에도 침입자를 유혹하려 들었다. 그 꼴이 우습다 못해 징그럽기까지 했다.
길목마다 요정들이 나타나는 걸 보면, 그들의 주요 타깃은 엘사 J. 후크인 모양이었다. 칙칙한 토끼 바위가 요정의 체액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니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인어 에리얼이 요정의 성소로 가는 길을 알려준 덕분에 헤매지는 않았지만, 요정이나 미친 인디언들이 나타나 엘사의 발을 묶고 있었다. 엘사는 주저하지 않고 힘을 행사했다. 거센 불길도, 미친 인디언들도, 요정들도 그녀를 막지 못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다.
요정들은 아름다운 방울소리를 내면서 바스러졌다. 어떤 생명체건 간에 단말마만큼은 흉측하기 마련인데도 요정들은 아름답게 소리를 질렀다. 엘사는 아련한 환상처럼 달콤하게 죽어가는 그들을 냉정히 지나쳤다.
“그 따위 수작에 넘어가지 않아.”
벌떼처럼 엘사를 노리던 요정들이 갑자기 빛을 내며 사라졌다. 엘사도 달리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앞에 거대한 고목이 서있었다.
인어의 호수에서 남쪽으로 숨이 찰 때까지 달려서, 한쪽 귀만 달린 토끼 바위가 나오면 귀가 없는 쪽으로 150보. 작은 돌들이 쌓여있는 곳을 밟고 올라가면 보이는, 큰 구멍이 나 있는 고목.
주변은 불길에 휩싸여있거나 이미 다 타버려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단 한 그루, 네버랜드에서 가장 거대한 고목은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듯이 위풍당당하게 자신을 괄시하고 있었다. 고목은 엘사를 보고 반갑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목의 손은 어서 오라는 듯이 자신의 몸에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저것도 환상일까. 가늠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저 안에 안나 P. 팬이 있다면.
“젠장.”
엘사는 욕지거리와 함께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놀란 엘사는 황급히 왼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어느새 자신은 물속에 들어와 있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저 위에서 보이는 빛 한줄기가 전부라서 대강 앞뒤는 구분할 수 있었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이 포근하게 엘사의 몸을 감쌌다.
헤엄을 치고 있지 않으니 응당 몸이 가라앉아야 하는데, 엘사의 몸은 제자리에 붕 떠있었다. 코가 따가웠다. 요정 가루 냄새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오감 중 제일 예민하고 약한 후각이 공격을 당하니 몸에 피로가 천천히 퍼졌다.
출입구는 보이지 않고, 그윽한 어둠이 깔린 물속에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망설일 시간 따윈 없다는 걸 잘 알기에 괜히 마음만 급해졌다.
‘숨이...’
엘사의 입에서 고통스런 기포가 생겨났다. 저도 모르게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물을 마셨을 뿐인데 이상하게 숨통이 트였다. 물 자체가 환상의 일부였다. 물은 달콤하고 따뜻했다.
환상은 그제야 엘사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천천히 산소를 풀어주었다. 그리고는 교활하게 엘사를 부추겼다.
<이리 와. 나와 함께 놀자>
환상은 형체 없는 손을 흔들었다. 마치 아이를 대하듯 상냥한 울림이었다. 엘사는 꺼지라고 욕을 퍼부어주고 싶었으나, 수중에서 말을 하는 재주를 가지진 못했다. 대신 이곳에 있으리라는 짐작으로 사납게 눈을 치켜떠, 환상을 째려보았다. 이내 울림이 뚝 끊어졌다.
엘사는 몸을 움직여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갔다. 시간도 공간도 느낄 수 없는 환상 속에서 얼마나 헤엄쳤을까, 다시 숨이 막혀왔다. 그래도 헤엄치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엘사의 머릿속에는 오직 안나의 안위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또 한 모금, 환상을 삼켰다.
기포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엘사는 헤엄을 멈추었다. 기포는 아래쪽에서 하나 둘 떠오르고 있었다. 큰 기포 하나, 작은 기포 여럿... 불규칙적으로 올라오는 기포는 끊임없이 한 방향에서 올라왔다. 저 아래에서 누군가가 숨을 쉬듯 기포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나보다 먼저 환상 속에 들어와, 그 누구보다 더 깊은 환상 속에 빠져버린 사람.’
엘사는 상체를 숙여 더 깊은 곳으로 잠수하듯 발을 놀렸다.
그런 엘사를 비웃듯, 환상이 다시 속삭였다.
<모든 걸 잊고, 나와 함께 놀자>
비눗방울처럼 두둥실 날아오르던 기포는 장전된 총알과도 같이 매섭게 엘사에게 쏟아졌다. 피할 수가 없다.
작은 기포 하나가 엘사의 팔에 닿았다.
‘윽!’
엘사의 입에서 기포들이 튀어나왔다. 진짜 총에 맞은 것처럼 아프고 쓰렸다. 피 대신 공기를 토해낸 엘사의 입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환상이 들어왔다. 엘사는 쉴 새 없이 물을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배는 차지 않았다. 마시면 마실수록 더, 조금만 더- 하고 몸이 요구했다.
‘안나’
안나를 구해야해.
엘사는 입을 다물고 환상 속을 헤엄쳤다. 깊은 어둠이 엘사를 껴안았지만 이를 뿌리치고 더 깊은 곳으로 잠수했다. 그러다 제 몸을 너끈히 집어 삼키고도 남을 만한 거대한 기포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봤다. 그래도 그녀는 헤엄을 멈추지 않았다.
‘넌 절대 날 죽일 수 없어. 내 목숨은 안나 거니까’
거대한 기포가 엘사의 몸을 삼켰다. 그 기포는 누군가의 기억을 담고 있었다.
*
<이 멍청아! 이건 새 따위가 아니야! 극악무도한 해적이라고!>
“뭐?”
놀라서 새를 쳐다본다. 새는 딱딱한 강철부리 사이로 피식-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난 새라고 한 적 없어. 네가 겉모습만 보고 믿은 거야. 넌, 너무도 어리석고 멍청해.”
<봐! 널 속였다고! 그러니 저 해적을 죽여! 저 해적은- 너무도 많은 어린애들을 죽였어!>
날 속였어.
단검을 빼든다. 거짓말만 늘어놓고 아이들을 죽이는 해적, 어른 따윈 죽어 마땅하다. 날 속였다.
“....왜?”
요정 팅커 벨도 듣지 못할 만큼 작고 나약하게 말했다. 왜 날 속인거야? 왜 거짓말을 한 거야?
아니, 어른들이야 거짓말을 하니까 새삼 놀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거지?
나, 기대했던 거야? 이제 와서?
저 해적의 말대로, 내가 너무 어리석고 멍청해서 그런 건가?
*
기포가 터졌다. 그와 동시에 엘사의 의식도 깨어났다.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팠다. 누군가의 기억은 일그러지고 희미하고 흐릿하고 불투명했다.
밑에서 수 백 개의 기포가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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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곧 아침이네 젠장ㅋㅋㅋㅋㅋㅋㅋ
psps. 누군가의 기억은... 뭐 안나밖에 없지. 이 부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이 표시로 구분하려고. 글이 이상하게 보여도... 으... 이게 내 한계임;
pspsps. 너무 오랜만에 써서 뭐가 뭔지;;; 현퀘 중에 틈틈이 쓴 걸 잇고 지우고 하니까 더 자신이 없어져 ㅠㅠ 그래도 완결 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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