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아름다운 친구

운영자 2021.05.31 10:32:28
조회 180 추천 2 댓글 0

아름다운 친구




대학동기 한 명이 내게 전화를 해서 저녁을 사고 싶다고 했다. 대학 시절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적이 없다. 업무와 관련해서 한 두 번 정도 만난 적은 있었다. 내가 나온 대학은 용광로 같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것 만으로 강한 끈끈함과 안아주는 듯한 포근함이 감도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 친구가 알려준 양재 시민의 숲 근처에 있는 양고기를 파는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됐다. 기름을 두른 검은 불판 위에서 양고기가 노릇노릇 구워지는 걸 보면서 대학 동기인 친구와 술잔을 부딪쳤다. 이상하게도 그 친구한테서 예사롭지 않은 어떤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살아온 자취를 알고 싶어 물었다.

“대학 때 어떻게 지냈어?”

“내가 대학을 다닌 건 모두 합쳐서 백일도 되지 않을 거야. 대학 일학년 때부터 난 청계천에서 야학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느껴졌다. 그 시절 청계천은 처절한 빈민굴이었다. 인간들이 사는 터전이 아니라 지금의 짐승들이 사는 축사보다 못한 환경이었다. 개천에는 똥물이 검게 흐르고 천변에는 판자 집들이 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 같이 붙어있었다.

“어떻게 야학을 하게 됐어?”

나는 그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를 고쳐앉고 내면의 귀를 쫑긋 세웠다.

“당시 김진홍목사가 청계천 빈민굴로 들어가 활빈교회라고 천막 교회를 세우고 활동했는데 나는 그 교회 마당 한 구석에 천막을 치고 빈민촌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지. 내가 가르친 건 수학이고 다른 사람들과 과목을 나누었지. 그때 같이 야학을 하던 선배가 빈민운동을 하던 제정구씨야.”

그가 갑자기 존경스러워졌다. 그가 밥과 술을 살 게 아니라 미안해서 내가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시 법대생들의 야망은 고시를 빨리 통과해서 세상적인 출세를 빨리 하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들의 세상적인 꿈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마도 같은 학년이었던 홍준표인지도 모르겠다. 창녕의 가난한 집 아들인 홍준표는 독서실의 포개서 붙인 나무의자에서 자며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같은 도서관의 앞자리에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그의 모습을 종종 보았었다. 그는 고시에 합격하고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된 사건을 휘몰아 치는 검사가 됐다. 정계로 들어가 국회의원이 되고 당 대표가 되고 도지사가 되고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런 야망이 법대생인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시기에 청계천의 빈민굴로 그가 들어갔다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가 다르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청계천에서의 생활은 어땠어?”

내가 그 친구에게 물었다.

“내 환경은 그런대로 사는 집안 아들이었어. 그 시절 청계천 빈민굴로 가보니까 기가 막히더라. 개천에 막대기를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몇 장의 판자를 엮어 만든 방에서 지냈지. 그건 그래도 괜찮았어.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동네에 하나 있는 공동변소에 가면 수십명이 줄을 서 있는 거야. 재미있었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을 계속했다.

“나는 빈민운동을 한다던가 아니면 정치로 나가려는 어떤 생각이 있거나 특별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야.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청계천에 가게 됐었는데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 일을 했던 거야. 청계천 사람들이 김진홍 목사와 남양만으로 이주할 무렵 나는 그냥 대기업에 들어가서 회사원이 됐어. 회사원이 돼서도 임원이 되겠다는 야망이 없었어. 그냥 평범한 사원으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지내면 된다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 전무도 되고 사장도 되고 퇴직을 하고 십 년이 넘은 지금도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청년들을 돕는 사회운동 비슷한 걸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일들을 말하고 있었다.

“야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이렇게 훌륭한 친구가 대학동기였는지 몰랐네.”

내가 감탄하면서 말했다. 그가 다시 보였다.

“얼마 전에 ‘미나리’라는 영화로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씨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어. 왜 모두가 최고가 되려고 하느냐면서 자기는 최고의 중간이 되겠다고 하는 부분이야. 괜찮은 말 같더라구.”

선행도 희생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는 그의 인품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어서 만난 아름다운 친구였다.






추천 비추천

2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끝까지 다 본 걸 후회하게 만든 용두사미 드라마는? 운영자 25/07/07 - -
3769 각자 자기의 정가표를 달고 산다 [2] 운영자 25.07.07 54 2
3768 손자에게 가르치지 않고 보여주었다 운영자 25.07.07 18 1
3767 숙제하기 위해 세상에 왔나 운영자 25.07.07 20 0
3766 그에게서 반려목을 얻었다 운영자 25.07.07 15 0
3765 혼자 나서 혼자 살다 혼자 죽는다 운영자 25.07.07 28 1
3764 딸이 좋은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다 운영자 25.07.07 31 0
3763 이재명 대통령은 미국과 거래를 잘해야 운영자 25.07.07 45 0
3762 노년을 멋지게 놀고 싶다 운영자 25.06.30 56 2
3761 쓰는 인간 운영자 25.06.30 48 1
3760 책상머리에서 운영자 25.06.30 30 0
3759 그 나라가 우체통 속에 있었다 운영자 25.06.30 37 0
3758 선착순에서 나는 거북이였다 운영자 25.06.30 48 0
3757 아름다운 인생들 운영자 25.06.30 40 0
3756 그 분의 시나리오 운영자 25.06.30 39 1
3755 무엇을 만나기 위한 떠남일까 운영자 25.06.23 63 0
3754 나도 행복하고 그들도 행복하다 운영자 25.06.23 65 0
3753 고독력도 단련해야 강해지지 않을까 운영자 25.06.23 38 3
3752 나약한 먹물들 운영자 25.06.23 36 2
3751 빵을 사 먹은 죄 운영자 25.06.23 45 1
3750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운영자 25.06.23 54 0
3749 재벌에게 사원은 가족일까 머슴일까 운영자 25.06.23 53 0
3748 ‘내 안의 나’ 운영자 25.06.16 51 2
3747 정보기관 책임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 운영자 25.06.16 100 0
3746 미국으로 도망가지 않아도 됩니다 운영자 25.06.16 57 2
3745 무엇이 그를 좋은 판사로 만들었을까 운영자 25.06.16 51 1
3744 그의 아버지는 문둥이였다 운영자 25.06.16 45 0
3743 할머니 모습의 천사가 백불을 줬다 운영자 25.06.16 43 0
3742 도둑들이 잃어버리는 보물 운영자 25.06.16 41 1
3741 세상에 대고 바른말 좀 해주세요 [1] 운영자 25.06.09 109 0
3740 가난이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 운영자 25.06.09 66 1
3739 믿음이 약한자여 운영자 25.06.09 51 1
3738 빈민가 출신 두 남자 운영자 25.06.09 65 1
3737 그와 비교하면 가난해도 부자가 된다 운영자 25.06.09 55 1
3736 행복한 9급 교도관 운영자 25.06.09 72 1
3735 왜 욕을 하십니까 운영자 25.06.09 44 2
3734 그는 거지였다 운영자 25.06.02 78 1
3733 대학 졸업장 운영자 25.06.02 75 0
3732 경기장에서 나와 벤치에 앉았다 운영자 25.06.02 57 0
3731 초등학교 5학년 손자에게 남기는 글 운영자 25.06.02 62 2
3730 나쁜 법도 지켜야 하나 운영자 25.06.02 48 0
3729 영혼과 영혼의 만남 운영자 25.06.02 54 1
3728 나는 미운 오리새끼인가 보다 운영자 25.06.02 67 2
3727 쓴소리를 달게 듣는 대통령 운영자 25.05.26 75 1
3726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 운영자 25.05.26 57 1
3725 아들의 예리한 분석 운영자 25.05.26 82 1
3724 작은 일, 작은 성취 운영자 25.05.26 55 1
3723 그들은 모두 가난했다 운영자 25.05.26 57 1
3722 멋진 신세계의 두 주역을 위하여 운영자 25.05.26 61 1
3721 하나님은 어떤 그릇을 대통령으로 쓸까 운영자 25.05.26 55 2
3720 유령의 간절한 부탁 운영자 25.05.19 92 1
뉴스 '슈퍼맨이 돌아왔다’ 장동민 딸 지우, 언어지능 최상위 1%! ‘1등급 영재’ 인증! 디시트렌드 14:00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