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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치과의사

운영자 2011.06.30 12:32:27
조회 477 추천 0 댓글 1

  한강 유람선이 번들거리는 밤의 강물을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강변도로의  나트륨등이 수면위에 기둥이 되어 물결과 함께 흐느적거렸다. 배의 꽁무니에서 짜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얀 물보라가 뿜어져 나왔다. 유람선 한구석에서 고교동창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치과의사를 하는 H가 모처럼 양복을 단정히 입고 앞에 나와 대학생 아들과 꾸벅 고개를 숙여 전체에게 인사했다. 나도 결혼연령에 찬 딸을 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들은 한 세대 저쪽으로 서서히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하는 오십대였다. 나는 그의 아들의 맑은 얼굴 속에서 그의 아버지의 소년기를 보았다. 그와 나는 변두리 국민 학교에서 일 이등을 다투었다.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일류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가출을 했었다. 짜여진 틀 속에서의 삶이 싫었다고 했다. 부산으로 내려가 중국음식점 철가방을 들고 짜장면 배달을 했다. 밤12시가 넘어서야 청소하고 간신히 쓰러져 잠을 잘 수 있었다. 죽음 같은 잠이었다. 그런 꿀잠도 잠시고 새벽 4시가 되면 중국인주인은 그를 깨워 자갈치시장으로 데려갔다. 싱싱한 해물을 먼저 구해야 맛좋은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졸면서 시장바구니를 끼고 주인의 뒤를 따라야 했다. 그는 다음에는 캬바레 앞 삐끼가 되어 “어서 옵쇼”를 하다가 진짜 어서 온 엄마에게 귀를 붙잡혀 학교로 돌아왔다. 덕분에 그는 내 일년 후배가 됐다. 그는 음식배달보다 웨이터보다 공부가 훨씬 쉽고 감사한 일인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이십 년 전 내가 변호사가 되어 파리 날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그를 따라 옥수동 산꼭대기에 세 들어 있는 그의 치과의원을 갔었다. 


  “오늘 환자 딱 한명 봤어. 수입은 총 이 천원”

  그가 수입을 적는 대학노트를 내게 펼쳐서 보여주었다. 맨 윗칸에 달랑 ‘20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수입도 괜찮아요. 예전 아버지세대 의사들은 봉지쌀 사먹으면서 견뎠어. 그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죽기 전에는 절대 치과에 안갔어.”

  그는 자기보다 못한 시절의 치과의사들을 생각하면서 견디고 있었다. 견디던 그가 기어코 지방으로 내려간 후 오랜 세월 소식이 끊겼었다. 먼 풍문에 그는 엉뚱하게 컴퓨터프로그램개발로 크게 성공했다가 다시 망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얼마 전 밤늦게 그가 내 사무실 근처에 의원을 다시 차렸다면서 고 오라고 했다. 때나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런 자유인이었다. 나는 그의 의원을 찾아갔다. 불을 다 끈 의원의 깜깜한 안내데스크에 그는 홀로 앉아 있었다. 내가 스위치를 켜자 늙은 영감의 쭈그러진 얼굴이 나타났다. 동년배인 나의 자화상이기도 했다. 손질하지 않은 부수수한 머리, 꺼칠한 피부, 주름진 낡은 바지가 그의 평소 모습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보쌈김치 집으로 갔다. 그가 과거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얼마 전 부산 법원 앞에 있는 영흥루에 갔었어. 왜 어릴 적 내가 집나가서 철가방 들던 중국집 말이야. 아직도 구수한 기름 냄새 풍기면서 그냥 그대로 있던데. 원래 있던 중국인 주인은 대만으로 돌아가 죽고 그 아들이 가게를 하다가 한국인에게 넘겼대. 그래서 지금 주인한테 내가 여기서 30년 전에 짜장 배달을 했다고 하니까 뭐라는지 알아? 지금도 일하고 싶으면 하래. 일손이 부족하다고. 내 옷차림을 보고 노숙자 정도로 측은하게 생각하더라구.”


  밤을 흐르는 배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웃고 있는 귀공자 같이 생긴 그의 아들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제는 아버지세대인 우리가 자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정작 중요한 의미는 뭘까.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려야 강하게 자란다. 치과의사인 친구는 스스로라도 바람을 만들어 자신을 흔들어 봤다.


  지방에서 의사생활 일주일중 이틀은 동네아이들 수학을 가르치는 재미로 살았다고 했다. 컴퓨터 프로그램개발로 엄청 돈을 벌었다가 쫄딱 망해봤다고 했다. 나는 안경알을 갈면서 철학을 했던 스피노자를 좋아한다. 교무실 구석 작은 철 책상에서 시를 짓는 선생님이 아름답다. 머리 둘 곳조차 없던 가난한 목수인 예수를 사랑한다.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적어가는 하나의 노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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