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영이가 송아 생일파티에 어색하게 앉아있다가 송아가 보내는 입모양 감사인사를 받지.
‘고마워요’
그 때 준영이 표정, 다들 잊지 못할거야.
송아에게 끄덕끄덕해보인 뒤에,
이내 고개를 숙였다가 괜히 술도 한 모금 마셔보지만 치솟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던 그 표정 말이야.
대본집이 오면 난 이 부분부터 찾아보고 싶었어. 작가님의 지문은 뭐였을까.
그때 준영이의 표정은 작가님의 지문에 나와있었을까, 감독님의 디렉팅이었을까, 배우와 감독의 상의 끝에 나온 것일까.
준영이는 경후장학생이 된 이후로 나문숙 이사장님의 보람이 되어 상실감을 메꿔드리려 정말 열심이었어.
부상인 상금은 부모님의 빚을 갚고 본인의 생활비도 감당하고 말이야.
아무리 1등을 해도 잠시나마 진심으로 기쁜 적이 있었을까?
1등하면 아, 다행이다
잠시 숨돌리고, 2등하면 죄송하다 생각하지 않았을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을 거야.
콩쿨에서 최초니 최연소니 전에 없던 업적을 쌓아도 건반은 여전히 무겁고,
부모님도 처음엔 고마워하셨겠지만, 점점 고맙다는 표현은 사라지고 나중엔
입금이 안됐을 때만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겠지.
그 분들 다 준영이에게 잘했다 고맙다 말했겠지만, 준영이는 그걸 마음으로
느낀 적이 없는 것 같아.
(사실 부채감은 이사장님이 준 게 아니라 준영이가 짊어진 것이기도
해.
아버지 빚도 나몰라라 해도 되는데 그러질 못하는 성정이고.
준영이의 성장은 저 혼자 짊어진 짐을 스스로 내려놓는 거였다고 생각해.)
월광+HBD ~ 생일파티 참석까지 준영이가 송아에게 해준 건 준영이
입장에서 대단한 것도 아니었어.
잠깐의 연주 그리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 정도를 해줬지.
15년을 치열하게 살았어도 보람이라곤 없던 준영이였는데,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배려를 한 송아에게 진심의 감사인사를 받아.
누군가에게 자신이 고마운 존재가 된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다들 알잖아.
그때 준영이 표정은 납작해진 자아가 펴진 정도가 아니라 자존감이 끓어넘치는 순간의 표출이었어.
나는 그게 준영이의 처음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나중에 다시 보니 준영이가 누군가에게 음악으로 위로가 된 순간은 이게 처음이 아니더라.
처음은 트로이메라이였어.
예중 연습실에서 준영이에게 다른 곡을 쳐달라던 정경이를 위해 친,
우연히 고른 그 곡이 하필 정경이 엄마가 딸 이름에 붙일 정도로 사랑했던 ‘어린이의
정경’.
나중에 10년 연인인 현호에게조차 다르게 알려줬던 이름의 유래도 그날
얘기해줬었지.
얼음같던 정경이가 툭 터져 울 때 고작 중1인 준영이는 다급하게 언제든
또 쳐줄 테니 울지말라고 해.
어렴풋이 알았을거야, 자기가 하는 연주는 다른 사람 마음의 빗장을
열어버릴 수도 있고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때 이후론 까맣게 잊었을지도 몰라, 먹고 살려고.
그렇지만 자기가 누군가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어본 때 느끼는 그 기분은 쉽사리 잊혀지는 게 아니어서, 준영이의 무의식에 잠재해 있었을 거야.
밤새 차오른 마음을 비우기 위해 연습마다 맨 처음 쳤다던 트로이메라이는
반대로 밑 빠진 독의 구멍을 막아주던 두꺼비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제야 자신의 존재를 추스리고, 텅 비어 헛헛한 마음을 피아노로 채울
수 있었겠지.
그리고 한참 후에 잊었던 그걸 되살려준 사람을 만나.
음악이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자기 심장 언저리를 만지며 내 음악이 여길 건드린다고 말하는 사람.
내 연주에 내 배려에 내 약소한 희생에도 드디어 고맙다고 말하는 한사람.
내 구멍 난 마음을 빛으로 채워 두꺼비 따위는 필요 없게 만드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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