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웹툰 시대가 왔을 때, 만화가들은 비관했다. '만화는 경쟁력을 잃었다'고. 그러나 실제로 일어난 일은 달랐다. 손으로 자동차 배경을 8시간씩 그리던 작업이 스케치업 하나로 간단해졌고, 작가들은 그 시간을 이야기와 연출에 쏟을 수 있게 됐다. 작품 수가 늘었고, 어시스턴트와 스튜디오 시스템이 자리를 잡았으며, 오히려 더 많은 일자리가 생겨났다. 주 단위 연재가 실제로 가능한 환경이 된 것도 그 흐름 위에서였다.
AI 시대에 접어든 지금, 나는 비슷한 기조를 다시 느낀다. '만화는 망했다'는 말이 또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동화로 만들어진 작품에 우리가 쉽게 감동받지 않는다는 것을. 결국 창작자들은 자신의 작품 결에 맞는 사용법을 찾아 AI를 작품 안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클립스튜디오도, 스케치업도 쓰지 않고 손으로만 그리는 방식도 여전히 유효하다. 창작의 방법은 다양하고, 무엇을 중요시하는가는 창작자 각자의 몫이다.

도구는 창작자를 대체하지 않는다. 도구는 창작자가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준다. 디지털이 그랬고, AI도 결국 그 방향으로 수렴할 것이다.그렇다면 이 시대의 창작자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세 가지 단어로 정리하고 싶다. 어휘, 구조, 취향. AI가 무엇인가를 대신 만들어주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창작자에게 필요한 기본기는 오히려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첫 번째 - 어휘
어휘란 단순히 많은 단어를 아는 것이 아니다. 만화와 웹툰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창작의 언어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컷, 칸, 말풍선, 시선의 흐름, 클로즈업, 롱숏, 장면 전환, 후킹, 인물의 욕망과 갈등, 복선, 감정선 같은 것들이다.
AI에게 이미지를 요청할 때도 마찬가지다. '예쁘게 그려줘'라고 말하는 사람과 '낮은 앵글, 역광, 인물의 불안한 표정, 오른쪽에 비워둔 말풍선 공간, 다음 장면으로 이어질 긴장감'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결과물을 얻는다.
AI는 사용자의 언어만큼 작동한다. 창작자가 가진 어휘가 빈약하면 AI의 결과도 막연해진다. 결국 AI 시대의 프롬프트 능력은 단순한 명령어 기술이 아니라, 자기 머릿속 이미지를 얼마나 정확히 언어화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두 번째 – 구조
만화와 웹툰에서 구조란 작품의 설계 전체를 뜻한다. 이야기를 어디서 시작하고, 어떤 사건으로 끌고 가며, 어느 지점에서 독자의 감정을 붙잡을 것인가. 한 화의 후킹은 어디에 둘 것인가. 캐릭터의 욕망과 결핍은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컷의 배열은 독자의 시선을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가.
AI는 장면 하나를 그럴듯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전체의 구조를 책임지지는 않는다. 1컷은 멋있는데 2컷과 이어지지 않고, 캐릭터는 예쁘지만 이야기 안에서 왜 존재하는지 모호하며, 배경은 화려하지만 감정과 무관한 경우가 생긴다. 이것은 AI의 문제가 아니라 설계의 문제다.
만화와 웹툰은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다. 독자가 첫 컷에서 마지막 컷까지 따라가도록 만드는 구조다. 그 구조를 잡는 사람이 창작자다. AI가 빠르게 재료를 만들어줄수록, 창작자는 더 분명한 설계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세 번째 – 취향
취향은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결과물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안목이고, 작품의 방향을 끝까지 밀고 가는 기준이다. AI가 만들어낸 수십 장의 이미지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장면은 너무 설명적인가, 아니면 감정이 부족한가. 이 캐릭터의 표정은 이야기의 결에 맞는가.
초보자는 가장 화려한 이미지를 고르기 쉽다. 하지만 좋은 창작자는 가장 화려한 이미지를 고르지 않는다. 이야기의 감정에 맞는 이미지, 다음 컷과 연결되는 이미지, 캐릭터의 성격을 해치지 않는 이미지를 고른다. 이 선택의 기준이 없으면 AI는 오히려 작품을 산만하게 만든다.
실행의 문제
어휘와 구조와 취향은 결국 실행으로 연결된다. 무엇을 만들 것인지, 왜 만드는지, 내가 작품 안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인지를 알고, 실제로 무언가를 쌓아가는 것이 창작자의 일이다.
AI는 '웹툰 만들어줘'라는 말에 막연히 반응한다. 하지만 '고등학생 대상 4컷 인스타툰의 1화를 만들고 싶다. 사건은 사라진 지우개이고, 분위기는 귀엽고 따뜻해야 한다'고 말하면 작업은 시작된다. 창작자의 어휘가 작업의 정밀도를 결정한다.
도구는 계속 바뀐다. 오늘의 툴은 내일 더 강력한 툴로 대체될 수 있다. 그러나 어휘를 쌓고, 구조를 이해하고, 취향을 단련하고, 실제로 만들어보는 사람은 쉽게 대체되지 않는다. 스케치업을 쓰든 손으로 그리든, AI를 활용하든 그렇지 않든, 그 선택은 창작자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이 작품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AI와 함께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이다.
창작자의 자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바뀌고 있다.
손끝의 노동만으로 증명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선택과 설계와 실행으로 증명하는 시대로.
김한재 교수는...
강동대학교 만화웹툰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한재 교수는 세종대학교 멀티미디어애니메이션전공으로 석사, 상명대학교 감성공학 박사를 받았다. 교과서만화(1995)> 학습만화가로 데뷔했으며, 애니메이션산업백서, 만화산업백서, 캐릭터산업백서 집필진으로도 활동했다. 국내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 등의 산업과 콘텐츠 이야기를 풀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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