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스 반 미리스 1세, Old Soldier Holding a Pipe 1536)
그래, 내가 스물하나가 딱 되던 해 군문에 들어섰다.
스무 살이면 이 제국의 모든 남성이 자신의 남은 여생이 어때야 한다고 결정짓기에 충분한 시간이지.
실제로 내 주변 사람들은 모조리 그랬다. 친구들이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갔지. 난 농사나 지어야겠어. 난 장사를 해야겠어. 난 뱃사람이 될 테다...
마지막까지 같이 뒷골목을 전전하며 행인들 돈주머니를 털던 친구조차 말이야.
그런 놈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만... 그놈도 화약 공장에서 일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자기 갈 길을 갔었다.
조금의 배신감이 느껴지긴 했지. 젠장. 그놈도 나랑 똑같은 새끼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그런 건 얼마 가지 않더군.
주변인이 모두 정신을 차린 이후에도, 난 바뀐 게 없었어.
놈팽이처럼 쳐먹고 토하고, 돈이 떨어지면 부두에서 하역 작업을 하면서 푼돈이나 벌고, 그걸 다시 저질 주정이나 사는 데 다 써버리는
그런 같지도 않은 삶이었지. 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어.
그 외엔 내 젊은 시절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군. 아마 술 때문일 게지.
지금 내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안개처럼 모호하고 흐릿해서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기 쉽지 않구나.
하지만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건, 그 젊은 나이에 난 벌써 삶에 염증이 나 있었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보기엔 이곳의 모든 삶들이 무료하고, 피곤하기 짝이 없었단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이 세상은 신비롭고 조화롭게 창조되었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했다. 태어날 때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허리가 휘도록 일해야만 했고,
그 과정 어디서든 이 세상 어딘가의 마법 들린 개같은 피조물들에게 습격당해 죽을 수 있었거든.
젊었을 때부터 난 이 모든 개수작에 환멸이 났었던 것 같다.
성실하게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게 바보같다고만 생각했단 말이다.
일하고, 자고, 먹고, 일어나서 다시 일하고, 내 수준에 맞는 못생긴 아낙네를 맞아 말 안 듣는 자식이나 싸지른 다음
매순간 무너져만 가는 허름한 가옥에서 병에 시달리다 마침내 숨이 멎고는 말겠지. 이런 삶에 과연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왜 대부분의 인간이 이렇게 살다 가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는 거지?
하, 오만하다고 느껴지지 않느냐? 이때 난 겨우 스물 한 살이었다.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살았다고 그런 생각을 감히 한단 말이냐?
하지만 내가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느냐? 부모님이 길잃은 거인의 몽둥이에 쳐맞고 형체도 없이 사라진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제기랄, 아무리 해도 떨쳐낼 수가 없었단 말이다.
난 사랑받는 자식이었고, 부모님께서는, 제국에서 가장 떳떳한 분들로서
수도원의 돼지들이나 점잔 빼는 나리들과는 달리 정직한 노동만으로 일생을 살아 오신 분이었다.
부질 없는 인생이었지. 그렇지 않으냐? 그 몇십년의 결실이... 고작 한 번의 휘두름으로 끝장나 버리고 말다니.
그래. 우라질. 이런 우울한 이야기는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무튼, 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태어났다. 내게 특별한 것이란 무엇 하나 없었지.
그와 동시에, 나는 남들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난 뭔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평범한 삶을 거부할 테다.
내가 젊었을 때는 그랬어. 난 겸손하지 않았다. 젊을 땐 다들 그러지 않느냐?
이렇게 영원히는 살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애써 이후 생각은 하지 않았지.
마치 그러면 다가올 내일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 처럼.
그런데 지그마께서 이런 비루한 인생도 굽어 살피셨는지 내 삶에도 기회라는 것이 찾아왔다.
2502년, 년도를 똑똑히 기억하지. 왜냐면 그 해가 칼 프란츠 폐하가 즉위하시던 날이었거든.
몇 달 동안이나 시내 전체가 떠들석했었고, 난 그 들뜬 분위기에 파묻혀 더 신나게 술을 쳐먹었지.
이런 축제를 젊을 때 맞이하게 되어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이나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핑계 없이 먹고 마시고, 사람들이 관대해지는 날이 살면서 몇 번이나 찾아오겠느냐?
그분께서 즉위하시던 날, 난 평소와 다름없이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있었다.
대로 변두리에서 뒷골목으로 통하는 건물 벽에 기대어 잘나신 새 폐하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생각했었지.
나같은 인간 쓰레기와는 다르게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자의 용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말 궁금했거든.
아침부터 그러기 시작해서 그림자가 다리 사이에 고일 때까지 그냥 빈 술병들과 함께 서 있었다.
나 같은 건 아무도 신경쓰지 않더군.
그런데 거기서 난 평소와 뭔가 다른 것을 보고 말았지.
금박 입힌 갑주를 입고 햇살 아래에서 행진하는 기병대를 말이다.
군마들의 덩치가 얼마나 큰지, 말등이 내 키보다 높을 지경이라 저걸 타려면 사다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지.
그리고 거기 탄 기수들의 소양도 대단한 것이라 문외한이 얼핏 보기만 해도 목 언저리에 군살이 조금도 없는 것이,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들과 꼭 같더군.
그 뒤를 콧수염 멋지게 기른 군인들이 그야말로 범선의 돛대 같은 창대를 치켜들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했다.
그리고 그 군복의 색이란... 세상에, 이 세상 모든 꽃밭의 색을 모아 놓은 것보다 화려하고,
그 사이에서 날붙이와 흉갑이 내는 찬란한 광채...
먹은 술이 순식간에 다 깨더군.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것 같았어.
거기에 얼마나 시선이 강하게 박혀 있었는지, 처음에 보고자 했던 폐하인지 무엇인지가 언제쯤 지나갔는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마음만 먹으면 저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너무나도 충격받았다.
언제든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놀라웠어.
나는 항상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저 거대한 무언가에 속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고양된 기분이었지.
세상에, 내가 왜 이 생각을 못 했담?
네가 알겠느냐? 이런 기분을?
저 찬란한 집단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저 강하고 화려한 집단 안에 내가 들어가기만 한다면, 나는 보호받는 동시에 보호자가 되고,
이 따분하고 반복적인 삶에서 벗어나 마침내 뭔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이 느껴졌다.
다음날 바로 난 모병관을 찾아가 내 몸의 모든 권리를 푼돈 조금에 팔아넘기는 끔찍한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걸 망설이지도 않았다는 게 믿을 수 없지만,
원래 제국군이라는 건 젊은이들의 멍청함 덕분에 유지되고 있는 단체거든.
최악의 선택이었지. 거기서 첫 번째로 깨달은 것은 군인이 주로 하는 일은 행진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모병관이 방금 내가 서명한 서류를 들고 내게 입대한 이유를 묻더니,
내가 시가행진이 멋있어서 입대했다고 하자 다짜고짜 웃기 시작하더군.
여긴 너 같이 그런 시덥잖은 행사를 보고 찾아온 얼간이들이 아주 많다고 말이야.
내가 주로 해야 할 일은 행진이 아닌 행군이었고, 그 미묘한 차이점을 깨닫게 되는 데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장창 중대에서 내 군생활의 처음을 시작했지.
아니, 이 말은 맞지 않겠군.
나는 창병으로서 내 모든 군생활을 보냈다. 나를 가르친 자는 알베르트...
알베르트, 뭐더라? 알베르트 올...
아니다. 라이...
이런 씨발, 그 새끼 성 따위 알게 뭐냐. 귀족 나리도 아닌데. 아무튼 알베르트라는 인간이었어.
그래. 그 알베르트.
웃기는 수염을 한 사내였지. 콧수염에 포마드를 얼마나 쳐발라 놨는지,
놈의 수염을 짜면 거기서 나온 기름으로 중대 하나를 먹이고도 남을 장어를 튀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 성질 나쁘고 좆 같은 새끼였어.
하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한 인간이었지.
열여덟이 되자마자 입대해 삼십 년간 복무한 베테랑으로, 놈의 흉갑에는 각종 전역에서 획득한 빛나는 훈장과,
당시의 지휘관들이 손수 하사한 금 조각을 가지고 새긴 갈매기 세 줄이 박혀 있었고,
그 아래엔 멋들어진 궁중 라익스펠 필기체로 그의 이명이 새겨져 있었지.
그땐 내 이름도 고작 쓰던 무지랭이였으니 그걸 읽을 줄 몰랐지만, 그건 '완고한 병사'라는 뜻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를 '완고한 놈'이라고 불렀지.
이명이야 자기가 아무렇게나 좆대로 붙이는 건 자유지만, 남들이 기꺼히 그렇게 불러 주게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그렇지?
평민 출신으로 일개 중대를 지휘하게 된 그는 아웃라이더 연대에서 복무한 경력까지 있는 진짜 중의 진짜였다.
글도 못 읽는 놈들에게 폐하의 새 칙령을 소개하고, 장교들이 작성한 정훈 교육을 전달하고, 줄을 제대로 서는 법을 가르치고,
나아가 날붙이가 달린 8피트짜리 막대를 제 수족처럼 쓰게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가끔은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 상건달 출신 신병들을 손수 두들겨패기도 하고 말이야.
구령 한 마디에 300명의 중대가 일시에 방향을 바꾸고 앞 사람을 찌르지 않게 창대를 바꿔 겨누는 것이 쉬울 것 같으냐?
전혀! 술주정뱅이 열 명만 그렇게 가르치는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백 단위는 맙소사, 완전히 다른 일이란 말이다.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지. 그는 그게 얼마든지 있었고. 그래서 그걸 훌륭하게 해 냈다.
모든 신병들은 쳐맞고, 구르면서 다 같은 인간이 되어갔지. 그게 훈련의 핵심 과정이었다.
모두를 같게 만드는 것 말이다. 인간성의 모든 불필요한 부분을 가능한 한 가장 많이 떼어내는 거지.
무엇으로? 바로 고통으로!
물집이 차오른 발과 딱지 앉고 부어오른 손아귀가 그렇게 만들어 주는 거지.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인간이었는지는 상관없다.
여자깨나 후리고 다녔든, 사기꾼이었든, 실패한 장사꾼이든, 우리는 모두 여기서 배고프고 팔다리가 쑤시고 떨어져나갈 것 같은,
같은 고통을 공유하고 같은 것을 바라는 자들이었지.
우아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 방진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그 구성원을 모두 똑같이 만든다는 발상이?
우리는 최선을 다 했다. 최선을 다 하지 않는 새끼들은 쳐맞아야 했고, 알베르트는 누구를 때려야 하는지 귀신같이 알았거든.
그리고 우린 마침내 알베르트가 그 기름진 콧수염을 만족스럽게 쓰다듬게 만드는 데까지 성공했지.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 기초 훈련이라는 게 성벽에 기대어 하품이나 해 대던,
제철 생선마냥 배에 살 들어찬 예비 경비병들 따위나 만들자는 수준이 아닌 것 같았거든.
아무리 해도 이놈의 훈련이 끝나지 않는 게야. 근무지가 정해지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우리는 간단한 방진 짜는 것만 배운 게 아니라 방진 해체와 변형, 재집결 같은 고급 전술까지 배우기 시작했고
서로 대련을 반복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창 외에 기초 병장기들을 다루는 다른 훈련들까지 받기 시작했다.
오, 그때 주둔지에서 보낸 날들은 정말 환상적이었지. 거의 매순간 죽거나 죽이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살았거든.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 같다는 생각이 수도 없이 들었어. 하지만 이제 와서 거기서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잖느냐?
그 망할 이십오년짜리 계약서 때문에 말이다.
넌 나보다 똑똑하니 이런 말을 해 주지 않아도 알겠지만, 계약서에 서명할 때는 부디 나보다 사려 깊어야 한단다.
우리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알아낸 건 거기서도 또 한참 뒤에 일이었지.
알베르트가 어느 날 우리에게 전달해 주더군.
우리는... 존귀하신 황제 폐하가 지휘하시는 직속 연대의 구성원으로서,
그분의 가장 영광스런 원정에 참가할 특권을 얻게 됐으니 기뻐하라는 말이었어.
뭔가 단단히 잘못 됐다는 걸 깨달았지. 특권은 지랄! 난 몰랐던 거야.
군인이라는 게 언제든지 좆 같은 갖가지 장소에 끌려가 죽을 수 있는 직업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그게... 진짜로는 몰랐던 거지!
지면이 핑 돌더군. 원정이요? 어디로요? 그건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다.
자기도 모른다는 뜻이었지.
우리가 폐하의 직속 부대에 들어 있었다는 것조차 그때 처음 들었어!
그때까지도 내가 좀 모자란 놈이었던 건 맞아. 사실은 눈치챌 수도 있었는데.
열병식이나 하고 싶어서 입대한 놈이 어디 하루아침에 깬 사람이 되겠느냐?
그 기질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게지.
호승심과 출세욕으로 가득 찬 동료 몇몇은 기뻐하기도 했어.
전공을 세워 출세할 기회가 흔히 찾아오는 건 아닌데, 자긴 정말 행운아라고 말이야!
그러나 대다수 병사들은 좀 생각이 달랐지.
아니, 남은 복무일을 내림하고서라도 아직 스물 네 해가 남았는데. 그 기간동안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사지로 기꺼이 향할 각오는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란다. 그리고 그것은 폐하는 물론이고 휘하 장교들과 부사관 모두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너도 기억해야 한다.
전사들이란 혹여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빙하를 집 삼아 사는 북쪽의 야만인들이 그런 놈들일지도 모르지. 그들은 미개하지만 추위를 견딜 두꺼운 가죽과
집채만한 늑대도 맨손으로 때려 눕힐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태어났다.
아니면 마리엔부르크 서쪽의 평지를 지배하는 오만한 귀족들처럼 말이야.
부모의 부모 가계로부터 내려온 장인의 검과 갑주를 지니고,
말 안장 위에서 삶의 절반을 보낼 특별한 운명을 가진 인간들 말이다.
하지만 병사는 아니다. 우리 같은 병사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위대함도, 뛰어난 재능도 없이 평범함과 의무로 단련된 이들 말이다.
첫 출전일이 몇 월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구나.
그런 건 아마 네가 나보다 더 잘 알테니 대충 넘어가겠다. 첫 실전 상대는 제국 분리주의자라는, 웃기는 새끼들이었지.
지그마께서 이 제국을 열둘로 나눠 놓으셨으니, 무슨 뭐... 이제는 나뉘어 안정된 정부를 꾸리는 것이,
그분께서 안배하신 뜻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해괴한 주장을 하는 집단이었다.
그들 스스로 그걸 믿기나 했을지 의심스럽군. 사실 산도적 떼와 별로 다르지도 않았거든.
헬무트 루덴호프라는 작자는 예전부터 아주 유명했어.
난 그 새끼가 미치광이인 줄만 알았는데 실제 그렇게 많은 추종자를 어디서 끌어모은 걸 보니 광인들은 서로 어울리기 좋아한다는
옛말이 꼭 맞더군.
혀가 길지만 결국 폐하께서 보시기엔 단순한 반역자들이었고, 반드시 철권으로 응징해야 하는 작자들이었지.
그들이 알트도르프 동남쪽에서 상단을 약탈하고 돌아다니는다는 보고를 받은 폐하께서는 실전 훈련을 겸해
주둔지에서 훈련 경과가 유망한 보병 몇 대대와 친위 기병대를 소수 차출해 신속 대응군을 꾸리셨다.
이쯤에서 내 눈부신 전공이 시작됐다는 말을 해 주고 싶지만...
내 첫 데뷔 무대는 아주 엉망이었지.
숙련된 부사관과 장교가 직접 가르친 정예 부대였던 우리는
상비군과 징집병의 중간 어딘가에 걸쳐진 상태의 느슨한 상대 중대를 가볍게 찍어누르고 전진했다.
상대의 기병대가 없거나 그 규모가 아주 미미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우리의 상대의 측면 보병을 분쇄하는 임무를 맡았지.
우리 상대는 중대라고 할 수도 없었어. 각종 날붙이를 되는 대로 긁어모아 군복 비슷한 거적데기만 겨우 붙여놓은 꼴이었으니.
차라리 브레토니아의 농민 징집군이 그와 더 비슷한 모양새였을 거다.
전열끼리의 백병전은 금방 우리의 승리로 끝났고,
상대 최전열이 공포에 질려 흩어지고 등을 보이기 시작하자 엉성했던 방진이 단숨에 엉망이 되고 와해되었다.
우리는 승리에 취해 신나게 전진했지만, 곧 놈들이 믿고 있었던 구석이 무엇인지 드러났지.
고지대의 우거진 수목 사이에서 나타난 놈들의 석궁병이 가장 먼저 사거리에 들어온 우리에게 집중 사격을 퍼붓기 시작한 거야.
엄폐물도 없는 개활지에 노출된 우리의 전우들이 순식간에 쓰러져나갔다.
우리는 상정하지 못한 상황에 공포에 질렸다. 아직 상황에 대비되지 않았었지.
아무리 잘 조직된 훈련이라고 해도 연병장에서 병사들이 화살비를 직접 겪게 하는 것까진 좀 무리였으니.
방진의 바깥쪽을 구성하는 인원들이 살기 위해 떨어져나갔고, 부사관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전진해라! 병신들아, 놈들과 거리를 좁히란 말이다!
그들은 악을 쓰며 방진의 앞에서 뒤를 종횡무진 누비고, 사기를 북돋으려 애를 썼지.
경이로운 용기였어. 그 화살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자신을 지키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오직 임무의 수행만을 위해 누비는 그들의 모습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에서부터 패주하기 시작한 군대를 수습하는 것은...
가장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이라고 할지라도 지극히 어려운 것이지.
나는 그 이후로 이 세상 거의 모든 장소를 넘나들면서 거의 모든 투척 세례는 다 겪어 봤다.
화살과 총알비 말고도, 어떤 새끼들은 궁전 대들보를 날려 대기도 하고, 지옥의 업화와 비명을 모아 둥글게 빚어서 날려 대기도 하고...
그러나 내 생전 처음 겪은 그 조악한 화살비는, 죽음과 공포의 상징으로 아직까지 내 영혼 한자리에 깊게 새겨져 있다.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첫 번째를 뛰어넘는 인간은, 두번째, 세번째 시련이 찾아왔을 때도 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단다.
그러나 거기서 탈락하는 인간은...
두 번째란 찾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난 거의 탈락할 뻔 했지.
내 오른쪽에 선 이들이 죽거나 떨어져나가고, 마침내 내가 열의 가장 오른쪽에 선 사람이 되자,
그냥 창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냅다 뛰어나가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유혹이 들기 시작했다.
군을 처음 들어갔을 때 생각했던 멋진 내 모습 따위는 벌써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그냥 내 오른쪽으로 뻥 뚫린 개활지가 너무나도 달콤해 보였어.
하늘과 내 오른쪽을 반복해서 쳐다보다가 유혹에 굴복하기 직전...
나는 여전히 방진 최전열에서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는 알베르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지.
"ㅡㅡㅡ !!"
공황 상태에 빠진 나는 전장의 소음 때문에 그가 내지르는 소음을 정확히는 듣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의 입술 모양은 너무나도 잘 읽을 수 있었지.
"ㅡㅡㅡ !!"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어. 매번 벌레니 개자식이니, 창녀 가문의 3대 독자니 하는 식으로 나를 부르던 놈이, 내 이름을 정확히 부르고 있었단 말이다.
그리고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땀 때문에 뭉치고 헝클어진 그의 머리칼과 수염 사이로, 부릅뜬 눈이 내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 했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지그마 맙소사. 기적이 일어났지.
우리가 집중 사격을 받는 사이 폐하의 라익스가드가 석궁병의 좌측 언덕 너머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야!
퇴각할 충분할 시간도, 엄호할 병력도 없는 놈들의 석궁병은 순식간에 중기병의 파괴적인 돌격에 노출되었고,
곧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놈들은 급하게 근접 무장을 뽑아들고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그건 종잇장으로 수문을 만들려고 드는 것과 같이 절망적인 시도였지.
첫번째 충돌에 놈들은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났고,
비명 소리 사이로 뼈가 부러지고 살이 잘리는 소리를 이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단 몇 초만에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한 그들은 그들이 튀어나왔던 숲으로 다시 기어들어가기도 전에 대다수가 절명했다.
우리가 겪은 몇 파의 일제사격은 여름 소나기가 왔다 간듯 것처럼 뚝 그쳤지.
바닥엔 물 대신 피가 고여 있었고 말이야.
정말 순식간의 공습이었어. 그 사이 우리 창병 중대로 말할 것 같으면,
시간이 멎은 듯 그 광경을 멍청하게 쳐다보고만 있었지. 이윽고 기병대 쪽에서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알베르트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하지 않고 날 쳐다보고 있더군.
그리고... 그제서야 알았지. 그가 권총을 내 가슴팍을 향해 겨냥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가 영원히 그러고 서 있을 것만 같았다. 나도 얼마나 오랫동안 그를 주시하고 서 있었는지 몰라.
그러다 어느 순간 엉뚱하게도 나는 내팽개친 내 창을 주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가 날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었으니, 나도 무기 비슷한 거라도 들고 있어야 겠다는 병신같은 생각을 했었거든.
놈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난 끝이었는데도 그딴 생각을 하고 있었지... 첫 전투의 충격 때문에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게다.
난 내 발치에 놓인 창대를 다시 쥐고 천천히 다시 일어섰어. 내가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는 알베르트는 이미 총을 거두고 있더군.
"이제 됐다. 신병."
그가 거의 되뇌이듯이 말을 끝맺었지...
"네 위치로 돌아가도록."
첫 승전을 맞은 밤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였다. 제국군은 째째한 집단이 아니었고, 베풀어야 할 때가 언제인지 확실히 알았지.
최소 인원만 남기고 음주가 허락되었고, 우리는 근처 마을에서 사들인 가축을 도축해 토악질이 나올 때까지 쳐먹는 것이 허락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토록 좋아하는 술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단 한 잔도 마실 수 없더군.
내가 비겁한 배신자가 되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사실이 계속 맴도는 거야.
일보 직전이 아니군. 나는 실제로 배신자였어! 내 말은, 마음 속에서는 그랬단 말이지.
나는 승리자가 아니었어. 패배자였다. 그 라익스가드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단지 몇 초만 더 늦게 기병대가 도착했더라면,
나는 아마 백에 아흔아홉의 확률로 내 자리를 이탈해 뛰쳐나갔을 테고, 알베트르는 방진의 와해를 막기 위해 망설임 없이 내 등에다가
발포했을 테니까.
나만 풀죽은 게 아니었어. 유독 우리 중대만 뭣 씹은 얼굴로 맛있는 고기 조각을 무슨 지푸라기나 되는 것처럼 깨적거리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기병대를 제외하면 가장 앞에 선 병력이었고,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중대기도 했거든.
지나가는 다른 대대, 중대 소속 병사들이 위로와 사려 깊은 감사를 보내기도 했지만,
처음 맞이한 실전과 동료의 죽음 때문에 충격에 빠진 우리들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밤과 취기가 깊어지고 대부분이 아무 데나 엎어져 잠에 빠져들었을 무렵... 내가 앉아 있던 모닥불 건너편에서 알베르트가 나타났다.
어처구니없게도 전투 중에 완전히 헝클어졌던 콧수염이 다시 완벽하게 가다듬어져 있더군.
난 그때 남들이 다 술깨나 퍼마시는 동안 잘나신 콧수염이나 매만지고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새끼는 방진에서 이탈했던 놈들에게 걸걸한 욕설 세례를 내리고는 사상자를 수습하고 포로를 인계하는 작업을 하다 온 거였지.
"실망했나?"
많은 것이 함축된 말이었지만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 거 아닙니다. 제기랄, 저리 좀 가 주시면 안 됩니까?"
"말조심해라. 이 새끼야. 니 대가리에 납탄만큼의 무게를 더해 주기 전에."
그는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내 무례함을 관대하게 넘어갔다.
"그것 때문에 저리 좀 가라고 하는 거잖습니까. 그 권총 때문에 우리 사이가 어색해졌다고요."
내가 아직 말을 안 했었느냐? 그게, 훈련 기간이 생각보다 많이 길어지면서,
중대원들이 우리 패거리의 '대장님'과 어느 정도 애증의 교감을 나눌 정도의 시간은 있었거든.
그래서 어느 정도 말을 트고 지내긴 했지.
잠깐 찾아온 침묵을 건너뛰고, 그가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나는 꽤 오래 복무했지."
"그건 압니다."
"경력 자랑이 아니다. 이 자식아. 나라고 아들뻘 되는 놈들에게 총칼을 겨냥하는 게 재미있어서 하는 일 같으냐?
"..."
"하지만 날 믿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쳐내야 할 놈'을 빠르게 쳐 내지 않으면, 그 새끼가 세 명의 사상자를 만들고,
그 세 명은 곧 열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 낸단 말이다."
"그것도 압니다."
"아니, 넌 모른다.
첫 실전에서 등을 보이거나 그럴 뻔한 신병이 네가 처음도 아닐 거고, 마지막도 아닐 거다.
오늘 네가 좀 실망스러우냐? 무공을 세우고 당당해진 자기 자신이 아니라서?"
"그런 건 아니고..."
"누군가를 패잔병이나 배신자라고 손가락질 하는 건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당사자 입장이 되어 보는 건 꽤 까다롭지.
넌 전열에 서 있었고, 첫 번째 실전이었고,
네 오른쪽 병사는 이탈하고 왼쪽 병사는 화살에 맞아 죽었고, 모든 상황이 그럴싸했지.
내가 보기에 너 같은 병신이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는 걸 기대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약 올리는 겁니까?"
"통계적으로는 그렇다는 이야기다.
그래. 넌 운이 좀 좋았지. 하지만 전장만큼 운이 많이 필요한 장소도 많이 없다.
더 말을 길게 하지 않겠다. 네가 어쩌다 두 번째 기회를 얻었다면,
같은 상황이 다시 찾아왔을 때 실수를 두 번 하지 않도록 대비해야 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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