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스 반 미리스 1세, Old Soldier Holding a Pipe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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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난쟁이들이 여덟 봉우리 요새라고 부르는 그 저주받은 곳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마침내 우리 중대가 미끼가 되는 날이 찾아왔다.
알트도르프나 마리엔부르크의 외성벽을 본 적이 있겠지.
웅장하지 않더냐? 위대한 인간 기술자들의 작품이지. 내 말은, 인간 중에선 위대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여덟 봉우리 요새에서 목격한 것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그런 구조물이 아니었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가 쌓아 올린 벽돌들은 유아들의 흙장난 같은 것이지.
이 세계의 지하가 거의 비어 있다는 말을 내가 하면 넌 믿을지 모르겠구나.
아니, 알트도르프의 미궁 하수도같은 그런 하찮은 구조물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거의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그들은 지하 아래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대역사를 이뤄 냈다.
마치 산맥이 구름 사이로 뻗은 것만큼의 공간을 난쟁이들은 지하에 만들어 왔지.
나는 땅 속에서 공성전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어.
지하? 동굴? 그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하 속에서 천장이 거의 일이백 피트 위에쯤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느냐?
없겠지. 그런 구조물 비슷한 것조차 인간 국가 어디서도 찾아낼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지금 땅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큼은 빌어먹게 확실했지.
이곳의 전략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도 지도를 펼쳐 본다면 바로 알 수 있겠지.
이곳은 실버 로드와 바락 바르에서 검은 암반을 통해 내려오는 원정로를 확보하는 훌륭한 전진 기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만 차지한다면 불모 지대와 그 아래 산맥에 위치한 그린스킨 잔당들을 아주 손쉽게 각개격파할 수 있을 것임이 분명했지.
말하자면 거긴 교두보이자, 중간 거점이자, 그 자체로 거의 완벽한 요새였다.
그리고 고대 드워프들도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렇기에 그들 역시 정성을 다해 이 장소를 온갖 토목 기술들의 경이들로 무장시켰던 것이겠지.
우리는 여덟 봉우리의 외곽으로부터 안쪽으로 서서히 조여들어갔다. 각 봉우리 지하에는 전성기 난쟁이들의
놀라운 조각상들과 소성채들, 각종 공방과 광산의 갈래길들이 모든 길이 통하는 가운데로부터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뻗어나와 있었다.
이 장소들만 보고서도 그들이 역사의 전성기에 누렸을 그 부와 힘의 흔적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었지.
내가 남부 회색 산맥 요새 입구에서 본 웅장한 난쟁이 조각상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지? 하, 그것조차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한 인간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만들 법한 요새가 거기선 그냥 민가의 한 구획에 불과했고,
모든 구조물에 금을 당연하다는 듯이 사용했더군.
온갖 처마와 기둥, 모서리를 금선으로 장식했거나 혹은 그랬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야만족 놈들이 한참 동안이나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음에도 아직까지도 거기서 금붙이를 모두 떼어 내지 못한 거야.
우리는 성당을 색유리로 치장하는 것만 해도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는데 말이지.
그리고 그 규모는 맙소사, 그 키 작은 친구들한테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들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더라니까.
하나같이 놀라운 것들이지만 그 경이조차 여덟 봉우리 가운데 계곡의 지하에 위치한 중심 성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곳이 바로 드워프의 영원한 지하 왕국으로 통하는 입구였으며, 우리가 본 건 아직까지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던 거지.
중앙 요새 입구에 세워진 성벽을 보는 순간 우리는 너무나도 기가 질렸다.
한눈에도 두껍기 짝이 없어 보이는 성벽이 땅에서 그 꼭대기까지 일백 피트는 족히 뻗어나가 있었어.
망루와 성탑 사이를 가로지른 성곽에는 족히 수천 개의 총안이 나 있었고,
바깥 버팀벽 사이에는 성벽 키만큼의 드워프 조각상들이 우리를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대부분의 장식과 구조물의 실루엣이 조잡하기 짝이 없는 그린 스킨들의 심미안에 의해 원 모습을 잃고 말았지만,
그린 스킨의 '개량'이라고 해 봐야, 본래 견고했던 구조물 위에 약간의 고철 더미를 쳐발라 놓은 것에 불과해
방어 기능에는 조금의 이상도 없었지.
하지만 조상신 조각상들 위에 그린스킨 우상의 가면을 씌운 건 조금...
웃기긴 하더군. 드워프들이 우리가 웃는 걸 봤더라면 그 염병할 빚더미 계산서에 우리 이름도 적어넣었을 테지만 말이야.
어쨌든, 그 성벽 너머와 아래에 우리를 그토록 괴롭혔던 그린스킨들이 바퀴벌레처럼 우글거리고 있었던 거야.
나는 이해가 안 가더구나. 그토록 견고한 요새가 도대체 뭘 하면 함락당할 수 있는지.
난쟁이들이 도대체 뭘 하다가 여기를 잃어버린 건지 말이야.
그린 스킨 새끼들이 용들로 구성된 대대라도 끌고 왔단 말이냐?
우리가 상대하는 게 드워프가 아니라 그린스킨이라는 데 감사해야 할 상황이었다.
만약 우리가 난쟁이들과 공성전을 하고 있었다면, 그들은 저 끔찍한 총안구와 성탑의 화포 구멍을
멍청한 오크 새끼들보단 훨씬 잘 활용했을 테니까.
우리는 그걸 공성탑과 공성추 같은 것도 없이 그런 곳을 공략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 걸 만들 양질의 목재와 부품을 이 지하 한가운데까지 조달하는 것도 큰 문제였지만,
시간이 문제였어. 우리가 공성전을 준비하는 사이 외부 그린스킨들 지원군이 이곳으로 집결하게 된다면,
여덟 봉우리 한가운데까지 진격한 우리는 순식간에 고립되어 바깥쪽과 안쪽에서 동시 공격을 받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었다.
황무지에서 전쟁을 하다 보면 필연적인 일이었지만 그곳에서 후방을 안전하게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린 스킨 새끼들은 무슨 버섯이 자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음습한 곳에서 금방금방 나타나 전쟁 무리에 합류하곤 했고,
'보다 안전한' 방식의 전쟁으로 그런 놈들을 일일히 상대했다간 황무지에서 영원히 소모전만 계속하게 될 테니 말이다.
때로는 과감하게 전선을 돌파해 놈들의 장비와 인원 충원을 차단하는 것이 필요했고, 여덟 봉우리가 바로 그런 장소였다.
그리고 그 동안 포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했지. 따라서 이 공성전은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끝나야만 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겐 공성탑보다 조금 세련된, 다른 선택지가 있었지. 바로 화약 말이다.
틸레아에서 제일 가는 기술자가 설계하고,
알트도르프의 황금 학파가 주조한 포신과 포탄을 사용했으며, 뉠른에서 온 포병 장교가 지휘하는
최강의 포병대 말이야.
제기랄, 산속의 지하까지 어떻게 그 염병할 쇳덩어리들을 운반했는지는 묻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짐말처럼 혹사당하던 그 불쌍한 새끼들...
공성전은 우리의 선제 사격으로 시작되었다.
열 여섯 문의 박격포가 성곽 위를 사정없이 두들겼고, 그레이트 캐논이 충차 대신 성문을 매섭게 후려갈겼다.
박격포탄은 견고하기 짝이 없는 구조물 자체에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그 위에 선 말랑말랑한 살덩이 새끼들에게는 아주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지.
곧 놈들도 질세라 이쪽으로 돌덩이를 날려 대기 시작했다. 우리의 최첨단 화포에 비하면 조악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 조악한 기술력으로도 사람의 신체를 으깨 버리는 데는 아주 충분했지.
그 포격전이 일종의 신호 같은 것이었지. 전원 돌격 명령을 받을 우리는 이렇다 할 생각할 새도 없이 바로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물론 상대방도 우리가 달라붙을 때까지 호락호락 두고보고 있지만은 않았고 말이야.
전진하는 사이 방진의 구성원이 크고 작은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큰 화살은 오크가 쏘는 것이고, 작은 것은 고블린이 쏘아 대는 것이었지.
우리의 숙련된 석궁병이나 궁수들에 비하면 그것들의 사격 솜씨는 그야말로 형편없었지만, 놈들의 겨냥 솜씨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
땅 위를 모두 뒤덮은 것이 우리 군세이니, 탄막을 충분히 형성하면 누군가는 틀림없이 거기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거든.
전진하는 사이 누군가 화살에 맞아 쓰러지면, 바로 뒷열의 구성원이 다섯 걸음을 더 걷기도 전에 신속하게 빈 자리를 메웠다.
아. 화살비...
그래. 화살비지. 이미 수십 번은 더 겪었던 그 화살비 말이다.
하지만 나도, 내 곁에 선 병사들도 첫번재 전투에서와 같은 겁쟁이가 더는 아니었다.
우리가 그레이트 캐논이 쉴새없이 타격하고 있는 성문으로 진격하는 사이,
검병 중대가 급조한 사다리를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킨 뒤, 성벽에 걸치고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뒤에 선 아군 석궁병들의 필사적인 엄호에도 불구하고 고저차의 불리함을 근본적으로 극복해낼 수는 없었지.
성벽 위에선 끓는 기름, 물, 놈들의 냄새나는 똥 무더기, 화살과 온갖 날붙이까지 쉴새없이 쏟아지더군.
사다리의 선두를 오르던 병사가 중간 부분을 넘기도 전에 목에 화살이 꽂혀 비명조차 없이 바닥으로 추락해 내려가는게 보였어...
우리가 성문까지 진격하는 동안 먼저 성문 위로 기어올라가는 아군 병사들의 비명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똥오줌 냄새, 살이 구워지고 타는 냄새, 피와 땀 냄새, 날카로운 화약 냄새, 비명과 함성, 폭발 소리, 부사관들의 끊임없는 호령,
지옥의 밑바닥이 있다면 그런 곳일 게다.
그리고 누구도 거기서 빠져나갈 수 없었지...
못을 망치로 박아 넣듯 대포의 충분한 포격이 계속되자, 드워프의 석공술로 지은 성문 역시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성문을 지탱하는 기둥벽에 유격이 생겼고,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구조물이 자중을 이기지 못하고 뒤틀리기 시작했지.
경첩 역시 찌그러지며 문틈이 조금씩 벌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전성기 떄의 그 요새 정문은 우리의 포병대가 낮과 밤도 없이 하루 정도는 꼬박 포격을 퍼부어야 흠이 날까 할 정도로 견고한 것이었겠지.
그것을 튼튼하게 지키기 위해서는 아마 더 충분한 보수가 필요했겠지만, 어디 그린스킨 야만인들이 그런 신묘한 건축술에 대해 아는 바가 있겠느냐?
문짝이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했는지 마침내 놈들이 자기들 쪽에서 문을 열고 우리를 마주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끔찍한 악취가 코끝을 찌르더군.
그 지독한 전장의 초연 사이에서도 앞을 똑바로 보고 있었지만, 얼굴을 찡그리느라 시야가 거의 가려질 정도였지.
성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내 키의 두배는 될 법한 거대한 그린스킨이었다.
잡동사니들로 몸을 대충 둘러싼 그런 흔한 놈들이 아니라,
두꺼운 철판과 사슬 쪼가리로 중무장을 하고 온갖 기상천외한 문양들이 그려진 군기를 등에 들쳐멘 중보병대였지.
덩치 역시 일반 오크들보다 절반 정도는 더 컸다. 알다시피 덩치가 큰 오크가 있다면, 그건 특별히 위험한 새끼라는 뜻이었지.
놈들의 키가 내 두 배는 되어 보인다고 했었지만, 몸무게는 다섯 배도 족히 되어 보였어.
두꺼운 철판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검푸른 색의 근육들이 놈들의 괴력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게 해 줬다.
놈들이 정예 중의 정예 부대라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았지.
놈들이 괴성을 지르며 거의 사람 몸통만한 도끼날을 내려찍자, 내 앞의 병사들이 단숨에 피떡이 되어 튕겨져 나갔다.
노련한 병사들이 창의 사거리를 바탕으로 놈의 갑옷 사이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지.
노르트란트에서 온 가장 좋은 목재로 만든 창대가 놈들이 도끼를 한번 휘두를 때마다 아녀자의 빗자루마냥 부러져 나갔다.
주무기를 잃은 병사들이 뒷열로 빠져나가는 것보다 빠르게 놈들이 다음 도끼질을 하면... 병사들이 또 죽어나갔지.
물론 우리 중대는 비겁자들의 집단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빠르게 상황을 분석할 수 있었다.
도저히 우리의 장비와 역량으로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었어.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서 등을 보일 수는 없었다.
우리가 거기서 등을 보이고 퇴각하는 순간, 우리 뒤로 빽빽하게 들어선 다음 공격 제파와 충돌하게 될 테고,
그 무질서 사이로 놈들의 정예 충격보병이 파고들거나, 성내의 예비 기병대가 들이닥치는 순간 아군 쪽에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날 것이 너무나도 뻔했거든.
아군 방진과 방진의 이동 방향이 충돌하는 것은 불과 화약이 만나는 것처럼 반드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느냐? 우리 중대는 입구에 버티고 서서 놈들과 혈전을 벌였다. 보통 죽어 나자빠지는 것은 우리 쪽이었지.
내 앞 사람들이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앞 열에 선 중대원들의 비명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아까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를 오르던 그 젊은 검병을 떠올렸다.
목에 화살이 꽂혀 죽어 버린 바로 그 검병을 말이야.
누군가는 궁금해하더군. 도대체 제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사다리에 맨 먼저 올라탈 수 있는지 말이지.
그건 자살 같은 게 아니냐고 말이야.
그래. 그건 피할 수 없는 죽음과 마주하는 일이다. 살아남을 가능성 같은 건 조금도 없어.
정답은... 나도 모른다.
그날 내가 맡은 일은 사다리에 올라타는 게 아니었지만, 공세의 가장 앞에 서는 일,
그것 역시 죽음을 각오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지.
그건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라날드든, 마난이든, 울릭이든, 지그마든,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신 누구에게든지 기도를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지.
너도 궁금하느냐? 그 용기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고? 모른다!
교묘한 전술, 완벽한 판단, 이상적인 배치. 모두 필요한 것이고, 전쟁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 모두 축복받은 재능을 가진 누군가의 작업물일 테지.
그러나 모든 진격과 후퇴 사이 어딘가에선... 항상 가장 앞에 서는 병사가 언제나 필요하다.
틀림없이 찾아올 죽음 앞에 선 그 한 명의 병사 없이는, 이 세상 어떤 전쟁도 시작되지 않는단 말이다.
전쟁은 자비로운 것이 아니고, 죽음 없이 얻을 수 있는 승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그걸 해내야만 했고, 그래서 했다.
그래. 아군이 순식간에 죽어나갔지만, 우리는 결코 와해되지 않았다.
지그마께 맹새코 대원 누구도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다 등에 난 상처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다.
그러니 좋다. 나도 그리 하리라.
그룬부르크 근교에서 덤으로 얻은 인생을 충분히 오래 더 살았다.
내가 다른 날도 아닌 바로 오늘 여기서 죽을 운명이라면, 기꺼히 그렇게 되리라!
시체가 성문 안쪽에 마구 쌓이자, 나는 전우의 시체를 토대 삼아 딛고 올라섰다.
그래서 훨씬 더 키가 큰 그린스킨 놈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근접전을 할 수 있었지.
부러진 창대 끝이 뭐라도 되는 양 놈들에게 마구 휘적대며 소리지르고 있었다.
그런 날 바라본 오크 중보병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꺾인 내 창대를 낚아채선 마구 뒤흔들었지.
놈의 무서운 근력 때문에 창대를 움켜쥔 내 몸도 꼭두각시마냥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그 상태로 팔을 마구 휘저었음에도 내가 창대를 놓지 않자 곧 싫증난 놈이 한쪽으로 팔을 내던졌고,
나는 창대와 함께 날아가 시체 뒤 바닥에 내리꽂혔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될 죽음을 기다리며 소리질렀지.
"와라 이 냄새나는 개자식들아!"
난 그저 악을 쓰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와서 내 목숨을 가져가 보란 말이다!"
바로 다음 순간이면 놈의 도끼날이 내 머리를 수박마냥 반으로 쪼개고 말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린 스킨 놈들의 등 뒤로 희고 거뭇한 무언가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시야가 막혀 있어 처음엔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피가 튀고 오크 몇 놈이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만은 똑똑히 보였지.
곧 그린 스킨 놈들이 그것과 급격하게 거리를 두면서 그게 무엇인지도 볼 수 있었어...
뭐였을 것 같으냐? 지그마 맙소사!
바로 제국에서 가장 충성스런 신수 데스클로와 그 위에 올라탄 폐하셨다.
폐하께서 데스클로를 타고 벼락과도 같이 놈들의 후방을 타격하신 거야!
그리고 그 옆을 날개 달린 말에 탄 늠름한 부대장이 호위하고 있었지.
아주 극적인 등장이셨다. 사실 폐하께선 늘 극적이셨지만 말이다.
단 두 명이 나타났을 뿐이었지만 바로 전세가 뒤집셨지. 오크 놈들이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폐하의 위용에 겁을 먹은 것과는 조금 달라 보였지.
마친 폐하의 존재 자체가 놈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것 마냥...
반대로 아군의 사기는 폐하의 등장에 바로 회복되었다.
그 순간 가장 앞에 있을 수 있었던 행운 덕분에, 연이어 일어난 폐하의 놀라운 무용을 이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먼저 주제도 모르는 오크 한 무리가 공포에 찬 괴성과 함께 동시에 데스클로 쪽으로 달려들었다.
그러자 그 영물은 날렵하기 그지없는 몸놀림으로 뒷발로 땅을 짚고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두세 놈을 대저택의 지붕만한 날개로 후려갈겨 멀리 튕겨내고선... 양 앞발로 오크 두 놈을 거머쥐어 바닥에 내리찍더군.
오크 몸뚱아리를 둘러싼 삐죽한 갑주와 도끼날째로 말이야. 그리고 그것들은 데스클로의 두꺼운 앞발 가죽에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하는 듯 보였다.
오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그 저항은 거대한 그리핀의 괴력과 체중에 비하면 너무나도 미약한 것이었다.
데스클로는 주저 없이 바닥에 눌러붙은 오크 놈들의 머리통을 칼날보다 날카로운 부리로 잡아뜯었고,
바로 척추가 붙은 째로 놈들의 머리통이 몸에서 분리되어 허공으로 날아갔다.
찰나의 순간이었어. 너무나도 눈부신 무력이었지.
그리고 비열하게도 뒤를 급습하려던 오크 한 놈은 폐하의 갈 마라즈에 골통이 맞아 투구 안에서 그 못생긴 면상이 곤죽이 되어 버렸다.
폐하께서 망치를 휘두르시자 주변에 수 줄기의 눈부신 날벼락이 내리꽂혀 대치하고 있던 오크들을 통째로 튀겨 버리더군.
성문 앞을 지키던 정예 오크들이 패주하는 것은 정말 순식간이었다.
우린 그놈들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해 거의 열 명이 목숨을 잃어야만 했는데, 폐하께서는 고작 둘이서 놈들 전체를 패주시킨 거지.
우레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고, 폐하께서 신화 속의 영웅과 같이 늠름한 자태로 폐하께서 병사들을 향해 외치셨다.
"제국은 결코 오늘 너희들의 죽음을 잊지 않으리라! 모두 돌격하라!"
그리고 나타나셨을 때와 똑같이 순식간에 다시 날아서 전장의 긴박한 곳을 향해 사라지셨어.
넋을 잃은 채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전설 속의 이야기를 직접 보고 있는 건가?
전사들의 전당에 내가 벌써 들어와 있는 건가? 어안이 벙벙했지.
멍청하게 서 있으니 우리 중대의 어깨 너머에서 누군가가 등을 툭툭 치며 앞으로 나서더군.
바로 대검병 중대였다. 아군 창검병대가 화살과 최초 접전을 받아내며 길을 열였으니 이제 그들이 나설 차례였지.
뒤돌아보니 고블린 사격대가 방어하고 있던 성곽의 일부 구획을 아군 검병대가 빼앗았고,
그곳으로 따라 올라선 석궁병들이 이제 높은 곳에서 화살 세례를 적들에게 퍼붓고 있었어.
처음의 질서정연한 모습은 전장 어디에도 없었고 각자가 각자의 적을 찾아 죽이는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검병 중대가 전열을 재정비하려는 그린스킨 놈들을 쫒아 전장의 연기 속으로 사라졌지.
여전히 여기저기에 쉴새없이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고 전과 다름없이 아비규환이었다.
그러나 그 혼돈 사이에서도 우리가 재집결할 잠깐의 시간이 있었던 것 같구나.
가까운 거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게 들렸어.
"집결! 중대 집결!"
알베르트가 크게 소리질렀다.
그는 베테랑답게 가장 또렷하고 멀리 울려퍼지는 호령을 지르는 법을 알고 있었지.
성문 주변에 밀집해 있던 우리는 바로 다시 사각 방진으로 진형을 가다듬었다.
폐하께서 단숨에 힘싸움을 뒤집어 보이셨지만, 이건 고작 성문 앞에서의 작은 승리일 뿐이었고,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끝이 아니었거든.
하지만... 우리가 다시 집결해서 짠 방진은 최초에 돌격할 때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지.
선임 병사, 부사관들이 거의 앞선 교전에서 전사한 탓에
알베르트를 제외하면 잔류 인원 중에선 내가 최고참 부사관이었다.
"이런 씨발, 너희들이 다냐? 나머지는 다 어디 갔어?"
"모두 죽었습니다. 알베르트."
"확실한가? 어디서 헤어진 것 아니고?"
"확실합니다. 그들 모두 의무를 다했습니다."
"염병할 새끼들. 지그마께서 그들을 당신의 오른편에 두시기를."
알베르트는 성문 옆에 쌓인 무더기의 시체를 바라보며 울상을 했다.
그리고 시체 사이에서 꺾여진 연대 깃발을 발견했을 때는 아주 잠깐 수치스럽다는 표정을 짓더군.
그러나 그의 감상적인 태도는 오래 가지 않았고, 그는 지휘관답게 곧 다시 표정을 관리했다.
"제군들, 힘든 건 알겠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전갈을 받아 왔다. 방어가 약한 성벽 쪽에서도 돌파에 성공한 보병대가 있다.
소총수 부대가 내성의 오른쪽으로 진입 중이고 투석기를 파괴하러 이동하고 있지만 엄호할 보병대가 부족하다.
안타깝게도 해당 위치의 창검 보병대 쪽에는 폐하께서 계시지 못하셨고, 따라서 대다수가 살아남지 못했다.
우리는 그들과 합류하기 위해 이동한다."
알베르트가 선임 부사관이 된 내게 지시를 내렸지만 내가 재고를 요청했지.
다시 말하지만 내가 겁쟁이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피해 상황이 너무 심각했거든...
"알베트르, 우리도 전멸은 아니지만 절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이 전력으로 그걸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가 아니다. 해 내야 한다."
"하지만 우린 합류해 줄 예비대가 필요합니다.
이 전력으로 우리끼리 이동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예비대 같은 건 없다. 그들도 투석기에 맞아 통째로 와해됐다.
이러는 사이에도 개별 전투 중인 부대들이 돌더미에 깔려 죽어가고 있다! 어서!"
무섭게 소리지르는 알베르트를 보며 난 그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지.
"너도 전열의 우측으로 이동해서 병사들을 인솔해라. 빨리!
중대 주목!!! 무기가 부러지거나 소실된 자는 전사자의 것을 주워 들어라!
부상자만 남기고 모두 이동한다!
거기 너, 저기 저 연대 깃발을 주워 네 창대에 묶어라!
주목!! 총원! 이동! 이동한다!"
대열 여기저기서 씨발 씨발 하는 불평이 터져나왔지만, 어느 누구도 항의하거나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다.
바로 이전 순간까지 모르의 품에 안기려던 병사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담담한 태도였지.
...이것이 군대라는 것이다. 알겠느냐?
네가 오늘 의무를 다할 수 있다면 공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소총수를 찾아 엄호하기 위해 이동했다. 우리가 그 요새의 지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 지 알아내는 방법이 있었지.
성내 우측 방향에서 사격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찾으면 됐거든.
빌어먹을 난쟁이 새끼들이 성을 얼마나 크게 만들었는지, 그들과 합류하는 데도 한참 걸어야 했지만 말이다.
이동 중인 중대의 뒤를 고블린 따위가 습격했으면 정말 위험했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가까이서 무언가 둔탁한 것이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 무질서한 총성이 들려왔다.
마침내 아군 보병대를 찾았다고 생각하고 병영 구획의 골목을 도는 순간 우리 모두 완전히 좆됐다는 것을 깨달았지.
자이언트, 키가 사십 피트는 되는 거인이 아군 소총수 부대와 마주하고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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