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돌아가기 / CROSS ROAD 링크 모음: https://gall.dcinside.com/mini/llss/345
이전 글 / CROSS ROAD 제9장: https://gall.dcinside.com/mini/llss/354
※ 역자의 능력 부족으로 인해 사투리는 모두 표준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제10장. 실연
10월. 대학은 후기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공 과목도 조금 많아지고, 두꺼운 교과서도 사고, 책장도 대학생 다워졌다. 옷장의 옷은 봄보다 4배 정도가 되었다. '무조건 모즈 코트가 어울려!'라고 주장하는 에리 씨와, '스타쟌이야 스타쟌!'이라고 밀어붙이는 코토리 씨의, 양측 모두의 의견을 받아들여 2만엔짜리 코트와 1만엔짜리 스타쟌을 사기도 했다. 송금은 집세뿐이긴 해도, 그래도 아직 저금이 점점 늘고 있어.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 옷을 사고, 술을 마시고. 주변의 학생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되었다. 그렇지만, 크로스 바이크로 통학하는 것은 상쾌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였고, 유행을 쫓지 않고 코토리 씨나 에리 씨가 권하는 음악을 듣거나 오전 1시 정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의 정보에 의지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 도쿄가 그렇게 살기 힘들지는 않구나 하는, 초봄과는 완전히 다른 감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 가을이 깊어가기 직전. 가장 지내기 좋은 계절.
"학교 축제에 가기 전에 목욕탕 가자!"
"왜 아침부터 목욕탕인건가요?"
"뭐랄까. 마신 후에는 목욕하지 않고 잠에 든단 말야. 그러면, 다음 날 아침에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이 돼서 엄청 기운 빠져. 그 상태로 아침부터 약속이 있다면 최악이잖아? 그러니까, 오늘분의 목욕을 아침에 해버리자고 생각한거야"
"말하고 싶은건 알겠는데요"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 노조미 씨와 만나서 갑자기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목욕탕을 갔다. 에리 씨나 마키 씨의 일은 차치하고, 노조미 씨의 빈틈없는 '너글너글함'이 정말 좋았다. 억지스럽고 마이페이스인 점은 카난쨩과 닮았지만, 카난쨩과 전혀 다른 점은 자신에게 향해지고 있는 마음을 확실히 눈치채고 있다는 점. 노조미 씨는 에리 씨가 아직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응석을 받아주려고 하지 않는다.
"아ー. 아침 목욕 최고야ー. 술 마시고 자고싶어ー"
"그렇네요ー. 일어난지 얼마 되진 않았지만요ー"
알몸이 되어 욕조에 몸을 담근다. 하숙집이 유닛 배스니까 엄청나게 개방감이 있다. 귀성했을 때, 치카쨩이 없더라도 치카쨩네 여관 온천에 들렀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할 정도. 역시 목욕하면 행복해지고, 돈을 모아서 화장실과 욕실이 분리된 맨션으로 이사갈까나. 그게 아니면 가까운 목욕탕을 찾아서 매일같이 다닐까나.
"요우쨩의 몸은 건강한 부분이 좋아"
"전혀 칭찬받는 기분이 아닌데요"
"음, 에로-헬시 하네. 살짝 '주물주물' 해도 돼?"
"뭐에요 그게? 그 포즈는 뭐에요!?"
색기의 덩어리 같은 노조미 씨에게 그런 말을 듣는다면 당황해 버린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오늘만 해도 골이 보이는 블라우스에, 타이트한 빨간 미니 스커트에, 솔직히 말해서 노조미 씨의 이미지와 다르다. 이렇게 둘이서 행동하는 횟수도 많아졌으니까, 물어봐도 괜찮은걸까나? 하고 생각해 물어본다.
"노조미 씨, 공격적인 옷을 좋아하는 건가요? 뭔가 의외인데요"
"나는 옷 취향같은거 없어. 어차피 나한테는 보이지도 않고"
그럼 마키 씨의 취향인가요? 라고 묻는 건 촌스러운 것이겠지. 생각하니 앞질러진다. 묻고 싶은 것을 알고 있고, 서로의 타협점 까지는 가르쳐주니 대화에 스트레스가 거의 없다. 잠자코 대화를 끝내버린다는 것은 노조미 씨가 가장 화났을 때의 반응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에리치는 내가 하늘하늘한 옷을 입길 바랐어. 에리치는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숨기려고 하니까, 자기 자신은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으면서도 내 체형은 돋보이지 않도록 하고 있던 거겠지. 하지만, 마키는 반대야. 모처럼 글래머인 몸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그 편이 그걸 독점할 수 있는 자신도 우월감을 가질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애같긴 하지만 말이지"
"저는 아마도 에리 씨에 가까운거 같아요"
현기증이 날 것 같아 욕조에 걸터 앉는다. 꽤나 뜨거운 욕탕이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니 노조미 씨는 후훗 하고 웃었다. 나 같은게 뭔갈 숨겨도 소용 없을 것 같다. 도량이 넓다 해야할까, 다양한 방면에 예민하지만 너글너글한 사람이다. 그런 만큼, 이런 사람을 놓쳐 되찾을 수 없게 된 에리 씨에게도, 상처받으며 남자들 사이를 표류하던 노조미 씨에게도, 어느쪽에도 동정해버리고 만다.
"저기, 요우쨩? 마키가 싫지?"
"싫다, 라고 할 정도로 잘 알진 못하지만, 솔직히 거북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그러면, 오늘 조금이라도 마키를 좋아하게 만들면 좋으려나"
"무슨 말인가요?"
물어보았지만 그 이상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오늘'. 나와 노조미 씨는 지금부터 K대의 학교 축제에 간다. 강당에서 마키 씨가 소속해있는 피아노 서클의 콘서트가 있다는 듯 하다. 하지만, 노조미 씨는 클래식이라든가 피아노로 연주하는 그런 음악을 전혀 모르니까 같이 가줬으면 좋겠다고 부탁받았다. 리코쨩도 초대할까 라고 생각했다가, 역시 한순간에 '그런 건 있을 수 없어'라고 포기했다.
목욕탕을 나서 마키 씨의 대학을 향한다.
마키 씨가 거북하다고 이야기하면서 피아노를 들으러 가버릴 때 쯤, 스스로가 휩쓸리기 쉽구나 하고 생각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좋은 녀석'이라고 자주 들었다. 하지만, 아마 사실은 다를거다. 어찌해도 싫은 것 이외에는 이유를 대며 거절하기보다 받아들이는 편이 편하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리고, 요령이 좋은 나에게는 '어찌해도 싫어'라며 거절하고 싶어지는 분야 같은게 제로라 해도 좋을 정도로 없었다. 그러니까 소위 불량행위라 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일에 협력해 줬다.
"점심 1시부터 저녁 5시까지, 다들 30분 정도씩 하는구나"
"30분이면 몇 곡 정도인가요?"
"글쎄, 다양하지 않을까? 마키의 순서는 마지막이야"
"헤에, 토리(トリ)*네요"
* '공연이나 무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
5학년이니까. 전차의 손잡이를 잡고 노조미 씨는 조금 먼 눈을 했다. 사회인 3년차인 노조미 씨와 의학부 5학년인 마키 씨. 머지않아 부모님이 경영하는 종합 병원을 잇게 되는 마키 씨와 언제까지 함께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걸지도 모른다. 라니. 아직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 봤자 의미는 없다. 하지만, 마음을 읽으려 하지도 않는단 건 흥미가 없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한다.
소중한 사람이기에 오히려, 마음을 읽고 서로의 기분을 존중하면서 코토리 씨와 그 주변 사람들의 복잡한 관계가 형성된 것일지도 모른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쓸데없는 자제만 가득해서 짜증이 나지만, 그게 '나쁜' 상태라고 단순히 이야기할 수 있는게 아니란건 알게 되었다.
………
"축제는 포장마차에서 맥주잖아?"
"노조미 씨는 엄청나게 아저씨네요? 아버지랑 있는 기분인데요"
둘 다 피아노를 잘 알지 못하니까, 그렇다기보다 아예 모르니까, 도착해 잠시 동안은 캠퍼스를 어슬렁거리기로 의견을 모았다. 룰렛 타코야끼를 먹거나, 벤치에 앉아 생맥주를 마시거나, 강의실에서 하는 문화계 서클의 전시를 보거나, 점집 같은 곳을 썰렁하게 만들거나 (노조미 씨의 점 관련 지식이 너무 깊어서 살짝 깨거나), 미인 대회를 하고 있었으니까 구경하거나. 마키 씨의 순서가 가까워질 때까지 일반 손님으로 학교 축제를 만끽하고 있었다.
"좋ー아, 슬슬 가볼까!"
오후 4시를 넘은 시각. 발을 맞추어 우리 대학과 비슷할 정도로 오래된 강당에 들어섰다. 강당 같은건 입학식이랑 졸업식 정도밖에 쓸모가 없는 것 같고, 이런 어중간한 시기에 발을 들이는 것은 희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활짝 열려 있는 중후한 문을 빠져 나오면 이전 연주자인 듯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온다.
긴 책상에 흰 천을 씌운 접수처에 티켓을 보여준다. 원래는 500엔이지만, 마키 씨가 노조미 씨에게 선물한 것이라 돈은 들지 않았다. 콘서트 자체는 종반에 들어섰기에 피아노 서클의 부원인 듯 고상한 얼굴의 여자 아이는 '이제서야 온건가'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시선을 향해 왔다.
안에 들어서자 마침 바로 전 사람의 연주가 끝난 시점이었다. 5분 휴식이 있는 것 같아 그 사이에 비어있는 자리를 확보하기로 했다. 전부 보는데는 4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개중에는 우리처럼 아는 사람의 연주만 들으러 온 사람도 있어서 앞쪽에도 드문드문 빈 자리가 있었다. 비교적 잘 보이는 자리를 골라 둘이서 쿵 하고 시트를 넘어트리며 털썩 앉았다.
머지않아 불이 꺼진다. 무대에만 빛이 비쳐진다.
문득 스쿨 아이돌을 했던 시기를 떠올린다. 이런 식으로 무대에서 빛과 성원을 받으며 반짝반짝 빛나고 있던 것을 실감할 수 있어서, 그것은, 응, 굉장히 귀중하고 희소한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을 똑같이 경험한 사람들과 지금 이렇게 시간을 같이 하고 있다. 5년이나 앞서 걷던 사람들과 마치 교차로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만날 수 있었다.
마키 씨가 무대에 나타난다. 많은 사람 앞에서 연주하는 것에 익숙한지 유유히 걸어온다. 리코쨩이 동경하는 선생님이면서, 나에게는 일방적인 라이벌이고, 노조미 씨에게는 리얼한 연인인 사람. 빛을 받아 붉은색이 감도는 머리. 몸의 라인을 신비할 정도로 떠오르게 하는 새하얀 드레스. 'Little Cage'에서 취해 리코쨩의 엉덩이를 만지던 사람과는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늘의 마키는 훨씬 예쁘네"
"그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솔직히 할 수 있는게 부러워요"
"될 수 있는 한 전하는게 좋아. 지금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마음에 담아둘게요"
박수가 울려 퍼지고, 나와 노조미 씨도 박수를 친다. 한번 깊게 인사하고 마키 씨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온다. 마치 라이브의 시작, 가장 첫 곡의 인트로가 시작되기 일보 직전처럼.
퐁.
하나의 높은 소리가 난 후, 마키 씨가 생명을 불어넣은 멜로디가 천천히 강당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말하자면, 귀에 들려온 곡 같은 건 전혀 알 수 없었다. 접수처에서 받은 팜플랫을 보면 제목 정도는 써 있을텐데, 이 피아노가 음대생 리코쨩보다 나은지 어떤지 따위는 판단할 방법이 없었다. 리코쨩도 이런 분위기의 무대에서 연주한다면 마키 씨와 비슷할 정도로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5분, 10분.
옆자리를 보니, 노조미 씨는 눈을 감고 무릎 위에 깍지를 끼고 거의 잠든 것 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마키 씨가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은 틀림없지만, 무엇을 잘하는 지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은 채였다. 눈을 감고 노조미 씨와 비슷한 자세를 하곤 감성에 맡겨 보았다. 하지만, 다양한 아름다움을 갖춘 멜로디가 울려퍼질 뿐, 마음을 두드린다고 하는 다이나믹한 반응에는 거리가 멀었다.
15분. 20분. 역시 눈을 뜨고 무대를 바라본다.
마키 씨는 하얀 드레스를 빛내고, 빨간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정감 풍부하게 연주를 계속한다. 격렬한 곡도 슬픈 곡도 있어서 곡조에 맞추어 다이나믹하게 연주하거나 차분히 연주하거나 하고 있다. 하나의 테마성을 가진 선곡일 것이라고 귀를 통해 이해했다. 그럼에도 소리만으로 감동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마키 씨를 좋게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
흐트러짐도 막힘도 없이 선율은 흐르듯 이어진다. 무대에 가까운 자리여서 마키 씨의 표정이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는 것조차 알아볼 수 있다.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것으로 마음을 밝히고 있는데, 사용하는 '말'이 다르기에 이해할 수 없어서 더빙도 자막도 없는 서양 영화를 보는거 같아 왠지 자신쪽이 답답해진다.
문득, 방금 전 노조미 씨의 말을 떠올렸다. '조금이라도 마키를 좋아하게 만들면'. 노조미 씨는 내가 마키 씨를 거북해하는 것을, 그렇다기보다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런 말을 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학교 축제에 나를 초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키 씨는 계속 내가 들을 수 없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이대로는 노조미 씨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30분. 마지막 곡이 끝난다.
마키 씨가 큰 박수에 화답하고 일어선다. 결국, '잘하는 연주였다'는 것 이상의 감상은 생기지 않았다. 잘하는지 아닌지는, 정말 잘 치는 피아노 같은 걸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단언할 수 없다. 그러니까, '듣기 좋은 소리들이 이어지는걸 들어서 좋았다' 정도의 표현이 가장 가까웠다.
공연 마지막을 담당한 그녀가 그대로 관객에게 인사를 하기로 되어 있는 듯, 부장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무대 끝에서 종종걸음으로 나타나 드레스를 입은 마키 씨에게 핸드 마이크를 건네 주었다. 무대의 앞쪽 중앙에 서서 마키 씨는 살짝 홍조를 띈 얼굴로 다시 인사를 했다. 몇몇의 박수가 후드득 하고 솟아 올랐다.
'오늘은 저희 연주를 보러 와주셔서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무대에 서 있는 것은 'Little Cage'에서 나를 폭발시켰던 마키 씨와는 다른 사람 같았지만, 대본을 읽는 듯한 그 잊을 수 없는 어조는 영락없는 그녀의 것이었다.
'저의 서클 "Piano Sick"은 의학부의 강의나 실습의 사이를 이용해 각자가 집이나 음악실에서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sick"은 물론 "병"이라는 의미지만, 슬랭으로는 "멋있는, 쿨한"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마키 씨는 서클의 소개를 한다. 그리고 오늘의 연주자를 순서대로 무대에 불러 그녀들의 프로필을 소개한다. '어째서'. 그것들을 들으면서 내 마음은 물음표로 채워져 간다. 머리 회전도 뛰어날텐데, 어째서 '기억하고 있는 대사'를 읽는 듯한 톤으로 말하는 것일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어째서 그렇게 억양 없는 말로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럼 계속해서 저희 학교 축제를 즐겨 주십시오. 오늘은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이쪽에서 많은 박수가 터져 나온다. 마키 씨와 그에 앞서 연주했던 후배들이 다같이 고개를 숙인다. 강당 전체가 밝아져 출구에 가까운 사람부터 질서정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예정대로 오후 5시였다. 일어서려던 나는, 그렇지만, 노조미 씨가 일어나지 않았기에 다시 의자에 앉았다.
"저기, 들었지?"
"네"
노조미 씨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저기. 들었지. 10글자도 되지 않는데, 방금 3분정도 무대에서 이야기하고 있던 마키 씨보다도 거기에는 몇배나 마음이 담겨 있고 감정으로 넘치고 있었다. 다만, 그 감정의 정체까지는 알지 못해서, 그래서 '네'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걸 듣고 노조미 씨가 계속한다.
"마키는 말야, 스스로의 기분을 말에 잘 실을 수 없어. 기쁠 때도, 슬플 때도, 화났을 때도. 목소리를 크게 하거나 작게 하거나,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는 건 할 수 있지만, 억양을 사용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무척이나 서툴러. 단순히 서투른 것 뿐인지, 거기에 이름이 붙는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가요. 묻고서 강당을 둘러보았다. 관객은 거의 떠나 있었다.
"외동이고, 친구도 없고, 집에 있는 것은 너무 눈치가 빠른 가정부 뿐이었어. 스스로의 의사를 어필한다는 것을 거의 해오지 않았던 탓일지도 몰라. 그거까지는 모르지? 하지만, 마키가 감정이라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피아노를 연주할 때 뿐이었어. 물론 곡의 기분이 곧 마키의 기분은 아니야. 그렇지만, 마키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파트너였어"
"마키 씨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고, 그치만, 부모님이 그 꿈을 끊어버렸다고 들었어요"
그렇네. 노조미 씨는 쓸쓸한 목소리로 계속했다.
"그 말대로야. 마키에게 있어서는. 피아노는 이제, 현실이 아니야"
노조미 씨의 강한 말에 깜짝 놀랐다. '현실이 아니야'. 노조미 씨는 확실히 말했다. '마키 씨' 에게 있어서, 피아노가 현실이 아니라고. 그런거구나. 피아노를 준 부모의 손이, 피아노와 다가갈 수 있는 현실을 빼앗아 버렸어. 그러니까,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소중한 취미중에 하나임은 분명하지만, 중학교 시절에 그랬던 것과 같은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잃고 있다.
"마키 자신도 말했어. 더 이상, 피아노가 예전처럼은 대답해주지 않는다고"
"대답해 주지 않는다? 인가요?"
"결국은 피아노와 대화할 수 없게 되었다고. 내 피아노는 완전히 끝났다고"
끝나버리고 말았다는 실감은 마키 씨에게 있어서 절망이었을 것이다. 단 하나 감정을 교류할 수 있던 상대에게 외면당했으니까. 노조미 씨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상냥한 노조미 씨는 피아노를 대신하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마키는 의사가 될 수밖에 없어. 아버지의 등을 쫓아 뛰어난 외과의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게 마키에게 주어진 현실이야. 하지만 말야, 실습지의 대학 병원에서는 이미 환자들로부터 '말투가 차갑다', '설명이 기계적이라 싫다', '눈매가 나쁘다'라며 심한 클레임을 받고 있어. 일부러가 아닌데 말이지. 우는 소리는 하지 않지만, 만날 때마다 푸념은 끊이질 않아. 저기 말야, 난 말야, 요우쨩에게 말이지, 마키를 동정해달라고 하는건 아니란다?"
알고 있어요. 마음으로 답하면서 진심으로 대답했다.
코토리 씨나 에리 씨가 '알고 있는' 것을, 나에게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일 거라고 금방 알았으니까. 에리 씨는 그렇게나 마키 씨에게 미움받고 있는데도 자신을 '보호자'라고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모두가 연애적인 다툼과는 다른 차원에서 그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멋대로이고 건방져서, 하지만, 절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 '여동생' 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마키 씨라는 사람은 대단한 재능의 소유자면서 무척이나 결점도 많은 사람으로, 퍼즐로 말하자면 엄청나게 삐뚤어진 조각이고, 그러니까, 내가 잘난 듯이 말할 건 아니지만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저기, 딱 한가지만 마키의 비밀을 알려줄텐데, 본인한텐 비밀이야"
"뭐에요 그게?"
"이건 마키에 관한 톱 오브 톱 시크릿이라구?"
"떨리잖아요"
노조미 씨는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대고, 그리고, 고향의 바다만큼이나 깊은 눈으로 이런 말을 했다.
"있지, 마키는 23살이 된 지금도 산타를 믿고 있어"
그건 안경이 흘러내릴 정도로 의외인 정보라, 그래서, 내 안에 쌓이고 쌓여 있던 마키 씨에 대한 편견이나 독기 같은 것은 연애적인 질투를 제외하면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치만, '산타'를 진짜로 믿고 있는 사람을 정말로 미워하거나 싫어할 수는 없잖아?
………
오후 8시.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카페바 'Little Cage'의 소파석에서, 우리는 '4명'이서 술을 마시고 있다. 마주한 오렌지색 소파의, 창가쪽에 노조미 씨와 마키 씨가 앉아 있다. 그리고 홀 쪽에 나와 리코쨩이 앉아 있다. 배가 고프기도 해서 우리 앞에는 저마다 파스타 접시가 놓여 있다. 나와 마키 씨의 주문은 나폴리탄으로 같았고, 노조미 씨는 낫토 파스타에 리코쨩은 까르보나라였다.
노조미 씨와 둘이서였던 술 약속이 4명이 되어 있었다.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이런 전개를 예측할 수 없던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어쩐지 머릿속에서 제외하고 있던 것은 확실했다.
'서클의 뒷풀이는 다음주기도 하고, 밥 먹으러 가지 않을래?'
6시를 넘은 시각. 노조미 씨에게 마키 씨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노조미 씨는 내 의향을 확인해 왔다. 그렇게나 마키 씨에 대한 마음을 들었기에 조금 사양한다고 말할 수 없었고, 실제로 싫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서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정리 좀 도울테니까 먼저 가'. 노조미 씨에게 마키 씨의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나와 노조미 씨는 먼저 'Little Cage'의 소파에서 술을 마시고 있기로 했다.
그랬더니 마키 씨가 리코쨩을 데리고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
처음에 힐끗 돌아 보았더니, 코토리 씨는 불안한 듯한 얼굴로 주방에서 엿보고 있었다. 에리 씨는 이쪽을 보지 않도록 하면서 카운터 손님과의 이야기로 도망치는 듯 했다.
전에도 어딘가에서 이야기했지만, 코토리 씨의 어머니가 고른 이탈리아 가구 메이커의 소파로 2인용 소파 두 개와 테이블 합쳐서 50만 이상이라는 듯 하다. 그런 여담으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이 4명이 모였을 때의 분위기는, 호화롭다고 할까 폭풍전야라 해야할까 '샤이니*'한 느낌이었다.
* 마리의 '그' 요리
"역시 선생님은 학생 서클에 들어가면 격이 다르네요"
자리에 앉은 이후로는 80% 정도 리코쨩이 이야기하고 있다. 언제나의 화이트 와인 글라스를 한 손에 들고 나와 노조미 씨 같은 건 존재조차 보이지 않게 된 것처럼 방금 전 콘서트의 감상을 계속 말하고 있다. 얼굴이 붉게 된 것은 이미 3잔째 마시고 있는 와인 때문만은 아니다. 리코쨩에게 있어서 동경하는 '선생님'의 피아노를 제대로 들을 수 있던 것은 오랜만이었을 테니까.
"그 부분은 제가 연주하면 아무리 해도 달달하다고 해야 할까, 께느른한 느낌이 되는데, 선생님이 연주하면 같은 분위기를 떠올려도 청량감이 있고 전혀 느낌이 달라지거든요"
작곡가 이름 쯤은 간신히 들어본적이 있다고 해도, '몇 번의 몇 악장' 이라든가 암호인데다가, '색채'니 '환상'이니 전혀 공감할 수 없고, '프레이징'이나 '페달링'이라든가 의미를 알 수 없고, 요컨대 내가 콘서트 중에 이해할 수 없던 '말'로 리코쨩은 계속 이야기한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마키 씨는 그것에 대해서 '그렇네'라고, 억양 없는 말투로 대답하고 있다. 노조미 씨의 이야기를 들은 후라서 '기뻐하고 있는 걸지도'라는 호의적인 추측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론 단순히 기뻐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도 같은 정도로 생긴다. 나쁘게 말하자면 '꼬맹이'인 마키 씨가 자신이 걷지 못한 '음대에서 피아노'라는 길을 걷고 있는 리코쨩의 칭찬을, 과연 솔직하게 들을 수 있을까.
오히려 시간 문제로 자신을 앞질러가는 '리얼한 피아니스트'의 찬사라니, 사적인 메일이 너무 많다는 것 따위보다도 훨씬 더 귀찮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리코쨩의 필사적인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말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품고 있던 길고 긴 짝사랑이 이미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슬프게 생각해 버렸다. 노조미 씨는 이미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리코쨩의 마키 씨에 대한 열렬한 연심을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마음 속이 술렁거린다. 노조미 씨는 상냥하기만 한 사람이 아니다. 에리 씨의 가게에 다니면서, 에리 씨를 가족처럼 생각하면서, 에리 씨를 결코 응석부리지 않게 하는 엄격함도 가지고 있다. 그런 노조미 씨가 리코쨩의 첫사랑에 어떤 심판을 내릴지, 그걸 받은 리코쨩이 어떻게 되어버릴지, 걱정으로 두려워서 견딜 수 없게 된다.
9시 반 즈음.
4명의 대화가 어딘지 모르게 정체되었을 때, 마키 씨가 옆의 노조미 씨를 취한 눈으로 응시했다. 스스로가 악인이 되려 하지 않는 것도 마키 씨의 어린애같은 교활함일지도 모른다. 혹은, 마키 씨가 리코쨩의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든가, 어느 쪽인가에 틀림없다.
"마키. 슬슬 갈까? 자고 갈거지?"
노조미 씨가 토트백을 한 손에 들고 일어섰다. '마키'. '자고'. 특유의 변화구를 던지지 않고 리코쨩의 연심을 똑바른 강속구로 무너뜨렸다. 마키 씨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그럼, 먼저 실례할게'라고, 나와 리코쨩을 향해 평소의 말투로 인사를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일도 아닌데 무심코 대답해버린 나는 가능한 자연스러운 태도로 옆의 리코쨩을 보았다. 리코쨩은 와인잔을 든 채 먼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눈 앞에서 일어난 일의 의미를 작은 머리가 소화하지 못한 듯 했다.
"여긴 사줄테니까. 천천히 있다가 가"
마키 씨가 지갑을 꺼내고, 분명히 너무 많은 2만엔을 놓고 갔다. 지갑을 가방에 넣고 나서, 마키 씨는 노조미 씨의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그걸 보고 방금 전의 예상은 '후자'라고 확신해 버렸다. 그래. 마키 씨는 리코쨩의 연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놀리면 재밌는 반응을 보이는 옛날의 제자 쯤으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무것도 아니다.
요컨대, 리코쨩의 짝사랑은 코토리 씨나 에리 씨의 그것과는 다르게 상대가 눈치채지조차 못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나는 그런 리코쨩에게 아주 새로운 공감 같은 것을 느껴 버렸다.
"잘 먹었어. 또 올게"
"고마워, 노조미, 마키. 다음에 봐. 잘자"
카운터의 에리 씨에게 말을 걸고, 노조미 씨는 마키 씨와 같이 'Little Cage'를 나갔다. 종소리가 딸랑딸랑 하고, 평소보다 길게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옆을 보니 리코쨩의 잔은 비어 있고, 음료 메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홀의 하나요 씨를 부르고, '화이트 와인을'이라고,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스러질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글라스 와인을 가져온 하나요 씨에게 '테이블로 옮기는 편이 좋을까요?'라고 물어보았다. 둘이 되었으니 4인용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좋지 않을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랬더니 붐비지 않으니까 괜찮다고 해서, 그래서,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은 채로 카운터 쪽에 등을 돌린 채 리코쨩이 잔을 기울이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보 취급하지마. 선생님이, 선생님이 나를, 제멋대로인 꼬맹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상대해주지 않았던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연애의 대상이라든가, 그런게 아니란 거, 응, 알고 있었으니까. 딱히,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까"
젠체하며 와인 잔의 기둥을 들고 있었는데, 리코쨩은 지금, 잔의 옆구리를 쥐는 듯이 하곤 마시고 있다. 마키 씨와 이야기하고 있을 때부터 긴장과 초조함의 탓인지 꽤 빠른 속도로 마시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얼굴로 화이트 와인을 계속해 마시는 리코쨩을 오기로라도 말려야 할지, 어울려 자신도 같이 마셔야 할지, 진정하고 지켜봐야 할지, 그것조차 알지 못한 채 시간만이 흘러간다.
"알고 있었으니까. 선생님한테 연인이 있다는 것 정도는"
요 전에, '몰라'라고 했었잖아. 물론 그런 말은 하지 못하고 깎여버린 자존심을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리코쨩을 바라본다. 나까지 취해 치명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가벼운 칵테일을 주문하며 귀를 기울인다. 리코쨩의 잔은 금세 비워져 버린다. 이제 멈춰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 멈추는 것 조차 그녀의 도화선에 불을 붙여버릴 것 같아서 겁쟁이인 나는 바라볼 수밖에 없다.
"우치우라 같은 곳에, 그런 시골에 가지 않았다면,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 가정교사로 수업을 해주기로 했을텐데. 그러면, 달랐을지도, 모르는데"
그건 아니잖아!라고, 소리칠 뻔해서 참는다. 치켜 올라간 눈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마침내 잔을 손에 든 채 흐느껴 울기 시작한 리코쨩에게 할 말조차 찾지 못해서 무력하게 테이블 밑의 불끈 쥔 주먹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등에 툭 하고 손이 닿아 돌아봤다.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열심히 생각하도록 해. 정답 같은 건 처음부터, 없어"
에리 씨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계속되고 있는 짝사랑의 파탄에 대해서, 고등학교 2학년에 알게 된 자신이 무얼 해줄 수 있는가. 정답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아. 굳이 이야기하자면, 열심히 생각해 주는 것이 정답이라고, 푸른 눈으로 격려하는 듯이 바라봐 주었다.
"계산해 주세요. 거스름돈은 필요 없어요"
"알았어. 마키가 왔을 때 뭔가 서비스 해줄테니까"
에리 씨에게 테이블의 2만엔을 억지로 건넸다. 리코쨩은 자포자기 한 듯이 마지막 와인을 다 마셔버렸다. 코토리 씨가 페트병에 담긴 물을 건네 주었기 때문에 그걸 가방에 넣고 리코쨩에게 말을 걸었다. '가자'라고 말하니 처음만은 조용히 따라왔다. 하지만, 딸랑 딸랑 하는 소리를 내며 'Little Cage'를 나온 뒤로는 나에게 있어서 인생 최악으로 곤란한 귀갓길이 되었다.
………
"리코쨩, 너무 마셨으니까, 가까우니까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리코쨩은 가게를 나올 때부터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처음으로 손을 잡아서 기쁘다!라고 단순하게 기뻐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릴 적의 '시이타케'와 산책하는 것 같았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고 비틀비틀 휘청이며 걷거나, 갑자기 길가에 떨어져 있는 커피 캔을 걷어차려 하거나, 도저히 여자 혼자서는 컨트롤 할 수 없었다.
그래도, 간신히 부모님에게만은 '친구네 하숙집에서 자고 간다'고 메일을 보내게 했다. 그러곤 팔짱을 꼭 끼고 잡아당기듯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가게에서 멀어지면서 알코올이 독으로 변해버린 듯이, 리코쨩은 마냥 감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마키 씨도 이정도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은 것을 느긋하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그 때는 아직 있었다.
"뭐야? 그 아줌마의 모습은. 그런 딱 달라붙는 옷, 어머니의 젊은 시절에 유행했던 거 아냐? 가슴에 영양을 뺏겨서 머리 나쁜거 아냐? 저기, 요우쨩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건 마키 씨의 취향인데.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어서, 노조미 씨에겐 미안하지만 '그렇네'라고 동의할 수 밖에 없다. 거기서 출발해서, 내 팔에 매달린 채 10분 정도 노조미 씨의 험담을 늘어 놓았고, 차마 들을 순 없었지만 자고 가라 말했기 때문에 두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저기, 피아노의 '피' 조차 모르는 사람의 어디가 좋은거야?"
"그런건 모른다니까"
마키 씨는 더 이상 피아니스트가 아니니까. 취미에 대한 공감을 연인에게 구하지 않으니까. 노조미 씨는 정말로 마음이 넓고 상냥한 사람이니까. 정답은 어느 것이든 리코쨩에게는 말할 수 없었기에 적당히 동의하면서, 적당히 무지한 척 발만을 앞으로 내딛는다. 기대오거나 잡아당기듯이 멀어져가거나 하며,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 주지 않는다. 큰 길에 접하고 있어 그렇게까지 위험한 밤길은 아니지만, 역시 10시가 지나면 불안하니까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요우쨩, 기분 나빠"
"엣? 내가!?"
느닷없이 말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있는 힘껏 팔을 뿌리치고 나무에 기대어 뿌리 근처에 토해버린다. 마키 씨의 콘서트니까 신경써서 신었을 터인 멋진 펌프스마저 더럽혀진다. 콜록콜록 하고 애처로운 기침을 반복하고, '이제 싫어'라고 말하며 창백한 얼굴로 돌아보고. 그러자 슬프게도 하얀 블라우스에까지 토한 조각이 점점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물, 마셔"
"좋겠네, 냉정해서. 요우쨩은 어언제나 냉정해서 좋겠네"
"그런게 아니니까"
"요우우쨩은 내애앵저어엉해서 좋겠네요ーー!!!!"
심야에 큰 소리를 지르기에 초조해진다. '조용히 해줘'라고 야단치고 싶어져서 참는다. 그랬다가는 악화시킬 것 같으니까. 내가 느긋한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건 사람과 깊게 관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란걸 실감하고 있었다. 느긋한게 아니라, 상대를 '아무래도 좋아'라고 생각되는 레벨 정도로밖에 사귀어오지 않았단 것을, 이런 밤길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몰상식을 못 본체 할 수 없고, 소중히 하고 싶은 상대이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다면 바로잡고 싶어지고, 좋아하는 상대이기 때문에 욕을 듣는다면 정말로 열받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일방적으로 사랑에 빠진 을의 입장이기에 하나도 실행하지 못한 채 휘둘리고 있다.
"알았으니까. 물 좀 마셔"
리코쨩이 입을 헹구고 내뱉는다. 서로 뒤엉키듯이 조금 전진하다가 다시 생각난 듯이 얽힌다. 리코쨩의 적의가 '세계 전체'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럼에도 '세계가 만약 와타나베 요우 혼자만의 마을이었다면?' 상태로, 다시 말해 리코쨩의 공격을 받을 인간이 나밖에 없어서 단 하나 매달린 적당한 샌드백이 되어 버린다.
"좋겠네. 요우쨩은, 모두가 좋아해줘서. 저기 저기, 내가 말야ー, '러브라이브!'의 지구 예선 때, 도쿄에서 전화했던적이 있잖아ー? 그 때 말야ー, 치카쨩 이외에 아ー무도 나랑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았지!? 그러고보니, 요우쨩마저도 대화해주지 않았지ー!?"
"엣? 무슨 말? 언제적 얘기를 하는거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미움받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거 뿐이야"
"그런게 아니니까"
이번에는 가드레일을 붙잡고 반쯤 열린 눈으로 트집을 잡아온다. 아니나다를까, 감색의 품위있는 스커트가 금세 하얗게 더러워져 버린다. 이렇게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처음으로, 경험한 적이 없는 일에 둘러싸여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니 무척이나 다루기 힘든데, 의지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에리 씨가 말했던 '열심히 생각하도록 해'를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리코쨩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떻게 그녀를 데리고 평온하게 하숙집으로 돌아가는가 하는 단 한가지 뿐으로, 그 의미에서는 아직 에리 씨의 말을 실행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요우쨩은 듣기 좋은 말만 하고, 겉으로만 사이 좋은 듯이 가장해서 싫어"
"그럴지도. 모두가 싫어하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몰라"
"하!? 뭐야 그게!? 싸움 거는거야!? 어!?"
귀찮아서 적당히 대답하자 왠지 거기만 제대로 듣고 큰 목소리로 화를 낸다. 때려 눕히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나지만,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미안해'라고 사과하고 다시 조금씩 끌고 간다. 아까처럼 팔짱을 끼려고 하다가 소리가 울릴 정도로 세게 맞는다. 그런데도 발을 재촉해 놓고 가면 몹시 싫은 듯한 얼굴로 비틀비틀 쫓아 온다. 드디어 하숙집인 7층짜리 맨션이 보인다.
"3층이니까 엘레베이터 탈거야"
"요우쨩은 사랑 같은 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편해 보이네"
"엘리베이터 왔으니까. 타자"
"누군가를 바보처럼 좋아한다든가 말야. 그럴거 같지 않네"
엘리베이터에 올라 탔다. 3층 버튼을 누르고 리코쨩을 바라봤다. 입을 삐죽 내밀고 속으로 토라져 있는 리코쨩에게 '좋아해'라고 말한다면, 분명 경멸을 받을 거다. 그뿐 아니라 진짜로 화나게 할거다. 따귀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니, 역시 안타까우니까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는 것은 나도 취해 있는 탓일까.
"좋아하는 사람 정도는 있으니까"
"헤에, 처음 들어. 그게 누구야?"
"안 알려줘"
"거짓말쟁이. 남들 같아 보이고 싶을 뿐인 '가면 인간'인 주제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제멋대로 이야기하는 걸 들으며 간신히 방에 도착했다. 믿기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혼자라면 걸어서 10분이 채 안되는 길을 무려 1시간 가까이 걸려서 왔다. 억지로 밀어 넣듯이 원룸에 들어선 순간, 리코쨩은 내 침대를 발견하고 비틀비틀 쓰러져버렸다. 더러워진 옷 같은 걸 갈아입어줬으면 했지만 이미 늦었다. 옆으로 돌아 눕고 와인 색의 머리카락을 부채처럼 펼친 채 새근새근 하고 숨소리를 내며 자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 정도는, 진짜로 있다니까"
간신히 진정된 우윳빛 옆얼굴에 말을 걸었다.
"바보처럼 좋아하는 사람, 있다니까"
방금 전까지 때려 눕히고 싶던 볼에, 지금은 키스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이런 식으로 행패를 부리면 정나미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역시 좋아하니까, 그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잠들어버린 리코쨩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잠옷 대신으로 하고 있는 저지로 갈아입었다. 손님용 이불 같은건 갖고 있지 않으니까, 방석을 나란히 두고 쿠션을 베개로 쓰고 여름용 이불을 덮고, 조금 춥지만 바닥에서 자기로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집에 왔을 때의 추억은?' 이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조금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
다음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처음으로 보인 것은 리코쨩이었다. 그 순간만은 무척이나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어젯밤의 여러 일들이 다시 떠올랐다. 리코쨩은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좌하고 있었다. 여름용 이불을 덮고 잤을 텐데, 지금은 제대로 이불을 덮고 있다. 리코쨩은 블라우스를 조금 더럽힌 채, 내가 '좋은 아침'이라고 말하기보다 빠르게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민폐, 였지?"
그걸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거야? 라고, 술의 힘에 놀랐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민폐였어'라고 책망하는 것은 역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냐'라고 몸을 일으키면서 대답했다. 바닥에 깐 방석의 잠자리가 불편해서 등과 허리가 딱딱해져 있다.
"저기 말야, 심한 말 했었어?"
"안했으니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아직 걱정스러운 듯한 리코쨩을 안심시키고 싶었는데, 요령 좋음이 특징인 나이면서도 단 둘이 누군가와 마주한 경험이 너무 없어서, 전체적인 균형은 잡을 수 있어도 1 대 1의 미묘한 균형을 잡는 법은 몰랐다.
"침대도 점령해버려서, 미안해. 돌아갈게"
"샤워 하고 가. 목욕 타월 써도 되고, 드라이어도 거기 있으니까"
리코쨩은 정말로 미안한 듯 했다. 아마 이렇게 취한 것이 처음이라, 무엇을 말했는지도, 어떻게 이 방에 왔는지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무서워 하는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말야, 지금 여기 있는 와타나베 요우가, 혹시 타카미 치카였다면, 리코쨩은 이렇게까지 겁먹지 않았을 거다. 자신이 가진 카드를 전부 꺼내 놓는 치카쨩과 조금씩 밖에 보여줄 수 없는 나는 전혀 다른 타입의 인간이니까. 내가 리코쨩을 잘 모르듯이 리코쨩도 나를 거의 모르니까.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서 무서운거라고 생각한다.
"같이 힘내왔던 동료니까, 사양하지 않아도 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서둘러야 하는게 아니라면 샤워하고 편히 있다 가. 편히 있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주방에서 보리차를 따라 리코쨩에게 건네줬다. 리코쨩은 그걸 마시고,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얼굴을 하더니, 그래도 역시 몸이나 머리카락이 신경쓰이는건지 '그럼, 신세좀 질게'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새 목욕 타월을 준비해서 리코쨩을 샤워실로 안내하려는데 거기서 문득 떠올렸다. 이 방에는 탈의 공간이 없어서 언제나 방에서 옷을 벗고 나서 샤워를 하고 있다는 것을.
"편의점에서 숙취에 좋은 음료라도 사올게"
리코쨩이 '역시 돌아갈게' 라고 말하기 전에 방을 나가기로 했다. 우윳빛 뺨을 약간 창백하게 하고 있는 리코쨩에게, 큰 스포츠 타올을 건네 주었다. 온수 스위치도 켜 두었다. 욕실에 있는 샤워젤 같은 것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좋다고, 쓸데없는 말까지 하고 열쇠를 채우고 방을 뛰쳐 나왔다. 이걸로 일단 리코쨩이 마음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든가, 바보같은 계산도 조금쯤은 하면서.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편의점에서 영양 음료와 칫솔을 하나 샀다. 잡지를 몇 개 서서 읽고, 30분 정도 버티며 시간을 때우고 맨션의 계단을 뛰어 올라 방으로 돌아왔다. 원룸의 방은 목욕 후의 냄새가 배어 있고, 그 가게에서 큰마음 먹고 산 샤워 젤의 향기도 섞여 있고, 리코쨩은 와인색의 머리카락까지 제대로 말린 모습으로 방석에 앉아 있었다.
"맛은 없는거 같지만, 이거, 마셔"
"응. 고마워. 미안해"
"아침밥, 뭔가 먹을래?"
"아니. 기분이 조금 별로니까 괜찮아"
리코쨩은 영양 음료를 꿀꺽꿀꺽 하고 마시더니 맛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칫솔을 개봉해서 건넸다. 리코쨩이 내 방에서 이를 닦고 있는 모습은, 반년 정도 살고 있긴 하지만 너무나 새로운 광경이었다.
"옷도 더러워졌는데 괜찮아?"
"스커트는 두드렸더니 많이 깨끗해졌고, 블라우스 얼룩도 닦으니까 거의 지워졌어"
이를 닦고 나서 리코쨩은 '이제 그만 갈게'라고 말했다. 더 이상은 역시 붙잡을 수 없어서 역까지 같이 가자고 마음을 썼더니, 길이라면 안다면서 거절당했다. 그래서, 조금 더 함께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현관 앞에서 배웅하기로 했다. 현관이라고 해봤자 방의 한쪽 구석 같은 거지만.
"이래저래 미안해"
"펌프스도 세탁소에 맡기거나 하는게 좋을거야"
"응. 미안해. 요우쨩의 물건, 더럽히거나 한 건 아니지?"
"괜찮아"
리코쨩은 얌전한 표정을 지으면서 현관에서 사과를 반복했다. 꽤나 보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치카쨩이라면 이럴 때, '괜찮아, 괜찮아! 대신 내가 맛이 갔을 때 리코쨩이 간호해!' 처럼 밝게 말하겠지. 하지만, 서투른 재주같은 것 밖에 없는 나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해서, 의미도 없이 분위기를 진지하게 만들어 버리고, 마지막까지 리코쨩의 웃는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역시 잠이 부족한 것 같다. 혼자가 되고 침대에 뒹군다.
시트에는 리코쨩의 기척이 남아 있었다. 이불까지 덮고 쿠션 쪽을 머리맡에 깔고 리코쨩이 사용한 자신의 베개를 껴안았다. 얼굴을 들이밀고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았다. 불꽃과 마찬가지로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뜨거워져, 만났을 때와 같은 안타까움이 가슴을 태우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 무렵의 '엄청나게 좋아'라고 외치고 싶어질 듯한 푸르스름함이, 그 성격을 바꾸고 있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다음 글 / CROSS ROAD 제11장: https://gall.dcinside.com/mini/llss/356
댓글 영역
획득법
① NFT 발행
작성한 게시물을 NFT로 발행하면 일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최초 1회)
② NFT 구매
다른 이용자의 NFT를 구매하면 한 달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구매 시마다 갱신)
사용법
디시콘에서지갑연결시 바로 사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