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시인사이드 갤러리

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갤러리 본문 영역

진정한 속마음이 왜곡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운영자 2009.03.23 17:00:05
조회 3684 추천 4 댓글 4

 한 개인의 경우에 있어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자신의 일생을 비교적 솔직하게 회고록 형식으로 기록해놓았다고 해도, 그것을 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자신의 마음속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콤플렉스나 치부들을 기록자 스스로 파악하기 힘들뿐더러, 설사 파악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차마 솔직히 까발겨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진짜 ‘속마음’을 읽어내려면 그 사람이 공식적으로 남긴 기록에 의지하기보다는, 순간적인 본능적 욕구에 사로잡혀 넋두리하듯 써내려간 연애편지나 일기 같은 것을 참고하는 편이 낫다.


 예컨대 톨스토이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엔 톨스토이를 그저 위대한 휴머니스트로만 보았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그를 ‘결벽증적 금욕주의와 신경질적 성욕의 틈바구니에서 갈등하다 죽어간 자아분열적 이중인격자’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게 되었다(J. 라브린의 저서 ‘톨스토이’가 대표적인 예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남긴 저서 때문이 아니라 그와 그의 부인 소피야 사이의 일을 기록한 톨스토이의 일기, 서간 및 부인이 직접 기록한 일기 때문이었다. 소피야는 자신이 역사에 ‘악처’로 기록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의도에서 톨스토이와의 성격적 갈등과 성적 갈등을 남편 몰래 기록해두었던 것이다.


 소피야의 기록에 의하면 톨스토이는 정신적으로는 지독한 금욕주의자이면서 실제로는 지독한 색정광(色情狂)이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신이 마치 악마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여성을 남성의 성욕을 도발시키는 원흉으로 몰아붙여 스스로의 죄책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므로 톨스토이가 그의 소설 ‘안나 까레니나’에서 안나가 진실된 성에 눈떴다가 결국 자살하도록 만든 것은, ‘불륜의 대가’라는 뜻에서라기 보다(모든 성애에 불륜은 없다) 여성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톨스토이의 일기를 봐도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 나온다.


 톨스토이의 일생을 그의 업적중심으로 건성건성 파악하려면 이런 내밀한 기록들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이해하려면 이런 기록들이 참고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업적과 운명을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적어도 가정적으로는 너무나 불행한 운명을 타고났던(아니 자초했던) 사람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윤동주(尹東柱) 시인은 맑고 투명한 시심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고뇌하며 살다간 항일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학적 업적으로만 보면 윤동주 시인은 어쨌든 빼어난 인물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운명으로만 본다면 그는 20대 나이에 ‘비명횡사’한 불행한 남자일 뿐이다. 그의 ‘운명’의 비밀을 밝히려면 그의 시에 나타난 잠재심리(마조히즘과 나르시즘, 그리고 관음증)를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된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에는 당당한 성적 취향으로서가 아니라 죄의식 섞인 관음증과 나르시즘이 복합되어 나타난다. 우물 안에 비춰진 자기자신을 들여다 보면서 그는 일종의 나르시즘적 만족을 얻는다. 그러다가 그는 그런 심리에 빠져 있는 자기가 싫어져 우물로부터 떠나 보려 애쓴다. 하지만 그는 그게 잘 안되어 결국 ‘우물 속의 자기’로 돌아오고 만다. 이러한 모습은 우물(자궁 또는 여성성기의 상징이다)을 당당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과감히 떠나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방황만 되풀이하고 있는 폐쇄적 자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몰래 엿보거나 들여다보는 정도의 찝찝한 관음적(觀淫的) 성희에 머물고 마는 우유부단한 모럴리스트였다. 그의 시들 가운데 “들여다본다”는 구절이 열 군데나 나온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는 기독교의 금욕주의적 윤리에 함몰돼 있던 나머지, 자신의 욕구를 주체적으로 풀어버리지 못하고 오직 죄의식 섞인 관음행위(이럴 경우엔 도시증(盜視症)이란 용어가 더 적당하다)로만 풀어보려 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도덕적 초자아가 그의 본능적 자아를 짓누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기에 그는 ‘십자가’라는 시에서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리길 원했다. 감히 자살할 용기도 없고(기독교에서는 자살도 죄악이므로), 그렇다고 힘써 싸워나갈 용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명예욕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누군가 자기를 예수처럼 ‘명분 있는 죽음’으로 몰아가 주길 바랐다.


 이러한 무의식적 소망이 결국 그의 비명횡사를 자초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육체적 행복(이를 테면 성적 쾌락 같은 것)을 죄악시했기에 왠지 모를 답답함에 따른 까닭모를 적개심이 생겼고, 그러한 적개심의 화살은 마조히즘적 자학심리에 편승하여 스스로의 가슴에 부메랑처럼 날아와 박혔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어찌보면 죽음을 희구한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시가 갖는 품격과는 별개로 윤동주가 그저 불쌍해 보이기만 한다. 그는 안중근 의사 같은 사람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한 사람이 아니라(그가 일제 말 창씨개명까지 해가며 굳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유약한 심성을 지닌 학구파 휴머니스트였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업적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 조작자들에 의해 과장되게 부풀려질 수도 있고 아예 묻혀버릴 수도 있다. 비겁하게 살진 않으면서 자기체질에 맞춰 야한(즉 솔직한) 정열을 추구해나가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애쓰되 자신의 명분이나 명예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이웃 전체의 구체적인 쾌락과 행복을 도모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고 나는 믿는다.


 위선적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겉으로 표방하는 정의, 자유, 도덕 같은 것들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속아왔던가. 이 세상에서 소중한 가치는 오직 ‘솔직성’ 하나 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윤동주는 당시의 문학인들 중에서는 가장 순진하고 솔직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육체적 욕구에까지 솔직하지는 못했다. 아니 그가 처한 지적 환경, 즉 보수적 퓨리터니즘이 그를 솔직하지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쩌면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였다고 볼 수 있다.

>

추천 비추천

4

고정닉 0

0

댓글 영역

전체 댓글 0
등록순정렬 기준선택
본문 보기

하단 갤러리 리스트 영역

왼쪽 컨텐츠 영역

갤러리 리스트 영역

갤러리 리스트
번호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추천
설문 주위 눈치 안 보고(어쩌면 눈치 없이) MZ식 '직설 화법' 날릴 것 같은 스타는? 운영자 24/04/29 - -
107 <붙이는 글> 마광수의 ‘시대를 앞서간 죄’ [68] 운영자 09.04.03 14762 55
106 운명은 야하다 [14] 운영자 09.04.02 12404 17
105 창조적 놀이정신은 운명극복의 지름길 [3] 운영자 09.04.01 4579 7
104 시대상황에 맞는 가치관은 따로 있다 [7] 운영자 09.03.30 3910 8
103 패륜범죄, 대형참사 빈발의 원인은 따로 있다 [9] 운영자 09.03.27 4929 8
101 ‘위대한 설교자’보다 ‘위대한 놀이꾼’이 필요하다 [5] 운영자 09.03.26 3881 6
100 ‘투쟁’에 의한 역사발전의 시대는 가다 [4] 운영자 09.03.25 2999 3
진정한 속마음이 왜곡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4] 운영자 09.03.23 3684 4
98 민심을 바로 읽어내는 것이 급하다 [2] 운영자 09.03.20 2487 1
97 상투적 도덕은 필요없다 [2] 운영자 09.03.19 3034 1
96 왜 이렇게 비명횡사가 많은가 [2] 운영자 09.03.18 3152 5
95 이중적 도덕관 탈피해야 개인과 사회가 건강해진다 [22] 운영자 09.03.17 3058 8
94 그릇된 관념에서 비롯되는 ‘집단의 병’ [4] 운영자 09.03.16 3149 2
93 현대병의 원인은 권태감과 책임감 [5] 운영자 09.03.13 3870 5
92 ‘인격 수양’ 안해야 마음의 병에 안 걸린다 [11] 운영자 09.03.12 5743 18
91 억눌린 욕구가 병이 된다 [7] 운영자 09.03.11 5596 6
90 ‘무병장수’의 현실적 한계 [5] 박유진 09.03.10 3492 3
89 인간 있는 곳에 병 있다 [4] 박유진 09.03.09 2554 3
88 이중적 의식구조를 벗어버리면 병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3] 박유진 09.03.06 2774 2
87 자유만이 유일한 해결책 [4] 운영자 09.03.05 3120 3
86 참된 지성은 ‘지조’가 아니라 ‘변덕’에서 나온다 [3] 운영자 09.03.04 2717 3
85 ‘관습적 윤리’에서 ‘개인적 쾌락주의’로 [2] 운영자 09.03.03 2786 4
84 ‘편의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 [2] 운영자 09.03.02 2381 2
83 개방적 사고에 따른 문명과 원시의 ‘편의적 결합’ [4] 운영자 09.02.26 2593 1
82 문명이냐 반문명이냐 [3] 운영자 09.02.25 2780 1
81 진리로 포장되는 ‘권위’의 허구 [3] 운영자 09.02.23 2630 3
80 원시와 문명의 ‘편의주의적 결합’은 우리를 참된 자유로 이끈다 [2] 운영자 09.02.20 2023 1
79 솔직한 성애의 추구는 운명극복의 지름길 [2] 운영자 09.02.19 2472 5
78 ‘타락’도 ‘병’도 아닌 동성애 [3] 운영자 09.02.18 3987 10
77 선정적 인공미 가꾸는 나르시스트들 늘어나 [5] 운영자 09.02.17 3020 5
76 개방사회가 만든 자연스런 관음자들과 페티시스트들 [3] 운영자 09.02.16 1623 1
75 삽입성교에서 오랄 섹스로 [9] 운영자 09.02.13 6343 1
74 ‘성적 취향’의 다양성을 인정하자 [2] 운영자 09.02.12 1351 1
73 생식적 섹스에서 비생식적 섹스로 [4] 운영자 09.02.11 2021 4
72 ‘성욕의 합법적 충족’을 위해서 결혼하면 실패율 높다 [3] 운영자 09.02.10 1844 7
71 결혼은 환상이다 [2] 운영자 09.02.09 2058 6
70 작위성 성억압은 개성과 창의력을 질식시킨다 [2] 운영자 09.02.05 1075 3
69 전체주의적 파시즘은 집단적 성억압의 산물 [3] 운영자 09.02.04 1602 2
68 쾌락으로서의 성을 부끄럼없이 향유하라 [5] 운영자 09.02.03 2125 3
67 변화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발전을 이룬다 [2] 운영자 09.02.02 1179 1
66 결국 현재의 욕구에 솔직하라는 역의 가르침 [2] 운영자 09.01.30 1475 1
65 ‘주역’을 아는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 [7] 운영자 09.01.28 2611 5
64 회한도 희망도 없이 현재를 버텨 나가라 [2] 운영자 09.01.23 1738 1
61 ‘역설적 의도’로 막힌 세상 뚫어보자 [3] 운영자 09.01.15 1595 5
63 쾌락주의에 따른 동물적 생존욕구가 중요하다 [3] 운영자 09.01.19 1540 2
62 음양의 교화(交和)가 만물생성의 법칙 [2] 운영자 09.01.16 1208 1
60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 지닌 동양의 민중철학 [2] 운영자 09.01.14 1159 1
58 궁하면 변하고, 변하다 보면 통한다 [2] 운영자 09.01.09 1729 3
57 햇볕이 뜨거울 때 우산을 쓰면, 신기하게도 비가 내린다 [2] 운영자 09.01.08 1174 1
56 잠재의식과 표면의식의 일치로 얻어지는 생명력 [4] 운영자 09.01.02 1573 2
123
갤러리 내부 검색
제목+내용게시물 정렬 옵션

오른쪽 컨텐츠 영역

실시간 베스트

1/8

뉴스

디시미디어

디시이슈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