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만에 다시 돌아온, 후기 스타트!
어쩌다보니 서애대감의, 서애대감을 위한, 서애대감에 의한 장소선정이 된(...)
1. 서애대감의 유일한 사치?
양진당을 보고 나와 다시 강둑을 돌다보면
서애대감의 형님이신 겸암선생께서 한 때 계셨다던 빈연정사를 지나게 되
그리고 그 옆에 조금만 더 가면
요렇게 생긴 건물 두 채를 보게 되.
다른 건물들과 달리 요상하게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는 않던 곳,
아마 강둑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싶었어
맞배지붕의 건물 하나와, 그 옆의 소담한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또다른 소담한 정자,
바로 서애대감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잠시 내려와 서재로 썼다던
원지정사야.
*브로셔 설명을 보니 '원지'라는 이름은 근처 산에 나던 약초 이름으로 머리가 맑아져서 대감님이 자주 드셨다 하네 ㅎㅎ
대문을 들어가면 이렇게 건물 두 채가 있어.
400년 넘은 집이다 보니 나무의 색들도
제법 그 시간의 때를 함께 갖고 있는게 신기했음
예전에는 단청 칠한 궁이 참 좋았는데
요새는 그 단청칠보다는 점점 나무 본연의 무늬와 색을 드러내는
양반집들이 참 좋더라고
마루에 적힌 원지정사 현판,
그리고 그 옆으로 두 칸의 방,
문을 열 순 없었지만
아마 잠시 관직을 내려놓고 시골로 온 서애 대감은
이곳의 작은 방에서 책을 읽으며
천천히 강둑을 걸었을 것도 같아.
관직에 나가고 10년만에 돌아온 거였으니
아마 생각할 것들이 많았던 삼십대 중반이 아녔을까 싶음.
그런데,
방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이분에게도 '와, 이건 진짜 사치다' 싶었던게 하나 있었으니
바로 풍경에 대한 사치였다고 한다.
빈연정사에도 없었던 정자까지 지어서
풍경을 참으로 많이 보셨던 듯?!
서애[西厓]라는 호가 이미 말을 해 주고 있는 것처럼
마을의 북서쪽에 위치한 부용대는, 서울에서도 그의 마음속에 늘 있었던
이상은 아니었나 싶음.
(음, 아무래도 마을 서쪽 언덕 내지 절벽이라는 의미때문에 저기가 아닐꺼라 짐작해봤는데. 혹시라도 이 부분은 아는 형들은 한번 더 확인 부탁드림)
정말 이 분의 원지정사는 바로 정면이 부용대,
가장 마을에서 풍광좋은 곳 중 하나였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원지정사 뒤로 유달리 넓었던 뒤뜰과 나무들을 보니
서애대감 자체가 참 자연친화적인(?) 분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들었던 듯.
원지정사가 의외로 사람 발길이 잘 안닿아서 좋았던 것은
한옥의 매력을 마구잡이로 발견했다는 거?
첫 번째는
기둥들이 액자틀이 되어 풍경을 담아 낸다는 것,
하회마을에 와서야 비로소
'한옥에서 달을 담고 풍광을 담는다'는 옛 시조 속의 말이
이해가 되더라고
오히려 색이 없는, 무채색의 한옥이기에
녹빛 그림자들이 더 잘 담기는 건지도 모르겠어.
두 번째는
한옥의 대문은 꼭~ 닫히는게 아니라
바람 소리에 나무들이 서로 부딫히며 삐끄덕 거리는 소리가 나는것!
이게 사실 생활하는 입장에서는 참 짜증날 법도 할 텐데
(게다가 이 동네가 강을 낀 동네라 더욱더,)
사람 없는 곳에 들리는 소리라곤
매미소리와 그 나무들 부딫히는 소리였던지라
참 좋았던 거 같아.
'이런 소리도 나는 구나'
'한옥이 이런 거도 있구나'란 점에서?
이건 반대로 바라본 풍광.
잠시 나도 저 마루에 슬쩍 엉덩이를 걸터앉아
그 앞의 부용대를 바라보고
또 그 옆, 아래의 풍경들을 찬찬히 살펴봤어.
참, 평일에 아무리 사람들이 없어도
그래도 내일러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다들 여기까지는 발길이 닫지 않더라고
과연 서애대감은, 잠깐의 휴식 속에서
어떤 생각들을 품은 걸까?
연보를 살피다보면
출사에 뜻은 크게 없었던 분이라고 해
스승이었던 퇴계선생 또한 관직을 여러번 거절하셨으니
그 모습을 본 후학에겐 그런 퇴계선생의 모습이 오래 남지 않았을까.
역사 속의 서애대감에겐
늘 마음 속에 한 이상향으로써 고향 하회마을이 존재했었고
젊은 날 잠시 돌아온 그곳에서도
나중에, 참 나중에 관직에서 은퇴한 다음에
찬찬히 가족들을 살피며 연구를 해야겠단 결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음.
그의 발길이 닿았을 마루 위에 슬쩍 걸터앉아 잠깐 쉬었어.
이런 저런 생각들도 글로 슥슥 정리하고
음, 마음에 남았던 그 원지정사의 문도 대애충 한번 그려보고
(물론 그림은 엉망, 시망이어서 공개할 수가 없음 ㅜ )
강바람에 실려
온전히 닫히지 못한 나무문들이
삐끄덕삐끄덕 거리는 소리가
정겹게 들렸던 시간이었던거 같다.
2. 마침내, 강을 건너
원지정사를 나와 강둑으로 나오면
서애 대감의 형님께서 심으셨던 만송정 숲이 나와
그 숲을 따라 내려가면 보이는 곳이 낙동강,
이 곳은 낙동강 중상류라 물이 참 맑더라
때마침 강 건너편에서 온 배를 타고
부용대 쪽을 향해 갔어
서애가 태어난 곳,
서애가 잠시 쉬었던 곳,
그리고 이제는 그가 영원히 쉬고자 왔으나 마음 속으로 결코 쉴 수 없어서 끊임없이 글을 썼던
옥연정사를 가야할 시간이었지.
아, 참고로 징비록 제작진과 배우분들이 많이 건너갔던
'객주'가 지금 안동, 충주 등지에서 촬영 중이야
내가 갔던 날에도 K사 차량이 여러번 들락날락 거렸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차량이 있더라고
아쉽게 '객주'팀은 아니었고, 다른 촬영팀이었는데
이름은 묻지 않았다
그 와중에 강바람은 참 시원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음 : )
3. 끝내 놓지 못한 붓
'옥연정사'는
부용대가 있는 야트막한 산 속에
꽁꽁 감춰져 있을 줄 알았거든
근데 꽁꽁 감춰져있지가 않아
1회 장면에
포함될 '뻔' 했지만 되지 않았던 장면
'서애 대감의 초상화를 그리러 온 관리들과 서애대감이 만나는 장면'
그 장면을 찍었던 곳이 바로 아래에 있는 저 모래밭,
그리고 그 모래밭 바로 위에 보일락말락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
바로 옥연정사야.
아마 여기서도 촬영을 했었겠지?
란 생각이 드니 문득 흐뭇해졌었다고 한다
그리고 위의 간죽문을 넘어 드디어 도착한 곳,
바로 앞의 소나무가 400년 좀 넘은 것이니
저 소나무 역시 이 건물이 처음 지어졌던 때 부터
서애대감이 징비록을 쓰고,
왔다갔다 천천히 걷던 시절을 보고 있었겠구나 싶었어
옥연정사의 앞은 바로 낙동강이야.
그러면서도 수풀로 많이 가려져서 밖에선 잘 보이지 않아.
그렇다고 결코 마을로 이어지는 강둑과 멀지도 않아.
하지만 비가 오기라도 한다면 결코 마을과는 닿을 순 없겟지, 바로 모래톱 위의 산쪽에 위치해 있으니까.
참 그 위치가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란 생각이 들었어.
이 곳을 처음 딱 들어설 때,
마음이 파르르 떨리면서
고향에 돌아왔으나, 그의 이상과는 다른 현실에서
그 스스로 결국 할 일을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서애 대감이 가장 먼저 떠올랐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건물만을 찬찬히 둘러보았어.
그리고 이 곳에서 꼭 해야겠다 싶은 일들이 있었고
'징비록'의 한자 원문은 아니지만
서문 번역본을 펼쳐서 그 곳에서 읽은 게 하나,
(줄 친 구절은 왜 이 책 이름이 '징비록'인지, 그리고 마지막에 '비록 보잘것 없는 몸이지만 이 글을 써서 후세에 경계케 한다'는 부분이야.)
두 번째는
'서애집'을 보다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꼭 들어서
이 곳에서 읽어야 겠다, 싶었던 글이야.
조금 길지만 원문을 인용할게
여러 아이들에게 보냄[寄諸兒]
너희들이 10년 동안이나 제대로 공부를 못하고, 여러 가지 걱정 때문에 이리저리 쫓겨다니다 보니 한없이 세월만 흘렀구나. 그러나 이것도 천명이니 어찌하겠느냐.
나도 젊었을 때에 전적으로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너희들과 같이 그럭저럭 세월만 보냈다.
경신년(1560, 명종15) 겨울에 《맹자(孟子)》 1질을 가지고 관악산에 들어가서 두어 달 동안 20여 차례 읽고 나서야 겨우 첫머리부터 끝까지 욀 수가 있었다. 산에서 내려와 서울로 오는 동안 말 위에서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양혜왕장(梁惠王章)에서 진심장(盡心章)까지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정밀한 뜻을 깊이 알지 못했지만 군데군데 마음에 이해가 되는 곳이 있었다. 그 이듬해 하회에 와 있으면서 《춘추(春秋)》를 30여 번을 읽고선 이때부터 조금씩 문장의 흐름을 이해하게 되어 다행히 급제하였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 좀더 공부를 하여 사서를 백여 번 읽었더라면 하고 언제나 한이 된다. 만일 그렇게 하였더라면 얻은 바가 기필코 오늘같이 보잘것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늘 너희들에게 사서를 읽으라고 말한다.
요즘 서울의 젊은이들은 마치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과 같아서 다만 빨리 성공할 수 있는 방법만을 연구해서, 성현들의 글은 다락에 묶어 두고 날마다 영리하게 남의 비위에 맞게 하는 작은 문자를 찾아 그 말을 따서 글을 지어 시관의 눈에만 들게 하여 성공을 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는 바로 교묘한 방법으로 벼슬을 하는 사람들의 한 수단이지, 너희들같이 우둔하고 명예를 다투는 데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 쉽게 본받을 것이 못된다. 모모(嫫母)가 서시(西施)를 본받는 것도 뭇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더군다나 제가 굳이 서시와 같지 않고 내가 모모도 아니면서 무엇 때문에 욕되이 이런 일을 하겠느냐? 대개 학문의 성취 여부는 나에게 달려 있고 얻고 얻지 못함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오직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만 힘쓰고 운명은 하늘에 맡길 뿐이다. 《통감(通鑑)》도 역사가들의 지남(指南)이니, 어찌 읽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통감을 읽는 것도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너희들은 나이가 벌써 중년이 되었고 할 일이 많은데, 사서(四書)와 시서가 모두 너희들의 물건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또 몇 해를 더 보내면 끝내 아무런 실속도 없이 가난한 집에서 슬피 탄식하는 일부(一夫)의 꼴을 면할 수 없으니, 어찌 민망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경서는 내용과 의미가 깊고 정밀하기 때문에 반드시 노력을 기울인 뒤에야 터득할 수 있지만 역사서는 경서에 비할 것이 못 되니, 경서를 읽으면서 돌아가면서 훑어보아도 관통할 수가 있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는 모두 실속이 있으니 잘 생각해 보아라.
(한국고전종합DB)
그 두 글을 읽고 난 후,
마음이 후련하면서도, 이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았을까란 궁금증과 함께,
과연 그에게 충(忠)이란 무엇이었을까,를 많이 생각해 봤던 거 같아.
원지정사를 짓고, 여러번 벼슬을 불렀으나 한동안 노모의 봉양 때문에 안동을 왔다갔다했던 선생이
국가를 위해 열심히 일한 다음 다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 남은 건
노모와 형님, 그리고 아들과 조카들 아니었을까.
가장 지극히 개인의 일, 가족의 일을 위할 수 있는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마음 한켠에는 미처 끝내지 못한, 나라의 일이 늘 남았겠지.
그리고 그 나라의 일이란 것을, 이제 은퇴를 했던 자신이 무언가 정책을 세우고 할 수는 없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은 게 그렇게 기록을 남기는게 아니었을까 싶어.
영의정으로써 일하면서 당쟁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또 그와 별개로 국가가 당하는 가장 큰 사건인 '전쟁'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그러면서 후대에 누군가는 그것을 알아주겠지,
누군가는 '외국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한 상황에서 안일하면 안된다'란 교훈을 알것이고
또 위급해도 제대로 사람을 모으고 인재를 등용하는 법을 차근차근 행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을 얻어
잘 하겠지,
그런 마음 아녔을까.
나름 후손들에 대해서 글이라도 남기면 누군가는 보고 잘 실천하겠지란,
그 마음으로 글을 쓰셨을 거 같아.
어쩌면 고향에 돌아와
효를 다하면서도
그 연장선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마음의 중심에 둔 것,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시지 않았나 싶음.
그 마음은 옥연정사를 나서서 부용대 정상으로 가는 길
바로 거기에 세워진,
서애 선생의 글에서 알 수 있었음
당신은 조선의 스피노자인가요?!!
이 글도 사진 확대해서 꼭 읽어보길 바래.
나이 육십 넷에 소나무를 심으면서
그게 다 큰 걸 보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저 심고, 굳이 글로써 그걸 심은 뜻을 밝히지 않은 채
허허 웃었을 모습,
아마 저 때 징비록을 다 완성했던 시기 즈음이었나?
대개 그렇게 봤던 듯 싶기도 한데
비로소 그렇게 모든 것을 끝낸 후에야 조금은 씁쓸한 여유를 느꼈을 모습이 떠올랐다고 한다.
만일 드라마가 그 말년까지 조금 더 다룰 여유가 있었다면
음, 마지막 회에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았을 텐데란 생각도 함께 들었지.
물론실제역사에서 현실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4. 안타까운 점
부용대에서 하회마을 전체를 본 후에
다시 돌아와서 옥연정사를 거쳐갔어.
안타까운 점은, 다들 부용대를 가면서 한번은 옥연정사를 거쳐가지만
이 곳이 어떤 곳인지, 하다못해 누가 살았는지에 대해서
관심갖는 친구들이 부족했다는 점이야
심지어 앞에 버젓이 설명문까지 있는데도 말이지.
내일ㄹ를 통해 안동이 많이 뜨고
하회마을로도 내 또래의 친구들이 많이 온다는 건 좋은 현상이지만
그 친구들이 한편으로는 그저
사진만 찍고 한번 '왔다간다'란 생각만 하고 가는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음
실제로 그 장소를 지나쳐 감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이 뭔지 생각도 안하는 이들을 너무 많이 봐서
안타깝고 아쉽고 화가났었음
풍경이 참 아름답고, 자연이 아름다우며
거기에 오래된 한옥들이 있으니 더욱더 사진찍긴 좋을거야.
그런데 말입니다......
꼭 그렇게 풍경 보고 그럴거라면
그냥 산 속의 휴양림을 가거나
아니면 바닷가를 가면 될 일인거 같아.
적어도 그런 건물들이 있는 곳에 왔다면
한번은, 그래도 한번은 그 건물에 누가 살았고 어떤 이야기가 담겨있는지
조금은 생각해줬으면 좋겠음......
그게 그 공간에 대해,
그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해.
또한
그렇게 그 공간을 걷게 될 때에
나의 삶에서 얻게 되는 생각과 느낌은 분명 다를 거라 생각함.
때마침 만나서 얘기했던 한 주민분도
그러시더라고
'이 마을에 참 여행객들이 많이오지만, 하나하나 찬찬히 들여다보는 외국인들보다
그저 스윽 스쳐가는 우리 사람들이 안타깝고 화날 때가 있다'
'적어도 이 마을이 어떤 유래로 만들어졌고
이 건물들에는 누가 살고 있었는지는 조금 알았으면 좋겠다'
만일 그런 이야기들에 하나라도 귀를 기울인다면
아마 이전의 화경당에 화재가 나는, 그런 일도 없지 않을까 싶음.
어쩌면 이 이야기도 씹선비 같은 말이긴 하지만
그 건물들이, 그 마을이 말하고자 하는 얘기에 귀기울여주면 더 좋겠다, 싶은 마음이야.
죄송합니다...이런데까지 가서도 덕질이나 하고 ㅠㅠ
다음편은, 드디어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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