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 네버랜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31) 下
적당한 햇살이 비추는 한적한 공원이다. 보고 거니는 것만으로도 상쾌함을 맛볼 수 있는 이곳에서 한 아이가 이맛살을 구기고 있었다.
“어쩌지.”
하필 나무 위에 걸릴 게 뭐람. 아이는 나무를 노려보았다. 간만에 몸이 좋아져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불행이 닥칠 줄이야. 하지만 여기서 놀이를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갈쏘냐. 그럴 순 없다. 아이는 씨익 웃었다.
“조오아... 안나. 넌 이 문젤 해결할 수 있어.”
안나는 자기최면을 걸듯 혼잣말을 되뇌었다. 머리를 굴리자. 저 공을 어떻게 빼낼까. 도구를 이용하면 편할 것이다. 기다란 작대기나 하다못해 던질만한 돌이나. 안나는 제법 돌팔매질을 잘 한다. 던지는 족족 백발백중에 가까운 실력을 가졌다. 안나의 후견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여전히 잘 맞히는구나”라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 정도다. 하지만 그 실력도 마땅한 도구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땅을 파면 돌이 나오겠지만 손이 더러워지니까 안 된다. 신발을 던지면 발은 흙투성이가 되겠지. 이것도 안 돼.
10초. 9초. 8초. 안나의 머릿속에서 카운트다운이 흘렀다. 이윽고 0초를 가리켰다.
“이정도면 많이 생각한 거야.”
안나는 제 행동을 합리화시켰다. 지난번보다 긴 시간-무려 1분-동안 고민했다. 방법은 단 하나. 몸으로! 행동으로! 손으로 직접! 쟁취!
안나는 나무로 달려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손과 발이 더러워지는 건 안 되지만 옷이 더러워지는 건 괜찮은 모양이었다.
어째서 특무대원이 경비병처럼 순찰을 돌고 있는 것인가. 에릭은 속으로 한탄했다. 하지만 함께 순찰을 도는 상관, 엘사 라스무센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영역 싸움에 익숙한 상관이니, 특무대가 나설 수 있는 무대가 넓어지는 건 좋으나 굳이 다른 기관과 중첩되는 일을 해봐야 좋을 것도 없다는 걸 알 터다. 그런데도 엘사 라스무센은 이곳의 순찰을 맡겠다고 나섰다.
그리하여 떨떠름한 얼굴의 대장 한스, 무표정의 부대장 린베르크와 반색을 한 경비대-도리어 그네들은 까다로운 순찰 구획이 좁아져서 좋아했다-의 허가를 받아내고, 엘사는 부하대원 한 명을 대동해 순찰을 돈다. 순찰 구획은 한 두 명이서 돌기에 충분할 정도라서 산책을 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에릭을 대동하고 순찰을 돌았다. 둘 사이의 접점은 특무대뿐이라 대화거리가 자연스럽게 일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거 정말입니까? 경비대랑 치안대를 특무대 관리 하에 둔다고 하던데요.”
“기관을 통합하는 겁니다. 명령체계는 단순할수록 좋고, 겹치는 부분은 없애는 게 낫죠. 물론 바로 이루어지진 않겠지만, 건물의 경우에는 기존에 있던 치안대 초소를 그대로 써서 지방을 통제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치안대가 아예 없는 지방은 따로 체크를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7섬 전부 다 말씀이십니까?”
“대대적인 순시가 되겠죠. 족히 몇 년은 걸릴 겁니다. 지금은 말만 나온 상황이라서 구체적인 계획도 없으니 바로 하진 않습니다.”
몇 년. 에릭은 눈을 끔벅이며 손가락을 펴보았다. 서던은 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된 나라다. 수도가 있는 본섬만 순시를 해도 1년은 걸릴 것을 나머지 6섬까지 둘러본다고 하면, 엘사의 말대로 몇 년은 걸릴 것이다. 해로야 증거선이 있다만 육로가 문제다. 본섬에는 그나마 열차라도 있지, 나머지 섬은 자동차가 있을지 없을지. 그래도 말은 있겠지. 에릭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건 무조건 개고생이다. 첫 순시이니만큼 자신과 같은 평대원이 아닌 고위급 인사가 갈 것이다.
‘그 고위급 인사를 수행하는 건, 오, 그게 특무대 일이 되진 않겠지?’
그러면 자원군을 받는 게 아니라 차출할지도 모른다. 에릭은 본섬은커녕 수도도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저, 부관님. 이것만큼은 저희 특무대가 아니라 기사단이, 아?”
없다. 방금 전까지 옆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상대가 사라졌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 앞을 보니, 이미 엘사는 저만치 멀어져, 뛰어가고 있었다. 그 속도는 가히 총알에 비할 만 했다. 달리기 대회에 나간다면 온갖 상금은 다 휩쓸고 다닐지도 모른다. 헛된 상상을 부풀리던 에릭은 곧 정신을 차리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와악 절 두고 가시면 어떡합니까!”
엉성한 폼으로 나무에 찰싹 붙어 꾸물꾸물 위로 올라가, 간신히 공이 걸린 나뭇가지까지 당도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아무리 팔을 뻗어도 닿지 않는다. 괜히 오기가 생겼다. 안나는 주변을 살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나뭇가지 위에 엎드렸다. 손에 공이 닿을 때까지 애벌레 마냥 나뭇가지 위를 기어갈 생각이었다.
‘몸 가벼운 게 이럴 때만 도움이 된다니까...’
꿈틀꿈틀. 안나는 곡예사 흉내를 내어, 줄 대신 나뭇가지 위를 기어갔다. 이대로 바람만 안 불면 성공적으로 저 공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나뭇가지에 닿은 팔과 배가 쓸려서 아프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작전(?)이었다.
“조금만-”
안나는 손을 뻗어, 가지에 걸린 공을 쳐냈다. 공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몸이 기우뚱 하고 한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떨어진다. 안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추락의 무게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러다 갑자기 등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고, 몸이 공중에 살짝 떠있게 되었다. 곧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푹신한 무언가에 파묻혔다. 안나가 놀라서 눈을 떴다. 엘사였다. 으레 안나의 후견인 엘사는 안나가 위험한 일-혼자 물건을 사러간다던지, 혼자 나무를 탄다던지-을 하려고 하면 어느새 곁에 와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아났나 싶을 정도로 신출귀몰이었다.
“괜찮니? 다친 곳은 없고?”
엘사는 눈으로 안나의 몸을 훑었다. 외상은 없어보였다. 잘 받아냈다.
“많이 놀랐지? 세상에. 어쩌다 나무 위로 올라간 거니?”
엘사가 품에서 안나를 내려줬다. 혼을 내는 게 아니지만 걱정이 가득 묻어난 말투여서 안나는 몸을 움츠렸다.
“공이...”
안나가 우물우물 제 행적을 낱낱이 토해냈다. 안나가 가리킨 곳에는 땅에 처박혀 있는 공이 있었다. 엘사는 허리를 숙여서 안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나무에 올라야 할 때가 있으면 목표 지점까지 잘 올라갈 수 있을지 수십 번 생각해봐야 돼. 그리고 나무에 올라가기 직전에 무사히 잘 내려올 수 있을지 수백 번 생각해보렴. 알겠니?
나무에 올라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야. 다만, 너 혼자 있을 때 나무를 타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주변에 누가 있어야 해. 네가 나무에 잘 올라가고 설령 나무에서 떨어져도 그 아래서 널 받아줄 어른이 있어야 한단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엘사는 또박또박 설명했고, 안나는 알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가 다치지 않았으니 된 거다. 엘사는 바닥에 떨어진 공을 돌려주며 말했다.
“너에게 나무 타는 법을 가르쳐줬어야 했는데.”
엘사는 안나를 과보호해왔다. 안나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엘사는 자기가 한 일인 양,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슬퍼했다.
그런 엘사가 안나에게 나무타기를 가르쳐 준다니, 조금 뜻밖이었다.
“엘사는 나무 탈 줄 알아요?”
엘사는 대답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괴상할 만큼 가벼운 몸으로 재빠르게 나무를 타, 가장 높은 가지에까지 다다른다. 그런 다음, 한손으로 단단한 나뭇가지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나무 몸통을 잡는다. 내려올 때는 올라갈 때보다도 더 신중하고 천천히 이루어졌다. 마무리 착지 동작은 깃털이 내려앉듯 사뿐했다. 안나는 눈을 크게 뜨면서 환호했다.
“멋져요!”
안나의 칭찬은 언제나 엘사를 기쁘게 만든다. 엘사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배우면 나도 엘사처럼 멋지게 나무를 탈 수 있어요?”
“당연하지.”
네가 나한테 알려준 거니까. 엘사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안나’가 알려줬던 걸 안나에게 알려주는 것뿐이다. 안나가 원한다면 낚시하는 법이나 식용 식물 구분법 등을 가르쳐줄 수도 있다. 물론 자신의 철저한 보호감독지도 아래에.
“같이 노력한다면 할 수 있을 거야. 이번 휴일에 알려줄게.”
“신난다!”
안나가 환호성을 지르는 사이, 엘사는 안나의 앞에 서서, 정면을 응시했다. 저 멀리서 에릭이 죽기 직전의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헉, 헤엑, 헥... 라, 라스무센 부관님!”
안나는 낯선 이의 등장 때문에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엘사는 좋은 분위기를 깨버린 에릭에게 괜한 트집을 잡았다.
“에릭 군. 고작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그렇게 숨을 헐떡입니까?”
“크, 크으게... 아니 무슨, 헉헉, 으...”
에릭은 숨을 고르며 새삼 엘사 라스무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떻게 14스트리트에 있던 사람이 12스트리트의 공원에 있는 나무를 보고는, 총알처럼 빠르게 달려갈 수 있는 건지. 역시 인간이 아닌 거야 우리 부관님! 에릭은 엘사를 선망 반 두려움 반의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안나는 엘사 뒤에 숨어서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엘사가 말을 받아주는 걸 보니, 아는 사람인 것 같았고 무엇보다 엘사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니 인사를 하는 게 옳다. 근데 인사를 받아줄 여력은 없어 보인다.
안나는 짧게 안부를 물었다.
“괜찮으세요?”
“오. 괜찮단다 얘야.”
호흡이 돌아온 에릭은 안나를 쳐다보았다. 새하얀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귀여운 아이로구나. 머리카락이 참 예뻐.”
“당연하죠. 안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귀여운 아입니다.”
칭찬을 받은 안나는 수줍어서 엘사의 옷을 잡고 얼굴을 가렸다. 낯선 사람에게서 머리카락을 칭찬 받은 건 처음이었다. 정작 안나의 후견인은 에릭의 칭찬이 당연하다는 듯 굴었다. 안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엘사가 “괜찮아”라고 말하자 그제야 안나는 엘사의 옷자락을 놓고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에릭은 안주머니에 있던 초콜릿을 꺼내어 안나에게 내밀었다. 초콜릿! 안나는 음식 중에서 초콜릿엘 제일 좋아했다. 보기만 해도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안나는 잠시 갈등을 하더니 단호히 말했다.
“엘사가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지 말라고 했어요.”
엘사가 대신 에릭에게서 초콜릿을 받아 안나에게 주었다. 엘사가 다시 “괜찮아”라고 말했다. 안나는 안심하고 포장지를 까서 초콜릿을 입에 넣었다. 엘사가 기특하다는 듯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에릭이 웃으면서 말했다.
“귀여운데다 똑똑하기까지 하네. 동화 속에 나오는 눈의 요정 같아.”
에릭은 방금 떠오른 생각을 고대로 내뱉었는데, 섬뜩한 한기를 느끼고는 몸을 떨었다.
엘사의 입모양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엘사가 아동납치범을 심문할 때나 볼 수 있는 미소였다.
‘헉. 부관님, 왜 화가 나신거지?’
‘아. 엘사는 요정이라는 말 싫어하는데...’
안나는 초콜릿을 우물거리면서 웃고 있는 엘사와 달달 떨고 있는 에릭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안나가 잠자리에 들기 전, 엘사는 안나가 원할 때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나쁜 요정이 나오는 동화로, 나쁜 요정이 정의의 심판을 받아 죽는 대목을 이야기 할 때의 엘사는 통쾌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래서 안나는 엘사 앞에서 요정의 ‘요’자도 입 밖에 내지 않는다.
“에릭 군.”
“네!”
“달리기가 형편없습니다. 체력 훈련을 게을리 한 겁니까?”
“아, 아닙니다!”
“아닙니까? 그럼 훈련 자체 레벨이 낮다는 뜻이군요. 특무대의 업무 상 체력은 필수라는 건 아시죠? 제가 린베르크 경에게 부탁해서 훈련 레벨을 올려놓겠습니다.”
“헉.”
“날아다니라고는 안 하겠습니다만, 적어도 저처럼 빠르게 뛰지 못하면 곤란합니다.”
“부, 부관님처럼요?”
린베르크 부대장님도 엘사 부관님과의 달리기 경주에서는 매번 지는데! 에릭의 얼굴은 안나의 머리칼처럼 허옇게 질리고 말았다.
안나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엘사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오늘은 언제 와요?”
“어제랑 같은 시간에. 네가 저녁을 다 먹고 난 다음에 올 거야.”
“같이 저녁 먹고 싶은데...”
안나가 말을 흐렸다. 엘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안나를 달랬다. 되도록 빨리 가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한다.
“부관님...?”
저렇게 죽을상을 한 부관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가. 에릭은 이 순간이 꿈같았다.
아이와 작별인사를 건넨 후, “사표 낼까...”라고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에릭은 이를 꿈이라고 치부했다. 그렇다. 모든 건 꿈이다. 요정을 닮은 아이를 만난 것도, 날벼락 같은 훈련을 맞이하게 될 것도, 부관님의 돌연 사표 발언도 죄다 꿈인 것이다. 꿈.
“에릭 군.”
“예!”
“얼빠진 표정을 고치는 데에 훈련만한 특효약은 없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 이거 꿈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 후, 부관과 부하는 똑같이 죽을상을 한 채 순찰을 마무리 지었다. 둘 다 똑같이 속으로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특무관서로 복귀했다.
째깍째깍 업무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엘사는 집무실에 틀어박힌 채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아껴가며 업무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손을 멈췄다. 시계가 저녁 7시를 알리고 있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엘사는 당당히 퇴근을 선언했다.
엘사의 상관 한스가 가지 말라는 눈빛으로 쌓인 서류들을 가리켰으나, 엘사는 콧방귀도 안뀌고 제 몫의 서류만 챙겨든 채 특무관서를 나섰다. 오늘 처리하지 못한 서류를 집에서 처리할 요량이었다. 그동안 누구 몫의 서류 따윈 안 따지고 마구잡이로 도맡아 했으니, 이젠 슬슬 업무량을 조절해도 되지 않은가. ‘일개’ 부관인 엘사는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정작 제 몫을 되찾은, 전보다 곱절은 많아진 업무 분량에 한스만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실정이다. 전부터 엘사에게 좀 쉬엄쉬엄 일하라고 권고했던 건 자기 자신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안나는 깃펜을 내려놨다. 저녁을 먹고 일기까지 다 썼다. 틀린 글자는 내일 가정교사에게 물어보면 된다. 안나는 학교가 아닌 가정교사에게서 공부를 배우고 있다. 학교야 나중에 언제든 갈 수 있으니 서두를 것 없다고 엘사가 말했기에, 안나는 그에 따랐다. 처음에는 제 이름 석자 읽을 줄도 몰랐으나 안나는 영특한 아이였다. 요령을 깨우치니 그림책처럼 쉬운 것들은 척척 읽게 되었다. 아직 쓰기는 힘들어서 ‘일기’부터 시작했다.
“제법 많이 썼는걸.”
일기장은 반 이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정작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쓰인 글귀는 서너 줄이 전부고 내용도 날씨 조아 밥 마니 머거따 재미께 놀아따 엘사랑 이런 식이지만 안나는 뿌듯했다. 안나는 엘사가 올 때까지 일기장을 역순으로 넘겨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바다에서 마녀와 트롤과 함께 살았을 때는 단조롭다 못해 이분적인 생활을 했었다. 이야기를 나누거나 잠들어있거나. 대화의 상대는 트롤, 마녀, 엘사 뿐이었다. 트롤과는 주로 어디가 아프다, 괜찮다 따위의 치료 얘기가 전부고, 마녀는 안나에게 장난을 치기 일쑤라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정상적인 대화는 엘사랑 주로 했기 때문인지, 드문드문 찾아오는 엘사가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엘사가 가장 편했고 엘사가 가장 좋았다.
엘사는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었다. 화려한 옷가지나 달콤한 간식을 양손 가득 들고 오면, 마녀가 옆에서 툴툴거리며 “배은망덕하긴. 내 거는?”라고 선물을 탐내었다. 엘사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표정으로 안나와 안나의 몫을 지켜냈다. 그런 마녀와 엘사의 입씨름-번번이 엘사가 졌다-을 보는 건 정말 즐거웠다.
안나가 저도 모르게 웃으면, 엘사도 따라 웃었고, 마녀는 입을 삐죽이며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엘사가 뭍으로 돌아가면 안나는 치료를 위해 잠에 빠져들었다. 무미건조한 하루하루였다.
그래서 엘사를 따라 뭍으로 가기로 한 날은 기대감이 최고치를 찍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낯설고 흥미로웠다. 고요한 물소리나 따분하게 들리는 마녀의 한숨소리 뿐이던 안나의 귀에는 크고 작은 소음들이 가득 차게 되었다. 엘사는 안나가 호기심을 보이는 게 있으면 눈치 빠르게 행동해, 뭐든 손에 쥐어주고 봤다. 안나의 입가에 웃음이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엘사도 마찬가지였다.
엘사는 안나에게 최고의 하루를 선사하는 동안 뉘엿뉘엿 해가 졌다. 엘사는 묘하게 얼굴을 붉히면서 커다란 저택으로 안나를 데려갔다.
- 여기가 네 방이란다. 불편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나한테 말하렴
- 내 방요?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된 안나는 요리조리 방 안을 둘러보다가, 엘사에게 달라붙었다. 엘사와 분리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안나에게는 당연한 일이나 엘사에게는 당황스런 일이었다. 결국에 안나의 방은 공부방으로 변모했다. 책꽂이와 책상만 있어서 휑하기 짝이 없던 엘사의 방에는 커다란 침대를 포함한 가구들이 들어서게 됐다. 침대는 하나다. 사이즈야 성인 여러 명이 누워도 넉넉한 편이라 아무래도 좋았지만.
안나가 쓴 약을 먹고 이맛살을 찌푸리는 동안에도 엘사는 책상에 앉아 초초한 기색을 보였다. 안나는 어리둥절해 했다. 본인 저택이고 본인 방이고 본인 침대고 잘 시간일 텐데.
- 같이 자요
안절부절 못하던 엘사는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 안나의 옆에 누웠다. 그런 다음, 안나의 “안녕히주무세드르렁”이라는 소리에 한참을 정신을 못 차리다가 눈을 감았다.
이튿날, 안나가 눈을 떴을 땐, 울기 직전의 엘사를 보게 됐다. 엘사는 안나를 꼬옥 안은 채, 네가 일어나서 다행이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단다. 고마워. 미안해. 정말 고마워. 내가 더 잘 할게, 하고 진심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안나는 또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잠자코 엘사의 품에 안겨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아렸다.
“엘사는,”
모르겠다. 안나는 생각을 접으며 일기장을 덮었다. 아직 아이라서 모르는 걸 거야. 좀 더 크면, 어른이 되면 알 수 있을 거야. 안나는 입을 삐죽였다. 빨리 크고 싶다.
그때 노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하녀는 엘사의 귀가를 알렸다. 안나는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엘사를 맞이했다.
“다녀왔습니다.”
“엘사!”
보고 싶었어. 둘은 서로를 안아주며 속삭였다.
써. 안나는 미간을 구기며 흰 가루를 삼켰다.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우웩 하고 헛구역질일 절로 나왔다. 뭍에서 생활하는 건 어느 정도 적응이 됐지만 이 약만큼은 적응이 안 되었다. 그래도 안나는 꿋꿋이 약을 먹었다. 그래야 몸이 덜 아프고 잠도 잘 온다. 무엇보다 약을 안 먹으면 엘사가 속상해 한다. 엘사가 슬퍼하면 안나도 슬프다. 엘사가 기뻐하면 안나도 기쁘다.
“약을 다 먹었구나. 약속대로 이야기를 들려줄게.”
안나는 엘사와 함께 있는 시간 자체를 좋아하지만 그중에서도 엘사가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약을 먹는 건 싫어도 엘사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괜찮다.
안나가 잠자리에 들기 전, 엘사는 침대 머리맡 옆에 작은 의자를 놓고, 그 의자에 앉아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 먼 옛날에, 한 아이가 살았어. 그 아이는 너무 어려서 무엇이 바르고 무엇이 그른지를 몰랐지. 그래서 그 아이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을 하면서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단다. 그 일이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일이라 해도 서슴지 않았어.
그 아이의 주변에는 아이들도 있었고 어른들도 있었어. 하지만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 해선 안 된다고 알려주지 않았지. 그냥 그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어. 그렇게 살아가던 아이는 자신의 행복이 영원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어.
하지만 그걸 부숴버린 어른이 나타났지. 그는 아이가 가진 모든 걸 앗아갔다.”
“그리고 그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요. 맞죠?”
안나가 뒷말을 붙이자, 엘사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 이야기를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안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이 이야기 싫어요. 엘사는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너무너무 슬퍼 보이는 걸요. 아파 보여요. 괴로운 걸 억지로 웃어가며 얘기하는 것 같아서 나도 슬퍼져요.”
슬프다는 말이 엘사를 놀라게 만들었다. 엘사가 할 말을 찾는 사이에 안나는 계속 말했다.
“그 아이가 싫어요. 엘사는 나보다 그 아이를 더 생각해주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 절대로.”
엘사는 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세상에 너보다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없어. 난 그렇게 생각해.”
안나는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엘사의 말이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라 더 부끄러웠다.
“나보다,”
나보다 엘사가 더. 안나는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말하고 싶은데 입을 아교로 붙인 것처럼 딱 달라붙어버렸다. 아까보다 훨씬 더 부끄럽고 몸이 간질거렸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나?”
“아, 안녕히 주무세요!”
“피곤했나보구나. 잘 자렴.”
바보 안나! 안나는 자기 자신에게 꿀밤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엘사랑 오래오래 대화하고 싶은데 말을 허투루 뱉어서 그 시간을 날려버렸다. 울고 싶다. 하지만 울면 엘사가 슬퍼할 테니 참아야 한다.
‘내일은 더 많이, 더 오래 얘기해야지!’
안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꼭 약에 취한 것처럼 10초도 안 돼서 잠들었다.
“잘 자렴.”
엘사는 안나가 완벽하게 잠든 것을 보고 인상을 썼다. 안나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걸 할 수 있지만 ‘이것’만큼은 해줄 수가 없다. 무의식적으로 오른손을 들었다가, 제 손에 낀 장갑을 보고는 슥 내렸다. 안나를 만지기엔 이 손은 너무 차갑다.
“다행히 수면시간은 줄고 있지만...”
엘사는 책상 옆에 가림막을 설치하고 불을 켰다. 일을 할 시간이다. 과거에 비해 업무량은 대폭 늘었지만 맡은 서류는 꽤 줄었다. 집에서 검토하기에 충분한 양이다. 누구는 지금쯤 서류 산에 파묻혀 있겠지만 별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 사이에 편지 몇 장도 끼어있었다. 엘사는 깃펜에 잉크를 묻혔다. 검정색 잉크 몇 방울이 책상에 떨어졌다. 이 시간이 기다면 서류들을 다 처리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편지의 답장도 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사는 밤이 짧게 끝나길 바라고 있다. 밤은 불길하고 악몽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으, 으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안나가 신음을 뱉어냈다. 엘사는 퍼뜩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안나의 상태를 살폈다. 안나는 이를 악 문채 괴로워하고 있었다. 엘사는 안나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자 안나는 동아줄 잡듯 엘사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아이의 악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엘사는 제 팔이 엉망으로 피멍이 드는 꼴을 그냥 지켜봤다. 중요한 건 팔 따위가 아니다.
안나는 악몽을 꾸고 있다.
안나는 잊어버린 네버랜드 일을 악몽의 형태로 겪고 있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아이들을 꾀어 납치하고, 어른들을 죽이는 안나 P. 팬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안나는 견디지 못했다. 기억의 잔재는 안나의 의식이 희미할 때, 주로 잠들 때에 나타나 안나를 헤집어 놓는다. 안나 본인의 기억만 되새겨도 힘든데 문제는 안나 뿐만 아니라 역대 피터 팬의 기억, 후크의 기억까지 봐버린다는 것에 있다. 꿈속에서 안나는 피터 팬이기도 했고 후크이기도 했다. 그들의 사념은 네버랜드를 버리고 사라진 요정 대신에 만만한 안나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꿈을 꾸는 동안, 그 사념에 지배된 안나는 몽유병처럼 방 안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갑자기 몸이 두둥실 떠오르기도 했다. 어쩔 때는 네버랜드를 없앤 엘사를 원망하며 죽이려고 목을 조르기도 했다. 어쩔 때는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울어재끼기도 했다. 어쩔 때는 스스로 제 혀를 깨물기도 했다. 어쩔 때는 갑자기 눈을 뜬 안나가 엘사를 못 알아보고 “누구?”라고 묻기도 했다.
엘사가 해줄 수 있는 건 눈물을 훔쳐 준다든지, 땀을 닦아준다든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면 등을 토닥여준다든지, 업어준다든지, 안나를 붙들어둔다든지- 같은 사소한 행위들뿐이었다.
엘사는 안나가 이렇게 아파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냐고,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플 수 있냐고 마녀에게 따진 적이 있었다. 그러자 마녀는 “네가 대신 아프고 대신 성장하려고? 2미터 50센티 정도 쑥쑥 크고 싶어졌니?”라고 신랄하게 깠다. 트롤은 저 아이의 시간이 정체된 만큼 남들보다 성장통도 더 클 거라고 말했다. 통증을 경감시켜주는 약을 주면서, 되도록 잘 때는 같이 있어주면서 상태를 보라는 주의도 들었다. 덧붙여 돌아오지 않을 머리카락 색을 보면서 괴로워하지 말라는 충고도 들었다.
마녀나 트롤이나 엘사의 속내를 꿰뚫고 있으면서 해주는 말은 180도 다르다. 그래서 엘사가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니, 마녀가 쫓아내듯 엘사를 밀어내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약봉지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해결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안나가 어른이 되면 된다.
‘보호자가 불안해하면 피보호자도 덩달아 불안해한다’
어디까지나 악몽이다. 아침이 되고 눈을 뜨면 안나는 악몽을 기억하지 못한다. 자랄수록 악몽을 꾸는 횟수는 줄어들고 어른이 되면 악몽은커녕 꿈도 안 꾸게 될 거란다. 하지만 엘사는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최선이라면. 최선이라면.
“엘, 엘사... 엘...”
“안나?”
엘사는 안나를 품에 안고 일어섰다. 가볍다. 칭얼거리는 안나를 안아들고 방 안을 서성였다. 괜찮아. 괜찮아. 하고 안나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이 시간을 견딘다. 어서 빨리 아침이 밝기를. 이 아이의 미소를 볼 수 있기를. 하염없이 바란다.
“내가 널 지켜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엘사는 안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아침이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기도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조금도 졸리지 않았다. 꿈 없이 잘 잤다는 표현이 적당하나,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하지만 곧 머리를 비웠다.
잠옷은 벗어서 침대 위에 개어 두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는 손은 능숙하고 재빨랐다. 그리고 초록색 리본을 손에 쥔다. 리본이야 직접 맬 수 있지만 이것만큼은 그 사람이 해주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평생 해줬으면 한다. 그러나 이 소망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다. 그 사람이라면 어른이 되어가니까 이젠 이것도 스스로 해야 한다-고 곤란한 듯 웃을 게 뻔하니까. 리본을 매달라는 말에 무슨 뜻이 숨겨져 있는 지도 모를 거다. 그 사람이라면.
어른이 되어간다는 건 대체 뭘까.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이마에 입을 맞춰주거나, 포옹을 해주거나... 어른이 되어버려서 셋 다 해주지 않으면 어쩌지? 같은 걱정을 진지하게 했을 때가 있었다. 아이라면 그 세 개를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다 받을 수 있지만, 어른이라면 그 세 개를 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직접 입에 담는 거니까 그 사람도 이 뜻을 헤아려줄 거라는 기대가 생긴다.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안 그럴 수도 있겠다. 그 사람이라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몸을 재촉했다. 안나는 응접실에서 마주친 하녀와 짧게 인사를 하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심장 고동소리가 귀에 들릴 듯이 크게 뛰었다.
“안나. 잘 잤니?”
아침햇살보다 더 눈부신 엘사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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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마지막 부분은 조금 더 성장한 안나의 이야기입니다. 악몽에 시달리거나 몸이 자주 아프거나 성장도 쉬운게 아니네요. 잡설 끝! 나머지 투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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