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이슈박스, 최근방문 갤러리
연관 갤러리
안경 갤러리 타 갤러리(0)
이 갤러리가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타 갤러리 안경 갤러리(0)
이 갤러리를 연관 갤러리로 추가한 갤러리
0/0
개념글 리스트
1/3
- 캐나다 직장문화에 대해 설명하는 유튜버, 괜찮은거 같아서 가져와봄 ㅇㅇ
- 여기저기서 모아왔던..구ㄱㅕㅇ하고 가세요(데이터) 츄우욱
- ㅓㅜㅑ 동물농장..페미 없던 시절..전성기..레전드..jpg 티롱씨4
- 엑스포 사진 보고 가십셔 새가슴
- 필린이의 런던여행 1편 ㅇㅇ
- 이준석한테 dm 답장왔다........................... ㅇㅇ
- 갤주님 .. 어제 공연중 셀프 마약 ..jpg 업햄
- 이붕이 머전서 플리+엑더스 당일치기한 후기 카르엠
- 자기가 진상인 줄 모르는 맘충 주갤현자
- 요즘 일본사이트에서 보이는 한녀...gif ㅇㅇ
- 대한민국에서 학교 9개가 모여있는 유일한 학교단지 먼치즈
- 일일음주 리뷰 236편 - 「개빡치주」 리뷰(나눔) 일일음주
- 사진은 항상 어렵다 동네백수
- (스압)넨도로이드 led 개조해봤다 ㅇㅇ
- 서승만님 근황 여우늑대
비만 오면 무너지는 조선읍성은 어떻게 쌓았을까? 1부
지난 연재글인 조선 읍성 vs 일본 산성 : 선진적일까, 후진적일까?(링크) 에서는, 조선 전기 읍성이 행정이나 치안 목적이 아닌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되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방어구조와 개념이 적용되었는지 일본의 전국시대 후기 이후 성곽들과 비교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읍성의 이러한 방어구조가 왜 제대로 달성되기 어려웠는지 읍성이 가지는 성격과 조선 전기의 사회, 경제적 특징들로 설명해 보고자 했습니다.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조선 전기 읍성에는 어떻게 지어졌고, 이로 인해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이것이 읍성의 방어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파고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선 전기 읍성의 특징 : 비만 오면 무너진다.석성(石城)에 이르러서는 노력과 비용이 꽤 많이 들 뿐 아니라, 또한 오래 견디지도 못하며 적을 방어하지도 못한다. 겉만 단단하고 속은 물러서 금이 가고 가라앉기도 하며 구멍이 난다. 두어 해를 지나지 못하여 봄의 해동기와 여름의 장마철에 그칠 새 없이 계속 무너진다.(春融夏澇。崩塌相續) 그리고 또, 적으로서 성을 공격하는 법을 아는 자가 등이 솟은 갑옷을 입고 쇠로 만든 용의 발톱 같은 갈고리를 밧줄에 매어 돌부리에 걸고 여러 사람이 잡아당기면 잠깐 사이에 무너질 것이니,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목민심서 공전(工典) 6조 / 제4조 수성(修城) 이전 연재글 화성의 현안(懸眼) : 정약용은 이론만 빠삭했다?(링크) 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정약용은 토목 및 건축기술의 실무에 능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기록은 참조하되, 그 원인에 대한 이해나 해석은 100% 신뢰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목민심서에 기록된 그의 조선 석축 성곽에 대한 비판은 참조할 만한 내용입니다. 다른 수많은 사료로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이죠. 서소문(西小門)의 옹성(甕城)이 장차 기울어지려 한다는 이유로 감역관(監役官)을 옹진(甕津)의 수자리[戍]에 귀양보냈다.태조 3년 2월 12일 (1394년) 밤에 폭풍우가 일어 도성(都城) 수구(水口)의 옹성(甕城) 1간이 무너졌다.태조 5년 7월 3일 1396년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도성(都城) 수구(水口)의 옹성(甕城) 1간이 또 무너졌다.태조 5년 7월 5일 1396년 울산군성(蔚山郡城)을 감독하여 쌓았는데, 두어 달이 못 되어 무너졌다.태종 16년 10월 10일 1416년 풍문에 듣건대, 평안도 의주(義州)의 금년에 쌓은 성이 반은 이미 무너졌다 합니다. 문종 1년 7월 27일 1451년함길도 회령(會寧)의 장성(長城)이 두만강(豆滿江) 물의 층격으로 인하여 무너지다.단종 1년 1월 28일 1453년신이 개성부(開城府)의 성자(城子) 가 일곱 군데 무너진 것을 아뢰었었는데, 이번에 종[奴]으로 하여금 다시 살펴보게 하였더니 두 곳을 고쳐 쌓았기 때문에 단지 다섯 곳이 있습니다.성종 24년 1월 3일 己巳 1번째기사 1493년평안도의 수령은, 새로 쌓은 성을 무너지게 하였다하여 이제 많은 사람이 파직하게 되었습니다. 중종 16년 9월 20일 1521년 29일 동문(東門)의 북쪽 옹성(擁城)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자 적이 일시에 돌격해 들어오는 것을 아군이 무너진 곳에 큰 대나무를 쌓고 적을 무수히 쏘아 죽이니 적이 또 물러갔습니다.선조 26년 8월 30일 신해 12번째기사 1593년신축한 평양(平壤)의 성곽이 비로 인하여 무너지자 비변사가 감사 이상길(李尙吉)을 파직시키고 추고할 것을 청하니, 따랐다.인조 3년 9월 3일 1625년 조선의 성곽에는 반복적으로 비로 인해 무너지거나 쌓은지 얼마 안되어 무너졌다는 기록이 실록에 상세히 남아 있습니다. 정약용이 말한 봄의 해동기와 여름의 장마철만 되면 무너진다는 설명과 연계할 수 있겠죠. 사실 한반도 석축성곽은 보수를 하지 않을 경우 예외적인 사례, 삼년산성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무너지는 현상은 자연스럽습니다.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돌을 쌓아올리는 메쌓기 방식을 사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무너질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죠. 고려나 조선 전기에 비해 성돌가공이 치밀했던 신라의 경우에도 남산신성비에 3년 안에 담당구역의 성벽이 무너지면 처벌 받겠다는 서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성곽이 매년, 또는 축성한지 몇달도 지나지 않아 무너진다는 것은 거의 1000년 이전의 고구려나 신라 성곽 보다도 구조적으로 취약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구조적 취약점은 어떤 결과를 불러올까요? ---신라 삼년산성의 8m에 달하는 높이----- 신라 삼년산성은 1500년이 넘게 건재하고 있는 8m 이상의 높은 성벽을 자랑합니다. 이런 높이와 오랜 시간에도 전부 무너지지 않고 상당부분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삼년산성의 성벽이 거의 통째로 주변에 매우 흔한 점판암을 쪼갠 판상형 할석(板狀形割石)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려서 구조적으로 안정적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잡석으로 아무렇게나 쌓아올렸다면 이런 높이는 불가능합니다. 성벽이 높아질수록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성벽이 무너질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즉 성벽의 높이를 높이는게 어려워진다는거죠. 옛날사람들도 이런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금나라 군대를 상대로 수성전을 벌였던 진규(陳規)는 그가 쓴 수성록(守城錄)에서 "성은 너무 높을 필요가 없다. 너무 높으면 비로 인해 무너지게 되고 쌓는데 비용과 힘이 많이 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만, 성벽이 너무 잘 무너져서 높이를 높일 수 없는 상황은 그가 추천하는게 아니었겠죠.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므로 우천에 의해 무너지기 쉬우니, 자연스럽게 높이를 높이기 어려워집니다. 높이를 높이면 더 잘 무너지니까요. 게다가 비에 의해 잘 무너진다는건 평상시 관리자인 지방관이 유지보수를 충실하게 안하면 순식간에 방어력을 상실한다는걸 의미합니다. 조선 전기 읍성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과 같이 드물게 분전한 것이 의외의 일일런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대체 조선 전기 읍성이 어떻게 지어졌길래 이렇게 무너진 걸까요?조선 전기 읍성은 어떻게 지어졌는가? 읍성의 대부분은 결국 성벽입니다. 성벽을 어떻게 쌓았는지 살펴본다면 왜 무너졌는지를 알 수 있겠죠. 먼저 성벽의 구조부터 살펴봅시다.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평지에 돌을 쌓아서 성벽을 쌓을 경우 주로 외벽과 내벽을 모두 돌로 쌓아올리는 협축(夾築) 방식을 사용하는게 일반적이었습니다. ----좌측 백암성 성벽의 단면, 우측 황룡산성 평지 성벽의 단면----- 단면을 보시면 알겠지만, 성벽 전체를 돌로 쌓아서 만들고 내벽 쪽도 석축구조입니다. 벽돌을 차곡차곡 쌓는 조적(組積, Masonry)식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방식은 천년 이상 지나간 이후에도 메쌓기로 지은 성벽이 남아있을 정도로 나름 구조적으로 안정적입니다. 하지만 조선 전기 읍성들은 평지에 지어진 경우에도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어졌습니다. 외벽은 돌로 쌓지만, 뒤쪽의 내벽은 경사지게 흙으로 쌓아올리는데, 이를 대체로 내탁(內托)이라고 합니다. 산성의 경우 옹벽 형태로 성을 쌓는 경우 자연스럽게 내탁(內托)이 되지만 평지에 성벽을 올릴 때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게 조선 평지성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로 만들어졌을까요? 먼저 조선 건국 직후에 시작된 한양 도성을 통해 초기 형태를 추적해 봅시다. -----한양 도성 회현자락과 백범광장의 태조시기 성벽 유구----- 한양 도성 성벽의 발굴사진을 보면, 바깥쪽에 면석을 쌓고, 2~4.8m 너비의 뒤채움부에 잡석을 채워넣었습니다. 이 시기 성벽은 태조때부터 숙종 이후까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최초의 태조 시기 성벽의 경우, 아주 일부만 가공된 성돌을 사용하여 외벽의 면석(面石)을 쌓았기 때문에 구분이 가능합니다. 태조 시기 성벽은 그 이후 시기에 비해서 뒤채움의 너비가 좁고, 세종 이후부터 좀 더 넓어집니다.----한양도성 유적전시관의 한양도성 성벽 단면도---- 한양 도성 성벽은 면석과 뒤채움, 그리고 그 뒤의 토축부라는 이후 조선 읍성의 전형적인 내탁식 축조방법에 대해 이해하게 해줍니다. 성벽의 외벽 부분을 석재로 쌓고, 그 안쪽의 뒤채움 부분에 잡석을 쌓으며 동시에 흙을 다져서 경사지게 쌓아올리고, 이 경사진 부분을 통해서 성벽 위로 올라가는 등성(登城) 시설로 활용하게 됩니다.----해미읍성 서북벽 단면도,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해미읍성 9차∼12차 발굴조사 종합보고서" ---- 여기서 기본적인 읍성 건축의 몇가지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외벽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렸으며, 성벽 상부의 너비는 2.8m~3m 정도입니다. 외벽 안쪽으로 뒤채움석이 해미읍성의 경우는 경사지게 계단 식으로 내려가고 그 위에 흙이 쌓여있는데, 보령읍성과 같은 경우는 수직에 가깝게 쌓여있고 경사지는 흙만으로 다져서 만들었습니다. 수직에 가까운 외벽, 잡석으로 쌓은 뒤채움부, 경사지에 다져놓은 토사층 3가지가 평지에 건축한 읍성 성벽의 구조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종 20년(1438년)에 조선은 축성신도((築城新圖)라는 읍성축조의 기준을 배포해서 석축성곽으로 읍성을 쌓도록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축성신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 축성법을 반대하는 세종 25년 겸성균주부(兼成均注簿) 이보흠의 상소문에만 남아 있습니다. 무오년에 성을 쌓는 새 도본(圖本)을 반강(頒降)한 이래로 관리가 입법한 뜻을 알지 못하고 법을 지키는 폐단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옵니다. 그 성을 쌓는 법이 내면(內面)에 돌 16척을 메우고 위에는 계단을 만들되, 박석(薄石)으로 펴게 한 것은 대개 진흙으로만 오로지 쌓으면 쉽게 무너질 것을 염려한 것이요, 처음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옵니다.세종실록 25년 11월 3일 여기서 새롭게 제시된 조선의 축성방식은 외벽으로부터 16척(포백척 기준 7.5m)로 뒤채움석을 쌓아올리는데, 그 위에 계단을 만든다(其上作爲階砌)는 설명은 뒤채움이 계단 형태로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경사지게 만들어지며, 그 위에 얇은 돌(薄石)을 깔아서 마무리한다고 이해됩니다. 이런 구조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세종 19년(1437)년 최초 축성된 웅천읍성과 언제 축성되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문종 1년인 1451년 이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동읍성입니다.-----웅천읍성과 하동읍성의 성벽 평면 및 단면도---- 세종 시기의 축성신도에 따라 계단식으로 축성된 모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계단식 구조는 도입된지 얼마 안되어 대체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개축된 웅천읍성에서 초축시기 성벽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다른 구조의 성벽이 발굴된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축성신도 이후로 추정되는 웅천읍성과 밀양읍성, 사천읍성의 성벽 단면도----- 여기서는 다시 한양도성의 성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성벽구조가 다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보흠의 상소내용은 계단식 축성에서 내탁식 축성으로의 변화양상을 이해하게 해줍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내면에 돌을 메워 반드시 넓이를 16척이나 하여, 백성의 힘을 거듭 곤하게 한 뒤에야 성을 견고하게 함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외면의 6, 7척은 오로지 큰 돌을 써서 쌓고, 내면의 7, 8척은 섞어서 흙으로 단단하게 쌓되, 다 쌓은 뒤에는 흙 2척을 덮게 하고 그 위에 떼를 입히되, 안으로 향해 경사하게 하여 물이 쉽게 빠지게 하기를 도성(都城)의 제도와 같이 하면, 사람이 오르고 내리기에 편리하여 적을 제어하는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세종실록 25년 11월 3일 이보흠은 자신의 이 견해가 본인의 억측이 아니라 군위현(軍威縣)의 수령으로 있을 때 영일성(迎日城)의 성벽 중 37척이 9년동안 무너지지 않았는데, 축성신도의 방식으로 다시 쌓았더니 하루아침에 비에 의해 무너졌다고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다만, 이보흠의 주장에서 돌로 쌓은게 더 잘 무너진다는 주장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며, 이후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문헌자료와 발굴자료를 통해서 기본적으로 조선 전기 읍성의 성벽 구조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계단식 구조로 남아있는 읍성 성벽들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인 형태는 면석을 쌓아서 수직에 가깝게 외벽을 만들고, 그 뒤에는 일정한 두께로 잡석을 채워넣어 뒤채움을 만들며, 그 뒤쪽에 경사지게 흙을 쌓아서 마무리하는거죠. 조선 전기 읍성의 기본구조는 이후에도 완전히 바뀌지 않고 유지됩니다. 조선 후기 성벽들도 이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면석의 형태나 크기, 가공상태, 뒤채움석의 너비에 변동은 있지만 기본 구조는 그대로 가거든요. 약간은 지겨운 역사공부를 통해 조선읍성의 성벽구조를 이해하셨다면 약간 더 흥미로운 소재로 넘어가겠습니다. 성벽구조만 봐서는 조선 읍성의 성벽을 100%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성벽을 유지하게 해 주는 외벽의 면석(面石)을 살펴봅시다.감성 카페 스타일의 성돌을 사용한 읍성의 외벽 -----제주돌담 스타일의 감성카페, 참조 : blog.naver.com/kookyheri/221251098060 ----- 힙스터 스타일의 감성카페가 유행인 지금, 너무 완벽하거나 깔끔하면 감성없는 사람일런지도 모릅니다. 이런 후손들의 감성을 우리 선조들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요? 조선 전기의 읍성들은 너무 딱딱하고 정형적인 디자인보다는 자연적이고, 거칠고 개성적인 느낌의 컨셉으로 외벽을 쌓았습니다.----조선시대 면천읍성의 잔존 동벽, 서벽, 옹성의 성돌---- 면천읍성은 조선 전기에 최초 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충청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한 면천읍성의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성벽들은, 성벽의 3.44m까지는 중대형(76~110x44~110cm)에 달하는 석재가 사용되고, 그 이상부터는 매우 작은 크기(26~60x14~30cm)의 석재가 사용됩니다. 사용된 성돌은 균일하게 쌓을 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면첩읍성의 석재들은 나름 채석될 때 사각형에 가깝게 쪼개내어 방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쌓는데 그나마 용이했으리라 보입니다. 하지만 크기가 일정하게 맞추고 조합부(Joint)를 딱 맞추기 위한 치석(治石)이 이루어지지는 않아서 줄을 이루어 쌓는 지 못하고, 돌들 사이에 끼움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면천읍성 정도면 나름 잘 가공되고 큼직한 성돌을 꽤 높이까지 사용한 편입니다.-----웅천읍성 동남부 외벽과 남벽의 성돌---- 조선 전기 읍성의 성벽에 사용된 성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성벽 하부의 기단석(基壇石), 즉 기초로 한줄로 깔려 있는 석재 위에 길이나 너비가 1m나 그 이상에 달하는 대형석들을 1~2줄로 쌓습니다. 이 대형석들은 자연석이거나 쪼개내기만 한 할석(割石)들입니다. 위 사진의 웅천읍성 남벽의 사람과 하단부 석재들을 보면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그 위로 점점 작은 돌을 쌓아 올리게 되는데, 성벽 중간쯤부터 급격하게 작고 불규칙한 크기의 석재들이 사용되며, 성벽이라기보다는 돌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성돌은 자연석이나 할석이 주로 사용되고 가공이 잘 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고, 성벽 하단부는 꽤나 큰 대형석, 2~3m 위부터는 급격하게 작아지는 중, 소형석이 사용된다는 것! 밑줄 쫙! 아주 중요합니다. 물론 모든 읍성이 이렇게 조잡한 석재만을 사용하는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읍성 성벽이 복원된 성벽들에 비해 사용된 성돌에서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이나 단순히 쪼개낸 할석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공된 성돌을 읍성에서 사용하는건 조선 후기에 개축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경주읍성의 성벽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총독부 박물관 유리건판 참조---- 경주읍성의 경우, 둥근 자연석과 넓적한 석재가 혼합되어 사용되어 있는데, 이런 석재들은 천년고도인 경주의 사찰에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찰의 석상이나 기단석이 사용된 경우도 나타나죠. 조선 전기 읍성의 성벽을 쌓는 성돌들을 가공되지 않거나, 단순히 쪼개기만 해서 크기나 형태가 일정하지 않은 석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줄을 맞춰 성벽을 쌓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때문에 조선 전기 읍성의 성벽은 일명 허튼층 쌓기(Rubble Masonry)나 막쌓기(Random Masonry) 방식으로 돌을 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진산성 2차 수축성벽과 신라~통일신라 시기의 면석과 쌓기 방식---- 이전 연재글인 통일 신라 성곽의 발전과 한계(링크) 에서 고대-중세 한반도 성곽의 면석 가공의 양상에 대해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습니다. 고구려나 중후기 신라 및 통일신라의 석축 성곽에 사용된 면석들은 완벽하진 않지만 섬세하게 가공되어 있으며, 일정 규격화되어 있기 때문에 줄눈이 수평을 이루어 교차하도록 쌓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평줄눈을 맞추는 방식을 바른층쌓기(ashlar masonry)라고 합니다. 고구려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한 때 한반도 석축성곽은 면석을 섬세하게 가공해 수평으로 줄을 맞추고, 수직 줄눈(Joint)가 교차하도록 정연하게 쌓는 방식으로 발전해나갑니다. 그러나 고려를 지나 조선 전기에 이르면 면석의 가공 수준이 떨어지고, 조적(Masonry) 품질이 떨어지게 되는거죠. 이걸 보고 역시 조선 읍성은 일본에 비해 허접하다고 이야기하실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전국시대 후기에 등장해서 실전을 치르던 시대의 석축성곽을 쌓는 방식인 이시가키(石垣)들도 대부분 이런 성돌과 쌓기 방식을 사용합니다. 이런 것을 노즈라즈미(野面積み)라고 합니다. ---일본 효고현의 다케다성(竹田城)의 노즈라즈미(野面積み) 이시가키 참조: https://shirobito.jp/article/554 --- 임진왜란 즈음인 1596년 근처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케다성(竹田城)의 이시가키에 사용된 거의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이나 할석을 사용한 노즈라즈미 이시가키가 당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석재 가공으로 이러한 틈을 줄이는 작업은 우치코미하기(打込接ぎ)라고 해서,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에도시대에 가서야 일반적이 되지요. 조선 읍성의 성돌이 이렇게 자연석이나 할석을 사용하게 된 건 고려시대부터로 추정됩니다. 이전 연재글인 고려 축성기술의 퇴보는 왜 발생했는가?(링크) 에서 이를 설명하고 있으니 안보셨거나, 보시고 난 후 너무 오래지나 까먹으셨다면 다시 읽어보시길 바랍니다.----파주 덕진산성의 조선시대 추정 성벽과 조선 읍성의 외벽 모습----- 이렇게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이나 할석을 사용해 외벽을 허튼층쌓기 방식으로 줄맞추지 못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것은 그 이전의 한반도 성곽과 조선 전기 성벽을 구분하는 좋은 구분기준입니다. 대체로 외벽의 하부를 대형 자연석이나 할석을 사용하며, 상부에는 작은 돌을 사용하는데, 발굴과정에서는 대부분 대형 자연석이나 할석을 사용해 쌓은 외벽의 하부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성돌의 가공상태, 크기, 쌓기 방식들은 조선 전기 읍성의 구조와 유지보수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이에 대해서는 일단 조선 읍성의 성벽 구조를 다 다룬 후에 상세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자 외벽에 사용된 성돌을 살펴봤다면, 이제 성돌과 외벽 만큼 중요한 조선 읍성의 뒤채움 구조를 살펴봅시다.2부(링크) 로 이어집니다.
작성자 : lemiel고정닉
차단설정
차단설정을 통해 게시물을 걸러서 볼 수 있습니다.
[전체 갤러리]
차단 기능을 사용합니다. 차단 등록은 20자 이내, 최대 10개까지 가능합니다.
설정된 갤러리
갤러리 선택
설정할 갤러리를 선택하세요.
[갤러리]
차단 기능을 사용합니다. 전체 설정과는 별개 적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