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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할머니의 돈쓰는 법

운영자 2014.10.28 10:51:33
조회 932 추천 0 댓글 0

30년간 변호사를 하면서 여러 삶의 모습들을 보았다. 며칠 전 장관을 하던 대학후배가 찾아왔다. 함께 사무실 근처 식당의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예수님 말씀대로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았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식당에도 차안에서도 상석이 있기 마련이었다. 

“엄 변호사님이 선배니까 이제는 상석에 앉아야 하는 게 아닌가?”

장관은 인사말을 하며 상석에 가 앉았다. 그가 내게 하소연했다. 

“사람들이 지금도 모두 장관이라고 불러주면서 대접을 해 줘요. 그런데 돈이 없다니까요. 장관이면 연금이라도 타는 줄 아나 봐요.”

장관을 마친 그는 시골에 가서 고구마농사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잠시 입었던 옷인 장관직책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인상이었다. 전에 다니던 교회에도 장관이 두 명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도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채근담을 읽으면 벼슬은 잠시 입는 옷이라고 비유했다. 사람들이 몸통이 아니라 그 옷을 보고 허리를 굽힌다는 것이다. 또 누더기 옷을 입으면 그 옷을 보고 무시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옷을 입든지 개의치 말고 건강한 몸통을 만들라고 했다. 요즈음은 아주 부자였던 선배와 자주 바둑을 둔다. 부모 때부터 여유 있던 선배는 제주도에 요트와 말이 네 필이나 있었다. 네 명의 운전기사가 그를 모셨다. 신문사까지 경영했다. 그러나 그의 엄청나던 재산이 한 게이트 사건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안개같이 사라져 버리고 그는 몇 달간의 복역 후 욥 같은 인생이 됐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새 그는 지금 80가까운 노인이 됐다. 갑자기 아파서 입원했는데 치료비도 없었다. 노부부 둘이서 사는 변두리의 아파트도 세를 사는 집 이었다. 며칠 전 그와 동네기원에서 바둑을 둘 때였다. 그가 한탄같이 이렇게 말했다.

“손자가 어렸을 때 ‘우리할아버지는 내가 요구하면 뭐든지 해주는 사람이야’라고 자랑하고 다녔어. 그런데 이젠 손자를 만나도 만원 짜리 지폐 한 장을 줄 수가 없는 신세가 됐어. 그리고 이 나이에 내가 벌어먹어야 할 처지가 됐고 말이야. 참 한심한 인생이야. 내가 지금 제일 후회되는 게 뭔지 알아? 부자일 때 좋은 일을 못해봤다는 거야. 하나님이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시면 정말 안 그럴텐데 말이야.” 

그의 뼈저린 진정한 후회였다. 바둑을 둔 후 우리는 가장 싼 주먹밥을 사서 나누어 먹었다. 성경은 부(富)도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안개라고 했다. 반면에 더러 지혜로운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 내가 다니는 동네 지압원장이 얼마 전 죽은 단골할머니 고객의 얘기를 이렇게 했다. 

“젊어 고생하며 번 돈으로 조그만 시골 땅을 가지고 있던 할머니가 계셨어요. 시에서 그 땅을 유명한 음악가의 기념관을 만든다고 해서 갑자기 보상금을 받았어요.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살 돈이었지요. 그런 돈이 생기면 대부분 벌벌 떨면서 못쓰거나 자식들한테 빼앗기는데 이 할머니는 달라요. 며느리와 살기가 아무래도 불편했는지 따로 집을 얻어 나가신 후 파출부를 두 명이나 뒀어요. 월급을 후하게 주니까 파출부가 얼마나 정성으로 모셨는지 몰라요. 손자들이 올 때마다 정확히 100만원씩 주셨어요. 물론 며느리나 아들딸한테도 섭섭지 않게 줬지요. 그러니 자식과 손자들이 아무리 바빠도 할머니한테 자주 드나들었어요. 한번은 아프셨는데 큰 병원 VIP실을 빌리셨어요. 어디 다닐 때가 있으시면 비싼 모범택시를 불러 타시더라구요. 주변사람한테도 후하게 돈을 쓰시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아직 얼마간 돈이 남아 있더래요.” 

지혜로운 노인이었다. 돈도 자기가 쓴 만큼이 진짜 번 게 아닐까. 삶에서 젊음도 직책도 돈도 결국에는 모두 소멸하는 과정이다. 인생은 체념과 포기의 연속이다. 순간순간 지금 여기서 가슴속에 천국을 담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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