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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했던 시절

운영자 2015.02.25 10:41:26
조회 1023 추천 0 댓글 2
지하철역에서 올라와 10분쯤 걸으니까 문정동 로데오 거리가 나왔다. 횡단보도를 건너 네거리 초입의 롯데리아가 들어있는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7층의 적막한 복도 끝의 조용한 사무실이 친구 K가 노년을 보내는 방이었다. 그는 아침 일찍 그 방으로 출근해 혼자 음악을 듣기도 하고 책도 보다가 오후 3시쯤이면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와 바둑을 두기로 약속을 했었다. 그가 방한가운데 바위같이 묵직하게 앉아 있다가 나를 맞이했다. 그는 찻잔을 가지고 문밖에 있는 냉온수기로 가서 뜨거운 물을 받은 후 돌아와 탁자에 올려놓았다. 찻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그가 인터넷으로 주문한 새 바둑판이 아직 비닐도 뜯지 않은 상태로 놓여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바둑을 두고 사십년이 넘었는데 될지 모르겠어.”

그가 포장비닐을 뜯은 후 흰 바둑알을 하나 집어 화점에 놓으면서 말했다. 내가 검은 알을 들어 반대편 변의 소목에 놓으면서 말했다.

“나는 말이야 평생에 요즈음 같이 편안하고 행복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평일에 이렇게 친구와 함께 느긋하게 바둑을 둘 수 있다는 건 나이를 먹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제는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는 엄마도 없고 돈 벌어오라고 눈치 주는 아내도 없잖아? 잘난 체하고 누가 출세했나 하는 경쟁에서 주눅들 일도 없구 말이야. 강가의 조약돌처럼 세상 흐름에서 밀려나니까 이렇고 자유롭고 평안이 오는 거야.”

그가 바둑판의 3.3에 돌을 놓고 나서 말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이 먹는다는 게 행복이고 감사야. 내일 죽는다고 하더라도 별로 한이 없어.”

늙어가면서 어떻게 순간순간을 즐겁게 보낼 것인가가 요즈음 최대의 숙제다. 며칠 전에도 동창 딸의 결혼식장에서 몇몇 친구들과 테이블에 함께 앉아 식사를 할 때였다. 나는 그들이 노년에 어떻게 즐겁게 보내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난 암 때문에 한 2년 죽어가다가 살아났어. 거의 암3기에 발견했는데 수술을 해서 직장을 15센티 가량 잘라냈지. 죽을 줄 알았는데 새로운 삶을 얻은 거야. 요즈음은 삶이 즐거워.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늙어서 하려니까 그거 발음이 아주 어렵더구만.” 

그 말을 들은 다른 친구가 말했다.

“나는 동네 주민 센터에 가서 기타를 강습 받고 있어. 코드를 몇 개 배워주더니 요즈음은 옛날 70년대 우리가 부르던 가요를 연습시키는 거야. 박인희가 부른 ‘모닥불’ 같은 노래를 치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어. 잘 외워지지 않아서 문제인데 하여튼 즐거워. 진작에 배울 걸 그랬어.”

또다른 사업을 하는 친구가 말했다.

“나는 작은 텃밭을 만들어서 일해. 흙을 만지는 즐거움이 어떤건지 처음 알았어. 내가 하루만 가지 못해도 싹들이 지쳐서 나를 쳐다보는 거야. 시원하게 물을 주면 생명력이 충만해 좋아하는 모습을 봐.”

각자 나름대로 삶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환갑을 계기로 배우고 싶었던 바둑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손녀가 바둑 반에 들어갔다. 손녀에게 한 판 둘 때 마다 천원을 준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틈이 나면 바둑 초급수준인 친구들을 찾아가고 있다. 문정동 로데오거리에 혼자 지내는 사무실을 가지고 있는 K가 그 대상이었다. 

“평생 언제가 가장 행복했었어?”

내가 친구 K에게 물었다. 내가 요즈음 떠올리는 화두였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중학교 때부터 우리 음악을 같이 했잖아? 나는 무대에 올라가 노래를 불렀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었어.”

그의 말에 나는 짙게 공감했다. 우리는 공통의 추억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렀다. 우리는 중학교 3학년시절 밴드를 조직했었다. 그가 베이스키타에 보컬을 맡고 나는 드럼을 쳤다. 청계천에서 구입한 불법 복사한 엘피판을 사서 듣고 들으며 팝을 공부했다. 우리는 종로2가 YMCA 옆에 있는 세기음악학원 음악실을 빌려 연습을 했었다. 당시는 뮤지션들의 공연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우리들은 당시 재주연주를 하던 미도파쌀롱과 화신쌀롱을 몰래 드나들었다. 벤쳐스 악단과 비틀즈 그리고 롤링스톤즈의 곡과 연주들을 익혔다. 당시만 해도 첨단에 속하던 미국그룹 아이언 버터플라이의 ‘인어가타 다비다’나 크림의 ‘화이트 룸’도 열심히 연습했다. 고등학교 때 YMCA강당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학교에서는 우리들의 리사이틀을 놓고 교무회의가 열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겉멋이 들은 불량학생은 아니었다. 그냥 음악이 좋았을 뿐이다. 우리들의 음악행진은 대학까지 이어졌다. 각 대학 축제에 가서 연주를 했다. 연주가 있는 날은 낙원상가 아래 죽 늘어서 있던 세발용달차에 앰프와 스피커 그리고 악기들을 싣고 탈탈거리는 엔진소리를 들으며 공연장으로 갔었다. 청진동쪽에 마련한 음악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연습을 했다. 레퍼트리를 다양하게 늘렸다. 레드 제플린의 하이웨이스타부터 시작해서 연주의 폭을 넓혀갔다. 어려운 외국곡은 음대생들에게 부탁해 악보를 땄다. 우리들의 음악은 프로들과는 달리 연주하고 노래하는 그 순간의 기쁨자체가 목적이었다. 연주를 하다보면 나의 영혼은 멜로디의 바다 속에 들어가 유영을 하고 있었다. 감정의 물결 속에서 손발이 저절로 드럼위에서 움직였다. 그해 여름 낭만이 가득 찬 연포 해변가의 임시로 만들어진 가설무대에서 연주를 했었다. 밤늦은 시각 일을 마치고 우리들은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곁들인 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먹었다. 우리들의 절정은 이대 대강당에서의 마지막 리사이틀이었다. 나름대로 공연기획을 치밀하게 진행했다. 하루는 연습실에 갔더니 바닥에 누워있는 싱겁게 생긴 친구가 있었다. 그가 연출을 맡기로 했다고 한다. 그의 옆에는 시켜다 먹은 짜장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가 지금 유명한 전유성씨였다. 공연에 필요한 경비는 티켓을 팔았었다. 당시 베이스 기타를 치던 K가 걱정을 하며 내게 말했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 어머니 몰래 공연을 해야 할텐데 말이야.” 

“연주하는 게 뭐가 어때서? 대마초를 피워 법에 걸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내가 되물었다.

“아니야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가 화가고 삼촌이 가수여서 평생 딴따라만 보면 지겹다고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드는 분이야. 아들은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 분이야.”

아들이 연예인이 되겠다면 집안에서 난리가 나던 시절이었다. 공연날 K가 겁먹은 얼굴로 나를 보고 말했다.

“우리 엄마한테 오늘 공연하는 거 걸렸어.”

“어떻게?”

내가 되물었다.

“엄마가 하는 의상실에 이대생이 옷을 맞추러 왔는데 우리 공연 티켓을 우연히 거기서 꺼내 놓고 자기들끼리 말을 하는데 티켓에 인쇄되어 있는 내 이름을 어머니가 본 거야. 어떻게 하지?” 

우리들은 용기를 얻기 위해 작은 병에 담긴 위스키 한병씩을 마시고 무대 위로 올라갔다. 이천명 가량의 관객들이 어둠속에 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몇 곡이 끝나고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K가 내게 말했다.

“처음 두곡을 부를 때 까지는 어두운 객석 어딘가 우리 엄마가 보고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두근거렸는데 이제 괜찮아. 편하게 노래 부를 거야.”

그 다음부터는 감정들이 활짝 열렸다. 뜨거운 연주가 계속됐다. ‘스테어웨이 투 헤븐’이라는 곡을 연주할 무렵에는 앰프옆 스피커에서 타는 느낌이 전해질 정도로 뜨거운 감동이 왔다. 무대에 도입 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싸이키 조명 아래서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 후 우리는 각자 자기 길을 찾아 삶의 현장으로 갔었다. 40여년이 흐른 후 나는 노인이 되어 K와 마주앉아 저녁내기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다. K가 내게 말했다. 

“일생을 돌이켜 봐도 난 그 시절이 제일 행복했던 것 같아. 그런데 그때 얘기를 우리집 애들에게 말해주면 ‘에이’하면서 믿지를 않는 거야. 아버지가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걸 모르고 항상 늙고 뚱뚱한 걸로 아는 거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가장 좋아하는 놀이에 빠져있던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 볶음밥과 탕수육을 앞에 놓고 우리는 서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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