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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야, 무슨 일이야? 괜찮아?”
크리스토프가 눈밭에 쓰러진 안나를 부둥켜안으며 소리쳤다. 안나는 두 눈으로 살짝 새어나온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어, 그래,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아무 일도... 끄흑...”
“여보, 울고 있잖아.”
크리스토프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안나가 이번엔 두 눈에서 펑펑 흘러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겨우겨우 닦아냈다. 안나가 숨을 헉헉 들이 내쉬고 마신 다음 그녀의 앞에 세워진 올라프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같은 질문은 무의미했다. 안나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는 못해도 뚜렷하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방금 과거로 여행을 다녀왔고, 그곳에서 과거의 일들을 조금은 바꿔놓았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바꿔놓은 것은 없었다. 몇 가지 사실 관계는 조금 바뀌었겠지만, 그저 모든 것이 제자리로 가도록 도왔을 뿐이다. 허락받은 만큼만 하고 왔다. 그녀가 허락받은 만큼만, 과거를 누리다 왔다. 하지만 기왕에 허락받을 수 있다면...
“여보.”
안나가 완전히 울음을 멈추고 진정한 뒤에 크리스토프를 꼭 껴안았다. 크리스토프는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엉거주춤 자신도 안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야, 아내가 눈사람을 만들다가 갑자기 쓰러진 뒤로 오열을 하고는 자신을 껴안으면 그로서는 상당히 놀랄 만도 한 일이었다.
“내년에도 하자. 그리고 내후년, 그 내후년에도 하자, 이 일.”
“뭐? 올라프를... 다시 만드는 거?”
“응, 그래, 맞아. 이 일, 나랑 같이 해줘. 몇 년이 지나도, 내가 하자고 하면 그때까진 같이 해줘. 매년, 첫눈 오는 날마다. 마치 엘사가 뿌리는 것만 같은 눈송이들이 바닥에 쌓여가는 날마다, 나를 도와주겠다고 해줘. 해줄 수 있지?”
“어, 응... 그래, 물론이지! 자기가 해달라는 일인데 그 정도도 왜 못해주겠어?”
크리스토프는 진심으로 안나의 말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안나의 말을 이해하기 이전에,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부탁을 따라주고, 그녀의 감정을 달래주고 싶었다. 안나는 미소 지었다. 그것은 방금 그녀만이 느낀 깨달음, 그녀만이 받은 허락과 그녀만이 누리는 행운을 담은 미소였다. 그래서 남들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스러운 남편의 표정에서 안나는 크리스토프가 그것을 이해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녀는 더 크게 활짝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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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은 그다지 춥게 지나가지 않았다. 안나는 그날 이후로도 종종 크리스토프와 눈싸움을 하기도 했고, 눈사람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형태가 늘 올라프와 같았던 것은 아니었고, 늘 코에 당근을 꽂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크리스토프의 눈에는 안나가 그날 이후로는 일부로 올라프의 형상을 똑같이 만들어내기를 기피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니면 올라프의 형상을 만들려면 눈덩이를 가지고 공을 엄청 들여야 하기 때문에 안나가 굳이 그런 공을 들여가면서까지 올라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아 그저 그렇게 보인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해 겨울에 완전한 올라프가 다시 만들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겨울은 지나갔다. 의례상으로 엘사의 장례식이 간소하게 치러진 것을 제외하면 특별한 일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아닌 그런 소소한 겨울이 지나갔다.
봄은 봄이었다. 안나가 여왕이 된 이후로 처음 맞는 봄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봄은 별다른 이야기가 필요없는 그냥 그런 봄이었다. 이두나와 아그나르 없이도 아렌델은 아무 문제없이 돌아갔던 것처럼, 엘사 없이도 아렌델은, 그리고 이 세상은 아무런 문제없이 흘러갔다. 평소엔 겨울을 봄을 준비하기 위한 시련쯤으로 생각해왔던 안나는, 그해 봄에는 자신이 봄을 전혀 다른 감정으로 맞닥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봄의 도래를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계절을, 마치 겨울로 가기 위해 거쳐가는 시련인 것 마냥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왕실을 위해 오랫동안 봉사해온 시종 겔다를 마주쳤을 때, 안나는 문득 든 의아함에 얼굴을 찌푸리고 겔다에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겔다.”
“네, 폐하?”
“그때 당신이 맞았나요?”
난데없는 질문에 겔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겔다가 조심스럽게 안나에게 되물었다.
“그... 무슨 말씀을 해주시는지 설명을 해주셔야...”
“아니, 됐어요. 바쁜데 내가 붙잡아서 미안해요. 이만 볼 일 봐요. 늘 고마워요.”
안나가 고개를 저으며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겔다는 적당히 안나 앞에서 고개를 숙인 다음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안나는 멀어져가는 겔다를 흘끔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닌 것 같아... 늘 정확하다고 믿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아... 어쩌면... 그 사이에 바뀐 걸지도 모르고.”
설사 그렇다고 해도 많은 것들이 바뀌진 않았다. 어차피 모든 것들은 제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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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은 예년보다 유난히 일찍 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안나는 겨울이 일찍 온 상황이 전혀 밉거나 싫지는 않았다. 사실 그 해 첫눈이야 말로 그녀가 가장 손꼽아 기다리던 것이었으니까, 오히려 반가운 기분이 앞섰다. 그리고 늦가을에 댐을 부수고 숲을 구한 이후 매년 가을의 막바지를 마법의 숲에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던 그녀이기에, 그 해 첫눈은 그녀가 생전 처음 마법의 숲에서 맞는 첫눈이었다.
“이 숲의 겨울은 어떤 모습인가요?”
안나가 옐레나에게 물었다. 옐레나가 여왕의 질문에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대답했다.
“겨울 자체는 여느 숲의 겨울과 다를 것이 없다고들 합니다. 신비로운 것은 겨울 그 자체가 아니라, 겨울이 이 숲과 조화되는 방식이지요.”
“그런가요? 그럼 그건 어떤데요?”
“여느 계절들과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계절들은 이 숲에서 솔직해지죠. 계절 속에 담긴 시적인 의미보다는, 그 계절이 가진 스스로의 모습을 똑바로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안나는 옐레나의 말이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숲에서 계절이 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을 시적으로 늘어놓는 옐레나의 설명에는 재미있는 구석이 있었다. 안나는 천천히 눈이 덮여가는 주위를 바라보며 허니마린에게도 말을 건넸다.
“자연에 대한 이야기 많이 알고 있죠? 언니가 얘기해줬던 거 같아요. 5정령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도, 다 허니마린이 말해준 거였다고요.”
여기서 안나가 직접 자신의 죽은 언니 이야기를 꺼내자 허니마린은 조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안나가 편하고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건넸기 때문에, 그녀도 그다지 무겁지 않은 심정으로 안나의 말에 대답을 할 수가 있었다.
“네, 어릴 때부터 관심이 많았거든요. 정령이랑, 이 숲에 얽힌 옛날이야기들. 결국은 다 자연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어요. 모든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자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놔둔다는 사실이죠.”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놔둔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늘 그렇게 느끼고 있었고.”
안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나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치 뭔가를 떠올리면서 스스로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는 것 같은 태도였다.
“융통성을 발휘해주곤 하는 이야기들은 없었나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모든 건 아래로 떨어지고, 시간은 앞으로만 흘러가잖아요. 그런데, 거기에는 융통성이란 게 발휘될 수가 없는 건가요? 자연이 스스로 정한 규칙을 어기고 자비를 베풀어주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건가요?”
“있었잖아요. 직접 겪으시기도 했고.”
허니마린의 말에 안나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잠시 뒤, 안나는 허니마린이 안나가 1년 전 겨울에 겪은 잠깐 동안의 시간여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허니마린이 말하는 것은 바로 엘사의 존재였다. 세상 사람이 흔히 가질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을 타고 났던 엘사의 존재. 그녀의 어머니의 선행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졌던 존재인... 엘사의 존재.
“가장 진실한 마음이나 가장 선량한 행동은 자연 그 자체를 감격시키기도 한다고 해요. 그러면 자연은 자신이 느낀 그 진실함을 가득 담아, 가장 진실한 선물, 자신이 정한 규칙을 거스를 수 있는 권리를 주기도 한다 하네요. 비단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일은 아니에요. 사람에게 벌어지는 일들만이 우리에게 특별하게 느껴질 뿐이지. 엘사도 분명 그 중 하나였을 거예요. 하지만 그 선물이 무조건적인 것은 결코 아니에요.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가도록 정해져 있거든요. 하늘이 내려주는 가장 자비로운 선물도 그것을 거역할 수는 없대요.”
“그렇구나.”
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잠시 고민하고 있던 수수께끼가 있었는데, 그렇다면 모든 게 설명이 되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허니마린.”
허니마린도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이제 눈이 제법 쌓여가고 있었다. 안나는 가방에 손을 가져가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남편을 찾았다. 옐레나는 안나가 누구를 찾는지를 알아차리고 안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국서분이시라면 라이더와 함께 있으실 겁니다. 두 분은 곧장 어울리시고, 그 장소도 늘 똑같으니까 찾기 어렵진 않으실 겁니다.”
“네, 맞아요, 거기요? 크리스토프가 오늘은 또 무슨 엉뚱한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럼 가서 얘기 좀 나누고 올게요. 매년 하기로 약속한 게 좀 있어서.”
“네, 가는 길에 조심해서 다녀오시길.”
옐레나가 고개를 한 번 끄덕 숙여 목례했다. 안나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매해 첫눈. 그녀가 맞는 겨울의 첫눈,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자연이 그녀에게 시킨 일을, 그녀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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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그래, 도와주기로 했었지.”
크리스토프에게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다가가서 그녀의 가방을 톡톡 두드렸을 뿐이었다. 크리스토프는 안나의 제스처를 곧장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나에게 달려왔다. 라이더가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분은 무슨 가족행사라도 있으세요? 눈 오는 날마다요?”
“네, 그런 셈이죠. 가족행사보단 조금 크고, 나라행사보단 조금 작은 일이에요. 라이더도 도와줄래요? 기왕 이 자리에 있다면 돕는 사람은 많을수록 좋기도 하거든요.”
라이더는 물론 흔쾌히 동의했지만, 안나가 그 가족행사가 바로 사라져버린 올라프의 형상을 다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약간은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가 올라프를 봤던 적이 지나치게 적어서 그의 형태를 잘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탓도 있지만, 너무 민감한 가족행사의 일부에 자신이 끼어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라이더는 결국 정중히 안나의 제안을 거절한 다음, 순록 방목장을 떠나 허니마린과 옐레나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안나는 그러려니 하는 모습으로 떠나는 라이더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크리스토프가 슬쩍 안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오늘은... 갑자기 쓰러지거나 하지 않는 거지? 그러다 운다던가...”
“오늘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내 생각이 옳다면 오늘도 그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 거야.”
“뭐?”
크리스토프가 깜짝 놀라 안나에게서 슬쩍 뒤로 물러섰다. 크리스토프가 안나의 표정을 유심시 살피며 물었다.
“...바라고 있는 거야?”
“응?”
“그런 일이 또 벌어지길, 바라고 있는 거냐고.”
“물론이지.”
“물론이지? 난 그래도 꽤 걱정했는데?”
“나쁜 일 아니니까 걱정 마. 설명해주긴 어렵지만, 그렇게만 알아둬. 난 좋은 꿈을 꾸고 오는 거라고. 잠시 눈 속에서 잠들어 아주 행복한 꿈을 꾸고 오는 거라고.”
확실히 크리스토프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안나의 말이었다. 그리고 지난겨울 그렇게 격하게 눈물을 쏟았던 것도 안나였다. 의미 없는 말일 수는 없었다.
크리스토프와 안나는 조용히 마법의 숲에서 올라프의 형상을 다시 한 번 만들어냈다. 양 팔을 꽂고, 단추를 얹고, 안나는 심호흡을 훅 들이킨 다음 싱싱한 당근을 올라프의 얼굴에 꽂아 넣었다.
스스륵. 안나는 잠자듯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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