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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델의 군인으로서 정중하게 모셔라. 당장의 상황이 이렇게 된 대에 대한 원흉이고, 함부로 다루기엔 위험한 존재이긴 하지만, 일단은 국왕폐하이시니까.”
한스가 기절한 엘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지시했다. 아렌델의 군인들은 복종의 의미로 한스에게 경례했다. 한스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위즐튼의 부하 두 사람을 쳐다보며 엄포 놓듯이 말했다.
“내 지시를 무시하고 함부로 독단행동을 한 일에 대해서는 공작에게 직접 말해서 책임을 묻겠소. 공작이 직접 지시한 것이겠지?”
공작의 호위병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한스는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추궁해봤자 의미가 없겠군. 그래, 그럼 알아서들 하시지. 하지만 여왕에게 진짜로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당신들 탓이오.”
아렌델의 군인들은 엘사의 양손을 밧줄로 대강 포박한 다음 모포로 엘사의 몸을 둘둘 둘러쌌다. 그리고 마치 통나무를 옮기듯, 두 사람이 각각 엘사의 머리와 발목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려 어깨에 얹었다. 따로 들것을 가져오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것이 군인으로서 국왕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예의바른 이송 방법이었다.
안나는 문득 자신이 이 순간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엘사가 북쪽산 얼음성에서 저들에 의해 쓰러져 아렌델까지 돌아오게 되었을 때의 상황. 그때 엘사는 의식이 없었다. 엘사가 의식이 없었고, 엘사가 무언가를 하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안나는 이 상황에 대해 굳이 생각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은 안나 입장에서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직접 꿈같은 상황에서 꿈과 같은 형태로 놓이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순간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안나에게는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북쪽산의 맨 꼭대기. 정상을 넘어선 정점. 점을 콕 집어 바위로 깎아낸 것 같은 그 위치에서 안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북쪽산 궁전을 내려다보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분명 5년쯤 되었을 것이다. 오래전 일을 묘사할 때 쓰는 두 가지 표현, 즉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진다.’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중에서 안나는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 자기 스스로에게도 확답하기가 어려웠다. 두 가지 표현이 모두 정확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다시 생각해보면 둘 다 뭔가 문제가 있는 표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냥...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것은 조금 어색했다. 아직은 예의를 차릴 줄을 아는 한스의 모습도, 엘사를 사랑받는 군주가 아닌 어쩔 수 없이 예의를 지켜야 하는 위험인물저도로 대하는 저 경비병들의 모습도, 그리고 불안과 불안, 그리도 또 다시 불안한 태도로만 일관하다 어이없이 쓰러져버린 그녀의 언니의 모습도. 안나의 기억에 따르면, 적어도 엘사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순간까지도 그 태도만큼은 당당했다. 저 옛날 시절의 언니하고는 달랐다. 그래도...
“생긴 건 그대로네. 잠자는 것 같은 모습도.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야. 엘사.”
안나가 옆에 서있는 바위절벽을 붙잡은 채로 중얼거렸다. 잠자는 모습. 그래, 만약 엘사가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게 아니라, 저 모습으로 사실은 잠자고 있는 것이라면, 엘사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지금 안나가 꾸는 것만 같은 이 꿈같은 꿈, 혹은 꿈같은 현실과는 무엇이, 얼마나 다를까? 하지만 그 전에 안나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바로, 안나가 어째서 이곳 이 시간대에 오게 된 것인가 하는 문제. 정말로 중요한 사실은 그 무엇도 바꿀 수 없도록 되어있는 그녀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면 되는 것인지, 어디까지 바꾸도록 허용되어 있는지, 그리고 또 실제로 어디까지 바꿀 것인지. 이 자리에서 엘사를 빼돌려서 구출해낸다? 그런 일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안나는 무엇을 위해서 여기에 보내졌을까. 이대로 흘러가버려도 좋을 이 시간에서, 안나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곳에 서 있는 것일까.
안나는 천천히 산꼭대기에서 무릎을 구부린 채 산 아래로 기어가듯 내려갔다. 눈이 덮인 경사를 스르륵 엉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간 안나는 바위 뒤에 살짝 몸을 숨긴 채 얼음성 근처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병사들을 코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나가 보기에 이들의 움직임은 단순히 ‘분주하다’라고 말하기엔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안나가 보기에 이들은 곤란해 하고 있었다. 이 북쪽산 꼭대기에서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가장 편리한 루트인 얼음 계단이 무슨 이유인지 부서진 상태였기 때문에 엘사를 제대로 운반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마시멜로 때문이었을 거라고, 안나는 추측했다. 물론 이 계단을 통하지 않아도 산을 내려가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방법은 훨씬 더 큰 노력과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특히나 여왕을 조심스럽게 운반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안나는 병사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지켜보기 위해 바위 뒤에서 슬쩍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순간, 안나는 발아래에서 불안한 감촉을 느꼈다.
발아래가 미끄러웠다.
“어? 어어어?”
안나는 원래 이 바위 뒤에서 저들에게 눈에 띄지 않고 숨어있을 생각이었다. 일단 안나의 모습은 안나 그대로였고, 나이가 얼마나 들었건 간에 안나가 지금 여기서 모습을 드러내면 모두가 그녀를 알아볼 것이 뻔했으니까. 그런 행동은 과거에 ‘허용된 것 이상’의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았고, 안나는 그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실수로 얼음판에 발이 미끄러져 바위 앞으로 스르륵 튀어나오는 순간, 안나는 자신이 거대한 곤경에 빠진 줄로만 알았다. 다행히도,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아니 최악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다행인 것인지도 몰랐다. 안나는 너무 빠르게 미끄러졌다. 사람들이 그녀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정말 빠르게 미끄러졌다. 초고속으로 미끄러져간 안나는 그대로 엘사를 옮기고 있던 아렌델의 군인들과 충돌했고, 군인들은 깜짝 놀라 엘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떨어진 엘사는 충돌 이후에도 여전히 미끄러지고 있던 안나의 몸 위에 뚝 떨어져, 안나는 그대로 의식을 잃은 상태의 엘사를 껴안은 채로 아래로 쭉 미끄러지는 꼴이 되었다. 그러니까. 계단이 부서져있는... 절벽 아래까지 그대로 미끄러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한스가 깜짝 놀라 충돌이 일어난 군인들 쪽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지?”
“저... 저희도 모릅니다! 뭔가가 갑자기 달려와서 우리에게 부딪히고...”
병사 한 명이 변명하듯 대답했다. 한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병사를 추궁했다.
“그건 됐고, 여왕은?”
“그 우리가 놓친 뒤에... 앗!”
병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눈 위에 선명하게 남은 미끄러진 자국은, 자신들이 떨어뜨린 엘사가 절벽 아래까지 미끄러져 떨어져버렸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한스가 서둘러 절벽 쪽으로 달려가 아래를 흘끔 내려다보았다.
“여... 여왕폐하는...”
“살아계실 가능성은 있어.”
한스가 말했다.
“아래에 쌓인 눈의 양은 이곳보다도 훨씬 많을 거야. 떨어진 높이가 얼마건 간에, 눈이 몇 미터 이상만 쌓여줬다면 적어도 얼어 죽을 일은 없는 엘사 여왕은 생존했을 수 있다. 그나저나 갑자기 뭐에 부딪힌 거지? 눈덩이? 다른 눈사람?”
“보질... 못했습니다.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럴 리는 없고... 역시 어디서 굴러 떨어진 바윗덩어리나 눈사람은 아니었을지...”
“눈사람이었다면 엘사 여왕이 이런 상황에서의 탈출을 위해서 일부로 심어둔 대비책이었을지도 모르고... 바위였다면 곤란해지지... 행여나 여왕이 바위와 함께 떨어졌다면, 도중에 충돌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한스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위즐튼의 호위병들 쪽으로 가볍게 부르는 손짓을 했다. 위즐튼의 두 부하들은 한스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험악한 표정을 짓고 섰다. 한스가 위즐튼의 부하들을 올려다보며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산을 내려가기 전 이 아래에 있을 여왕을 찾아봐야만 하겠소. 이 수색에 협조하시오. 그렇다면 당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넘어가겠소. 물론, 공작에게도 아무 것도 묻지 않을 것이지.”
위즐튼의 두 부하들이 서로를 흘끔 쳐다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척 봐도 두 사람의 의견은 정확히 일치했다. 어차피 여왕 암살이 실패한 이상, 두 사람은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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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의 몸 위는 포근했다. 일단 확실히 해둘 점은 있었다. 마시멜로가 두 사람을 직접 받아주지 않았다면 아마 위험했을 것이라는 점. 이곳엔 생각보다 눈이 많이 쌓여있지 않았고, 꽤 위험한 바윗덩이나 얼음조각이 난무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리가 잘린 채 이곳에서 절뚝거리고 있는 마시멜로의 도움이 없었다면 엘사와 안나 둘 다 어딘가 크게 다쳐버리는 수도 있었다. 안나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마시멜로를 향해 정중하게 한 번 인사를 했다.
“고마워 마시멜로. 어, 그러니까 그 이름 지금 마음에 들어?”
마시멜로는 안나에 대한 별다른 적개심을 드러내진 않은 채 가볍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안나는 그것을 호의의 표시로 받아들였다. 마시멜로가 그녀를 공격하지 않을 거란 확신을 받은 안나는 곧장 쓰러져있는 엘사에게 다가갔다. 다행히도, 안나가 꼭 껴안고 충격을 대신 받아준 덕분에 엘사의 상태는 겉으로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안나는 엘사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베게 눕힌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언니가 죽었다는 걸 덤덤하게 인정하고 살아가던 그녀에게 갑자기 다시 엘사를 허벅지에 눕혀두고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릎 위에서 엘사가 몸을 살짝 뒤척이는 것이 느껴졌다. 안나가 천천히 엘사의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정신이 들어?”
안나가 물었다. 엘사가 목소리에 반응하며 실눈을 가늘게 떴다.
“엄마?”
그 순간, 안나는 폭소를 터트릴 뻔했다. 동시에 고마웠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 이 자리에서 허락된 대화, 이 자리에서 엘사에게 베풀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달은 기분. 엘사가 이두나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크게 뜨려는 시도를 했지만, 안나는 가볍게 엘사의 눈꺼풀을 덮어 엘사의 시도를 방어했다.
“그래, 아가야. 내가 왔어. 내가 바로 이 자리에서, 널 달래주기 위해 온 거란다.”
“꿈...이에요? 엄마, 나 꿈꾸고 있어요?”
“그래, 맞아. 나도, 너도. 다 꿈이야. 너에게만 꿈인 게 아니라, 나에게도 모두 꿈이란다.”
엘사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안나는 엘사가 울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도록 엘사의 두 눈 위에 살포시 손바닥을 얹었다. 손바닥에 옅디옅은 촉촉함이 느껴졌다. 안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엘사를 타일렀다.
“할 말이 있지 않니?”
“엄마...”
엘사가 몸을 살짝 들썩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꿈꾸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반쯤 깨어난 상태인지 전혀 분간하지 못하는 태도였다.
“저... 실패했어요. 엄마가 격려해주신 대로, 해도 좋다는 대로 된 거 하나도 없어요. 제가, 제가 가장 기뻤던 순간은...”
엘사가 말을 멈췄다. 안나가 천천히 엘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랬던 순간은?”
“엄마 말을 몽땅 어길 때였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몽땅 어길 때요. 숨기는 것도 포기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포기하고,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도 포기하고, 무엇보다도... 안나에게 좋은 언니가 되는 것도 포기하고...”
“너를 찾았니?”
엘사는 말을 멈췄다.
“그 모든 대가로, 너를 찾았니?”
“두 시간 일찍 오셨다면, 그렇다고 대답했을 거예요.”
엘사가 말했다. 안나가 미소를 싱긋 지으며 다시 물었다.
“무엇 때문에 지금은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거야?”
“사실은 모든 게 제약됐었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난 내 힘만 제약된 건줄 알았어요. 그래서 그것만 푸는데 성공하면 제 모든 걸 다시 되찾는 것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실은 제 관계가 제약된 게 더 중요했던 것 같아요. 엄마, 내가 그 선까지 넘어도 괜찮은 건가요? 엄마가 가르쳐주신 모든 걸 어겨도요...”
“내가 그렇게 가르쳤다고?”
안나가 애써 이두나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려 애쓰며 말했다. 사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 어느 정도는 완숙해있던 안나의 목소리는 어느 정도는 서서히 그녀의 어머니를 따라가고 있던 상태이기도 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내가 가르쳤던 건 너 자신을 찾으라는 거였단다. 그 외엔 아무것도 말했던 기억이 안나. 눈을 뜰 수 있겠니?”
안나가 엘사의 두 눈에서 손을 치웠다. 엘사가 처음에는 천천히 실눈을 뜨더니, 잠시 뒤 눈을 온전히 뜨고 안나를 올려다보았다.
“안나?”
“쉿. 이제 다시 마저 자.”
안나가 엘사의 코를 톡 한 번 두드렸다. 엘사는 반항하려는 것 같았지만, 안나가 나긋한 노랫가락을 읊조리며 엘사의 코를 몇 번 쓰다듬자 도저히 저항하질 못하는 것 같았다. 간만에 엄마를 만나는 꿈을 꾸고 있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해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엘사의 전신에 힘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안나는 엘사의 몸을 모포로 잘 둘둘 감싼 다음 눈이 쌓인 바닥에 내려다놓았다. 안나가 마시멜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넌 일단 숨어 있어. 사람들이 올 텐데, 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공격하려 할 거야. 그리고 네가 공격받으면, 지금은 엘사가 위험해져. 내 말 알아들었지?”
마시멜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나는 그가 적당히 알아들은 것이라 생각하고 눈사람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암벽을 타는 소리, 분주한 병사들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여왕이다! 우리가 떨어뜨린 여왕이 있다!”
“상태는 어떤가?”
“다행히 눈 위에 떨어진 것 같다! 무사할지도 모른다!”
안나는 현장에서 벗어나 몸을 감추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한스, 그리고 아렌델 병사들이 고래고래 뭔가 소리치는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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