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스 반 미리스 1세, Old Soldier Holding a Pipe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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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언트, 키가 사십 피트는 되는 거인이 아군 소총수 부대 너머 서 있었다.
우리가 소총수만 발견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지.
소총수들 앞에 버티고 선 한 줌의 보병들이 사격 대형을 짤 시간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몇몇은 검방패를, 몇몇은 할버드를, 몇몇은 창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와해된 중대의 생존자들이
급조된 대열을 이루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대열이라고 할 것도 없었어. 대열을 이루기에는 그들 생존자는 너무 소수였지.
그들은 필사적인 항전을 계속했지만,
거인이 떡갈나무를 통때로 뽑아온 것 같은 몽둥이를 한번씩 휘두를 때마다 마치 낙엽이 쓸려 나가듯이 여기저기에 패대기쳐졌다.
너는 본 적이 있느냐? 인간이 상상하지 못할 힘으로 찌그러지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거인이 몇몇 병사를 밀가루 반죽처럼 완전히 뭉개 버리자 그걸 지켜본 중대원 몇몇이 헛구역질을 하기도 했지.
우리 중 망가진 시체에 익숙하지 않은 풋내기는 한 명도 없었음에도 말이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정오의 태양처럼 명확했다. 우리는 별다른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사격 대열을 짠 소총병들의 대열 사이에 어깨를 밀어넣은 뒤 비집고 나가 거인의 주변을 둘러쌌다.
"산개 대형! 겨눠 창!"
거인의 몽둥이에 한번에 휩쓸려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인원 사이에 거리를 뒀다.
교본 그대로의 대응이었지.
배치를 마치자 거인의 팔다리를 감싼 두꺼운 가죽을 훑고 지나간 수많은 냉병기의 자국이 보였어.
앞서 싸운 전사들이 놈에게 남긴 상처들이지.
안타깝게도 그러나 그 중 어느 것도 놈에게 치명상이라 할 만한 것을 입히지는 못했다.
오육피트에 불과한 도끼창병의 필사적인 손짓은 놈의 주요 장기까지 가 닿지 못했겠지...
"인대와 근육을 노려라! 몽둥이를 휘두른 사이 발목 근처를 집중적으로 찔러!"
말이 쉽지만 누군가 죽는 순간에 공격하라는 뜻이었어. 그러나 지금껏 그랬듯 우리는 겁먹지 않았다.
거인이 팔을 높이 들어 내 옆에 선 누군가를 후려갈겼고,
가엾은 그 친구는 막대에 맞은 공처럼 거의 십 미터는 떠올라 지붕 어딘가에 부딪혔다.
그 충격력으로 미루어 보아 몽둥이에 맞는 순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을 것이 확실했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놈의 발목에 힘차게 창을 꽂았지만...
그건 무슨 통나무에 날붙이를 꽂아넣는 듯한 느낌이었어.
물론 내가 지쳐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무슨 계집애같은 몸놀림으로 그걸 찔렀던 건 아닌데 말이야.
나는 이걸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고, 주변에 흩어진 누군가의 할버드를 잡아 들었다.
그러는 사이 사수들이 장전을 마치고 탄환을 발사했고 말이다.
숙련된 제국 사수들에게 황궁 연돌만큼이나 높게 솟은 표적을 맞추는 것은 눈을 감고도 할 만한 일이었지.
그러나 그 탄환들이 모두 표적에 훌륭하게 명중했음에도 그 거인 놈은 신음을 내뱉을 뿐 쓰러지지 않았다.
가죽을 뚫고 들어간 탄환들은 그것 하나하나가 멧돼지를 단숨에 눕히고도 충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괴물의 피부에는 누군가 좀 큰 송곳으로 찌른 것 같은 정도의 피밖에 흐르지 않았지.
이건 시간 싸움이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놈이 우리 중대원을 전멸시키느냐, 우리 뒤의 사수들이 먼저 놈을 걸레짝으로 만드느냐의 싸움...
놈이 팔을 휘두르는 궤적과 사거리는 우리 창 갈이보다 훨씬 길었기 때문에 우리 중대원이 죽어나가는 속도를 늦추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소총수 쪽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 말이야.
차탄이 발사되고, 중대원이 더 죽고, 차탄이 발사되고...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연기가 내 주변을 모조리 감싸 마주하고 있는 거인의 다리만 겨우 보일 정도였다.
몽둥이가 연기 사이를 헤집고 지나가면 그 궤적이 잠시 보였다가
다시 진공을 파고드는 연기 때문에 시야가 마비되는 것의 반복이었어.
거인이 노리는 게 바로 다음 순간에 내가 된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 힘이라곤 어디에도 없었지.
허나 시간이 계속 흘렀고, 우리는 이제까지 늘 그래 왔듯이 결코 도주하지 않았다.
이건 거인 놈이 그 멍청한 머리로 생각하던 상황이 아니었겠지.
흥. 그런 냄새나는 쓰레기들이 생각하는 것이라곤 뻔하지 않겠느냐.
지금까지 훈련받지 않은 야만족, 민간인 따위나 잡아먹고 다니며, 싸움은 원래 이런 것이란 착각을 했을 테지.
작은 놈들이란 자기가 팔만 몇 번 휘두르면 다들 겁에 질려 도망치기 바쁜 개미 같은 것들이라고 알고 있었을 거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안다. 그래. 우리 부모님과 그분의 이웃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천만에! 인간이 정말로 전쟁하는 방식은 그딴 게 아니다.
우리의 전쟁 방식은 자갈과 모래를 가지고 벽돌을 빚어 내는 것이지.
흩어지는 것들을 모아 반죽해 바람 한 줌도 통과하지 못할 철벽을 만들어 내는 것 말이다.
놈의 몸뚱아리 위에 붙은 머리는 마치 폭풍 속의 버드나무 꼭대기마냥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세히 보기 어려웠지만,
힐끗힐끗 보이는 놈의 못생긴 표정에서 역력히 당황하는 기색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이 작은 것들은 도망치지 않는 걸까?
놈은 타고난 그 덩치만 믿고 휘적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겠지만, 지금까진 그걸로도 충분했을 게다.
우리들처럼 조직화된 군대를 만나기 전까진 말이야.
다시 거인이 몽둥이를 휘두르자 갑자기 무언가 등 뒤에서 엄청난 힘이 엄습해 내 등을 잡아당겼다.
난 잠시 이번에야말로 내가 몽둥이에 맞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알베르트가 몽둥이의 궤적에 있는 나를 보고 번개처럼 내 등 뒤를 잡아당겨 내 목숨을 살린 것이었지.
"병신아, 눈으로 그걸 보려고 들면 안 된다! 풍압으로 몽둥이가 날아드는 걸 먼저 느껴!"
괴물 같은 새끼.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움직일 수 있는 줄 아나 보지.
날렵한 솜씨로 굴러 그대로 내게서 멀어진 그는 그림같이 완벽한 자세로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들더니
몽둥이가 훑고 지난 궤적 어딘가에 발포한 다음 다시 연기 사이로 멀어져갔다.
또다시 소총수들의 차탄이 발사되고, 이번엔 누군지 모를 어떤 사수의 한 발이 놈의 몸뚱아리 위의 눈을 맞췄다.
놈이 휘두르던 몽둥이를 집어던지고 황급히 양손으로 눈을 감싸안는 게 초연 사이로 희미하게 보였거든.
뜨거운 납덩이가 놈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꿰뚫자 놈의 체액과 피가 한 양동이는 될 듯이 아래로 쏟아졌지.
이 일격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놈이 처음으로 몸을 돌려 달아날 채비를 하는 듯 보였지만, 어림도 없다.
눈부신 속도로 장전을 마친 사수들이 또다시 발사했고...
이번 사격은 충분히 치명적이었지. 놈이 마침내 무릎을 꿇더니, 그 거대한 몸뚱아리를 앞으로 미끄러뜨렸다.
놈이 쓰러지는 충격 때문에 주변에 있던 우리 모두가 엉덩방아를 찧었고,
나 역시 마침내 놈의 추악한 면상을 더욱 잘 볼 수 있었다.
인중이 갈라지고 피부엔 곰보 자국, 귀는 말라 비틀어진 생선 껍질처럼 말려 올라가 있고...
그 실패한 창조물의 생김새에서 질병과 전투, 근친 교잡의 끔찍한 흔적들을 볼 수 있었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쓰러진 거인은 숨을 마구 헐떡이고 있었고 놈이 숨을 한번 내뱉을 때마다
뜨겁고 피 서린 김과 함께 변소가 통째로 썩어가는 듯한 역겨운 냄새가 쏟아졌다.
그래. 쓰러졌을 뿐 놈은 아직 살아 있었지. 하지만 어느 쪽이 승리인지는 명확했다.
승리의 함성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지 못했어.
주변을 둘러봤을 땐 한쪽 팔이 부러진 알베르트와 중대원 몇 명 말고는 아예 보이지 않았거든.
함성을 지를 사람들도, 거기에 호응할 사람들도 없었단 말이다.
출발할 때 고작 쉰 명도 안 됐던 대열의 생존자는 이제 열 명도 되지 못했다...
순식간에 탈력감이 덮친 나도 할버드를 짚고 무릎을 꿇었지.
뭐가 됐든 우리가 중대 전력으로서 완수할 수 있는 임무가 여기까지임은 명백했다.
곧이어 사수 무리 쪽에서 멋들어진 매의 깃을 털모자에 매단 사람 한 명이 자기 키만한 라이플을 들고 달려오더군.
"세상에. 당신들처럼 매서운 자들은 본 적이 없소.
울릭께서 여기 계셨다면 필시 그대들처럼 싸웠을 게요. 대체 소속이 어디요?"
멋진 사내였어. 아마도 소총수 중대의 대장이었겠지. 표준 라익스펠을 쓰고 있었지만
동부나 동북부 어딘가의 것으로 분명한 촌스러운 억양을 느낄 수 있었다. 모르겠군. 아마 호흘란트?
그러자 거인의 머리 건너편에서, 알베르트가 스스로 부러진 자기 어꺠뼈를 짜맞추며 무심하게 소리치는 게 들리더군.
"우린 이제 소속이 없소!"
어색한 정적이 잠깐 찾아왔다. 그래 뭐. 알베르트는 좆같은 새끼니까.
뭔가 극적이거나 멋진 대화를 원한다고 거기에 어울려 줄 위인은 아니었지.
"이 영웅들의 지휘관 되시는 분이오?
무한한 감사와 함께 이 사냥감을 마무리할 영광을 당신께 드리겠소!"
"우라질, 난 팔이 부러졌소! 누구든 대충 팔이 아직 붙은 사람한테 시키시오!"
"..."
맙소사. 그렇게까지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야.
그게 내가 그 거인을 마무리짓게 된 이유었지.
주저앉은 나는 솔직히 누구든 씨발 저 염병할 총탄으로 대충 저 못생긴 대가리의 어디든 쏴 죽이면 될 일
아니냐고 생각했었다. 지쳐서 기절하기 직전인 상황이었거든.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그걸 내뱉진 않았어.
우리에게 다가온 소총수의 중대장이 얼마나 흥분해 있었는지, 당신들은 영웅이요, 우리 모두 목숨을 빚졌소, 알트도르프 거리에
당신들 중대 이름을 딴 거리가 만들어질 거요 하고 참새처럼 재잘댔거든.
그도 베테랑임에 분명할진대 그렇게 신병처럼 구는 걸 걸 보니 좀 한심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아무튼 그렇게 흥분한 곳에다가 좆까라고 차마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제기랄. 나는 알베르트랑 다르게 분위기 파악을 할 줄은 알았단 말이다.
알베르트가 자기 어깨와 씨름하고 있는 동안 그가 거인을 처형할 영광을 돌리겠다며 차선임인 나를 독촉했어.
마지못해 창대를 거머쥐고 거인 머리 앞으로 간 나는 놈의 눈을 들여다봤다.
아직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것의 눈동자에서 공포를 읽을 수 있더군...
그래. 놈도 공포란 걸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 조금 만족스러웠다.
동공만이 겨우 조금씩 진동하고 있는 놈에게서 매순간 생명력이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 보였지.
뒤를 쳐다보자 아직 남은 소총수 중대원의 전체가 거인의 대가리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고 있었어.
거기서 내가 뭘 어쩌겠느냐?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놈의 눈동자에 창대를 힘껏 찔러 넣었지.
놈의 지저분한 체액과 피가 단박에 튀어 내 몸을 적셨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뭔가 큰 비명이나 발악을 기대했지만 그런 건 없었어. 그냥 있었던 건 잠깐의 경련과 더 크게 벌어진 아가리 뿐이었지.
창대가 중간 어딘가에 잠깐 걸리적거린 것 같았지. 힘을 더 주어 비틀자 곧 질긴 막 같은 것을 관통하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곧이어 부드러운 무언가를 한창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창대의 거의 2/3정도를 놈의 대가리에 깊숙이 꽂고 난 나는 손을 털고 천천히 뒷걸음쳤다.
한참 몸을 부르르 떨던 거인이... 어느 순간 진동을 멈추더군.
그것 뿐이었어.
그게 이 공성전의 끝이었다.
...여담이지만 나는 나중에야 거인을 직점 참살하는 것이 얼마나 별일인지 알게 됐지.
그 소총수 대장과 알베르트가 얼마나 큰 영광을 내게 양보한 것인지 그땐 조금도 몰랐어.
어떤 드워프는 거인 살해를 평생의 업으로 삼고 그것만을 위해 일생을 바치기도 한다더군.
비록 그걸 내가 혼자 해 낸 것은 절대로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건 엄청난 일이었지.
소총수 대장이야 그렇다 쳐도 그게 알베르트 나름의 호의였을지도 모르겠구나.
쓰러진 거인 근처에 우리가 주저앉아 있자 곧 적장의 머리를 취하신 폐하께서 데스클로를 타고 날아 오르시어 승리를 선포하셨다.
초연이 흩어지고, 포성이 멎고, 곳곳을 메우던 함성 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하며 부상자들이 나직하게 울부짖는 소리만이
이 저주받을 장소를 가득 메웠지.
패잔병들과의 산발적인 교전 소리가 멎기까지는 좀 오래 걸렸지...
언제나처럼 말이야.
혈투였다. 끔찍한 전투였지.
사상자가 절반 이상은 나왔던 것 같구나.
사상자의 그 놀라운 비율은 역으로 우리 원정대의 기적 같은 숙련도를 반증하는 것이었지.
보통 공성전에서 그 정도의 사상자 비율을 기록하기 전에 반드시 부대가 와해되거나 패주하게 되거든.
그러나 그 희생을 딛고 우리는 마침내 승리했지...
전투가 끝나자 알베르트 말대로 우린 더 이상 소속이 없었다.
우리 연대의 사수들은 성벽 밖에서 교전하다 투석기에 맞아 찌그러지고,
우리 창병 중대의 최종 생존자는 나와 알베르트를 합해 여덟 명에 불과했거든.
다른 중대 역시 내성에서의 다른 전투 중에 대다수가 전멸했다.
연대 깃발은 남았지만 그 이름을 내건 부대가 재건되려면 수십 년은 다시 걸릴 테지.
난 거기서 죽어간 그 친구들의 이름을 지금도 모두 기억하는데...
모든 부대가 그렇게 치명적인 상태인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우리 연대는 전멸에 준하는 피해를 입은 것이 확실했다.
사실 처음부터 우리 부대의 희생은 예정되어 있었어.
특히 근접 보병대는 공세의 최첨단에 서서 성문을 가장 먼저 통과하는 역할을 맡았으니 대다수가 죽을 것이 확실했지.
그래서 우리가 어땠을 것 같으냐? 폐하를 원망했겠느냐?
전혀! 우리는 죽을지언정 패주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네게 이 말을 해 주고 싶구나.
우리는 병사라면 숙련된 고참부터 가장 하찮은 말단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서 죽을지언정 결코 패주하지 않았어.
오늘날까지 난 내가 내 손으로 거인을 죽였다는 사실보다도 우리 중 누구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자랑스럽다.
그리고 그게 우리 원정의 가장 영광된 날이었다.
이 역사적인 승리의 소식은 순식간에 황무지 전역으로 퍼져나갔지.
직접 행차한 하이 킹과 알려진 모든 클랜에서 온 사신들,
가끔씩은 각 클랜의 왕이 그 눈부신 승전식의 자리에서 폐하의 선포를 경청했어.
'이천년도 더 전에 처음 새겨진 서약에 따라...
선제후들의 지도자로 선출된 나는 제국을 대표해
드워프의 정당하고 적법한 영토인 카라크 여덟 봉우리의 소유권을 다시금 안그룬드 클랜의
명예로운 계승자에게 양도한다.
이는 어떤 이해 관계도 없이 인간과 난쟁이 사이의 동맹을 굳건히 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아직 그대들의 선왕인 쿠르간 아이언비어드와 지그마께서 서로에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세상에 천년 후라는 게 찾아올 수 있다면, 그때도 우리는 서로에게 신실한 자들로서 남으리라.'
그래. 이천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거기까지 달려간 황제가 있었으니
천년 후에도 그 날은 충분히 사람들 기억 속에 남겠지. 거기 내 이름까지 적혀 있지는 않겠지만,
그 역사적인 순간에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난쟁이와 함께하는 연회와 교류식, 각종 논공행상이 있었지.
그 자존심 강한 순수 혈통 난쟁이들이
인간을 움기가 아닌 드워리, 명예 다위, 서약 수호자라고 거리낌없이 부르며, 그들의 맥주를 권하고, 서로의 무구를 교환하고...
그런 일이 앞으로 이 세상에 한 번이라도 더 있을지 모르겠구나.
난 아직도 그 날을 떠올리면 가슴이 뜨거워지곤 한다.
...아무튼, 그게 내가 거기서 도끼창 중대로 소속이 변경된 이유지.
그래 뭐. 집이 벼락을 맞아 박살나면 이사를 가야지 어쩌겠느냐.
정말로 소속된 부대가 아예 없어졌으니 말이다.
황무지에서의 전투는 그게 마지막이었다. 뒷일은 난쟁이들이 맡았어.
여덟 봉우리 탈환이라는 고무적인 성과 덕분에 드워프들이
그린스킨을 박멸하는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거든.
그들이 수백 수천년 동안 걸어잠그고 있던 홀드를 열고 나와 황무지 아래로 진군하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었지.
지하에선 한 번도 햇빛 아래 빛난 적이 없었을 그 아름다운 만듦새의 무구들을 난 봤다.
그 염병할 불모의 땅에 다시금 질서라는 게 찾아올 수 있다면 그건 난쟁이들 덕분이겠지.
우리는 북쪽으로 올라갔다. 미덴하임 동을 거슬러 노르트란트까지 올라갔지.
마주치는 어떤 적들이던 우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우리의 적수는 영원히 없을 것만 같았지.
이맘때쯤 우리는 다연장 로켓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화포로도 파괴할 수 없는 전차를 가지고 있었고,
난쟁이들이 만들어 준 병장기들로 무장하고, 마법 들린 부적을 가진 일당 백의 전사들이 함께했다.
우리의 마법사들은 천둥과 불벼락을 능히 몰고 다녔고, 기병대는 우레와 폭풍이 뒤따르게 했다.
어디든지 우리는 우리들 집처럼 마음대로 누비며 폐하 뜻에 어긋나는 어떤 자들이든
망설이지 않고 쳐부쉈단 말이야.
모두가 제국의 힘을 두려워했고, 우리의 철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혼돈을 추종하는 군세가 키슬레프 어딘가에서 패주했다는 말을 들었다.
두 발로 걸어다니는 쥐 인간들의 왕국이 드워프들의 공성전에 박살났다는 소문이 들려왔지.
헌츠마샬 각하가 신대륙에서 보내온 금은보화가 원정을 지탱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양이라는 낭보도 있었고.
어딜 가든 승전보, 승전보 뿐이었어.
마침내 우리 앞엔 노스카 정벌만이 남아 있었다. 이 위대한 원정의 마지막을 장식할 장소 말이다.
그래. 마침내 우리는 선왕 지그마께서도 완전히 정벌하지 못한 곳까지 넘봤다.
여기만 쳐부순다면, 제국 북쪽의 위협이란 영원히 없어질 것이다.
밤마다 약탈에 몸을 떠는 아녀자도, 상선 나포를 걱정하는 선장들도 없어지고,
북쪽 제후국들의 병력들도 더 유연한 배치가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위대한 원정 어딘가에서... 그 일이 일어났다.
처음이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어떻게 그게 일어났는지도 몰라.
그러나 지옥도 얼어붙게 만들었을 그 북쪽 대륙의 추위를 견디고 있었을 때쯤
그게 어쨌든 일어났다고야 말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내가 설명하기 힘든 마법 같은 순간들이 항상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느냐?
처음엔 그닥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했어.
북대륙 어딘가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처음으로 진격로를 잘못 잡았다.
실수였을지도 모르지.
제때 충원 병력과 보급품을 수송하기로 되어 있던 함대가 유빙에 부딪혀 좌초됐다.
불운이었을지도.
그러나 전술적인 실책으로 인해 공세 좌익을 담당한 연대 하나가 고립되어 전멸했을 때는 다들 더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물론 그 피해는 전투의 승리에는 아무런 영향을 가져오지 못했어.
그건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다. 거시적인 시점에서 보면 전력 일부가 손실됐을 뿐인, 그뿐인 일이었지.
그게 폐하의 사소한 착오였에서 온 것이든, 지휘체계의 혼선이 빚어낸 비극이었든 모든 전쟁에 따르곤 하는 그런
부분적인 오판 말이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겠느냐?
단 한 번도 말이다.
이런 건 신들이 직접 그 손길로 지휘하는 군대가 아닌 한 모두가 겪게 마련인 역경들이지.
하지만 우리의 군대가 바로 그 전쟁의 신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인 것 같지 않았느냔 말이다.
모두가 그걸로 이 안타까운 비극이 끝나기를 바랬지만, 그런 일들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설명하기 너무나도 힘든 일이구나. 그런 일을 뭐라도 되는 것처럼 설명해야 한다는 게.
우린 어느 샌가 그런 전쟁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십 년을 넘게 계산된 수식과 사표처럼 딱 떨어지고 가장 합리적인 그런 전쟁만 해 왔는데,
어느 순간 이런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갑자기 기억해버린 거지.
웃기지 않느냐? 우리는 제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의 전사들임과 동시에
가장 어리광쟁이들이었어.
우리는 그 불확실한 기적에 너무나도 의지하고 있었지.
다들 입 밖으로 감히 꺼내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그 정확했던 지시들은 대체 어디 간 거야? 하고 말이야.
너 역시 누군가 천상의 연회에서 갑자기 시궁창으로 내던져지면 의문 정도는 갖지 않겠느냐?
우리에겐 이것이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이었다.
폐하께서 갑자기 무능해지셨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고말고. 그분께선 여전히 병법을 통달하신 분이었고, 무예의 달인이셨고
제국의 누구보다 용맹하신 분이었으니까.
단지 신들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 같은 그 순간들이 우리를 떠났을, 그뿐인 일이란 말이야.
우리는 단지 필멸자들의 전쟁을 계속하면 되는 거지.
그러나 북쪽 대륙에서의 전쟁은 바로 그 필멸자들에겐 너무나도 버거운 것이었다.
추위와 악천후 때문에 진군 속도가 느려지고, 보급난이 지속되고, 북대륙의 야만인들은 단순할지언정
결코 만만한 전사들이 아니었다.
밤이 되면 이 목마른 신들의 영역이 병사들에게 끊임없이 광기를 속삭였다.
몸유병에 시달리는 자들이 계속해서 나왔고... 환청 때문에 벼랑 어딘가에서 몸을 던지거나, 우울증 때문에 자살하거나.
이렇게 착실하게 쌓은 손실들은 서서히 감당하기 힘든 것으로 변해 갔지.
한 달에 마을 하나를 쳐부수고, 그게 세 달에 한 번이 되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샌가 우리는 완전히 멈춰 버리고 말았다.
공세의 돈좌라니? 우리가? 그 폐하의 군세가?
분명 거길 돌파할 수가 있었을 거다. 뭔가 묘책이 있었겠지.
최초 원정에서 일백 개의 수색조를 일일히 다 조율해 냈던 그때와 같이!
하지만... 폐하는, 우리는 더는 그걸 알지 못했다.
그간 폐하께 지그마의 영혼이 함께하고 계셨다면, 그게 거기까지였나 보지.
남부 회색 산맥에서, 황무지의 회전들에서, 여덟 봉우리에서 우리와 함께했던 그 순간들이...
우리와 함께하는 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폐하께서 노쇠하신 건가? 병이 드셨을까? 뭔가 크게 동요할 만한 일이 있었을까?
모른다. 나는 몰라.
그 기적이 어떻게 찾아왔는지 몰랐던 것처럼, 어떻게 사라졌는지 역시 모른다.
내가 모르는 건 너무나도 많아...
폐하가 처형한 고블린 군주가 어떤 존재였는지, 실바니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여덟 봉우리에서의 승전 후 하이 킹, 안그룬드 클랜의 왕과 폐하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제일 알고 싶구나. 도대체 그 눈보라 속에서 무슨 일어난 건지.
군의관이 동상으로 썩어 문드러진 병사들의 발을 잘라 내던 어느 날 오후,
폐하께서 전군 앞에서 씹어 뱉듯 선언하셨다.
"회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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