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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리뷰] 궁궐이라 부르기 민망한, 을씨년스러운 경희궁지 방문기

리뷰타임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12.05 08:34:02
조회 769 추천 3 댓글 5
[리뷰타임스=김우선 기자] 12월 겨울 초입 점심 무렵에 찬 바람을 뚫고 경희궁을 찾았다. 서울에는 5개의 궁궐이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그리고 경희궁이다. 하지만 경희궁은 다른 네 궁궐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다른 궁궐의 입구처럼 매표소에서 줄을 설 필요도 없다. 입장료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설명하기 어려운허전함에 가깝다.

 


경희궁의 입구 흥화문 옆에는 경희궁지라고 안내판이 붙어 있다. 경희궁은 지금도 궁인가, 아니면궁이 있었던 자리일 뿐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슬쩍, 경희궁이 아니라 경희궁지, 경희궁 터라고 부르게 되는 것일까.


 

사라진 궁궐 위에 남은 겨울 공기


신문로 대로변, 서울역사박물관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짧은 언덕을 지나면,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 3, 측면 2칸짜리 단층 기와집. 다른 궁궐 정문에 비하면 소박하고 낮은 문이다.


 


흥화문


 

 

하지만 이 흥화문의 이력이 만만치 않다. 원래 자리에서 쫓겨나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겠다고 세운 박문사의 대문이 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쓰이다가, 1988년에야 겨우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자리마저 이미 구세군회관이 차지하고 있어, 지금 위치는 원래 자리에서 옆으로 밀려난타협의 자리.


 

문을 지나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경희궁의 정전, 숭정전이 나온다. 지금 서 있는 숭정전은 원형이 아니라 복제된 전각이다. 원래 숭정전은 일제강점기 일본 사찰에 팔려갔다가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다. 경희궁지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현재 제자리에서 다시 세운 것이 우리가 보는 숭정전이다.


 


숭정문


 


숭정전 앞



 


숭정전


 

숭정전 뒤편으로 편전인 자정전, 그리고 영조의 어진을 모시고 혼전으로 쓰였던 태령전이 복원되어 있다. 태령전 뒤쪽의 바위는 원래 왕암이라 불리던 곳이다. 왕의 기운이 서린 바위라 해서 붙은 이름인데,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을 뜻하는 서암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한다.


 

바람이 얼굴을 할퀴던 그날, 텅 빈 마당과 몇 채 되지 않는 전각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꾸만없음이 눈에 들어왔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이미 사라져 버린 것들이 더 크게 다가오는 공간. 그것이 지금의 경희궁이다.


 


숭정전 내부



 


신하들이 서있었을 그 자리. 품계석만 덩그러니.


 

 

숙종이 태어나고 영조가 머물던, 한때의서궐


이 을씨년스러운 빈자리에도, 한때는 제법 찬란한 시간이 있었다. 경희궁은 광해군의 명으로 1617년에 공사를 시작해 1623년에 완공된 조선 후기의 궁궐이다. 경복궁 서쪽에 자리해서궐이라 불렸고, 규모 또한 경복궁의 3분의 2에 이를 정도로 컸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란 왕이 숙종이다. 그는 이곳에서 13년간 머물다 결국 이 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영조 역시 이곳에 오래 머물며 정사를 돌렸다. 조선 후기, 창덕궁이 정궁이라면 경희궁은 그에 못지않게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던 제2의 궁궐이었다.


 


왕이 다니던 계단 가운데의 답도


 


자정전



 


자정전 내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 그 흔적은 대부분 지워졌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은자재 창고신세가 된다. 경복궁을 다시 세우기 위해 경희궁 전각의 90퍼센트 이상이 헐렸고, 나머지 일부는 일제강점기 들어 학교와 도로를 만들며 파괴되거나 매각됐다.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영렬천엔 여전히 물이 고여 있다.


 

 

조선이 먼저 전각을 헐어냈고, 일제가 남은 터를 망가뜨렸다. 조선시대 정궁과 이궁 가운데 원형의 대부분이 파괴된 곳은 경희궁이 사실상 유일하다. 다른 궁과 달리 이곳이 유독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이중의 파괴가 만들어낸 공백 때문이다.


 

경희궁을 산산조각낸 것은 전쟁과 침략만이 아니었다. 근대화와 개발, 그리고 행정 편의라는 이름의 삽질도 한몫했다.


 

1910, 일제는 경희궁 터에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들였다. 이것이 해방 후 서울고등학교가 된다. 조선 왕이 걷던 길 위를 일본인 학생들이, 다시 한국의 명문고 학생들이 밟고 다니던 셈이다.


 


경성중학교(서울중고등학교)가 있던 자리


 


학교가 자리하던 자리는 텅 비어 있다.


 

1980, 서울고가 강남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야 비로소 경희궁 복원의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그 틈에 서울특별시는 이 알짜배기 땅을 공공청사와 각종 시설로 채웠다. 서울특별시교육청,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분관, 서울복지재단, 그리고 각종 민간 건물까지. 심지어 경희궁 터가 사적으로 지정된 뒤에도 서울시는 이 부지 위에 계속 건물을 지었다. 발굴과 보존 조치를 충분히 하지 않은 채 공사를 밀어붙여, 유적 일부는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경희궁의 복원은 물리적·행정적으로 모두 막혀 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이 국가유산청 산하 궁능유적본부의 관리를 받는 반면, 경희궁만 유일하게 서울시 산하 서울역사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는 것도 이런 복잡한 사정의 결과다. 한때 조선 왕조서궐의 한 축이었던 경희궁은, 지금 행정구역상으로는 궁이 아니라 박물관 부속 공간에 가깝게 취급받고 있다.


 


경희궁지에 역사박물관이 들어선 자체가 아이러니



 


역사박물관 내 경희궁에서 사용하던 우물


 

 

98퍼센트가 사라진 궁궐을 걷는다는 것


현재 일반인들이 걸어볼 수 있는 경희궁은, 한마디로 말해궁궐이라 부르기 쑥스러운 궁궐이다. 복원된 전각은 흥화문,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과 주변 회랑 일부에 그친다. 경복궁 크기의 3분의 2에 달하던 옛 경희궁의 98퍼센트는 이미 사라졌고, 지금 우리가 밟는 땅 대부분은 서울역사박물관, 교육청, 미술관, 기타 건물들이 점유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곳 안내문과 각종 자료에는경희궁이라는 이름과 함께경희궁지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한때 왕이 머물던 궁궐이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전체를 궁궐이라 부르기 어렵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왕의 침전이 있던 자리에 1943년 태평양전쟁을 대비해 만들어진 방공호가 자리 잡았고, 그 방공호는 다시 방치되거나 수장고 전환 계획만 오르내리다 지금도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 있다. 왕이 머물던 자리 위에 전시 통신시설이, 그 위로는 도시 행정의 건물들이 겹겹이 올라붙어 있는 셈이다.


 




경희궁 옆 방공호는 아직도 있다.


 

 

겨울날 경희궁 마당에 서 있으면, 이곳이 한때태평성대를 꿈꾸던 공간이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가슴을 찌른다. 숙종과 영조가 고민하던 자리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그 바람 사이사이에 지워진 시간의 층위들이 얇게, 그러나 분명하게 느껴진다.


 

공원화냐, 복원이냐: 2025년의 경희궁지


2024, 서울시는 경희궁지를 포함한 주변 일대를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겉으로만 보면복원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어도 복원 정도가 확정된 수준이다. 흥화문 원위치 복원, 숭의문 복원, 서울역사박물관 이전 등은 검토 대상일 뿐이며, 정작 경희궁의 핵심이었던 궁궐 영역과 주요 전각들 대부분은 이번 계획에서 비껴가 있다.


 

정리하자면, 이번 사업은 철저히공원화에 방점이 찍혀 있다. 경희궁의 궁궐로서의 온전한 복원은 여전히 요원하고, 이 자리는 앞으로 더산책하기 좋은 공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시민 입장에서는 조용하고 넉넉한 공원을 얻는 셈이지만, 조선의 한 궁궐이 이렇게까지 축소·변형된 상태로 굳어지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하나씩 땅을 빼앗겨 가는 경희궁



 


저 건물들에 둘러쌓여 초라하다.



 


경희궁 안에서 바라본 도심


 

 

경복궁이화려한 대표선수라면, 경희궁지는 조용한 잔상에 가깝다. 관광객으로서만 본다면, 입장료 무료에 비해 볼거리는 분명 적다. 멋진 사진을 남기기에도, 화려한 궁궐 체험을 하기도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네 궁궐의 이름은 술술 외우는 사람도 경희궁 앞에서는 한 번쯤 머뭇거린다.


 

경희궁지는남아 있는 것을 보러 가는 곳이라기보다, ‘사라진 것을 떠올리게 되는 공간이다. 조선의 왕이 머물던 공간이 어떻게 자재 창고로, 일본인 학교로, 한국의 명문고와 공공청사 부지로 변해 갔는지, 정치와 개발, 행정과 침묵이 궁궐 하나를 어떻게 지워버렸는지를 몸으로 느끼게 되는 자리다. 그래서 겨울의 경희궁지는 더욱 을씨년스럽다. 빈 마당, 낮은 전각, 멀리서 들려오는 차량 소음, 박물관 건물의 그림자 아래 놓인 궁궐의 잔해. 경희궁이 사라진 자리에서 마주한, 서울이라는 도시의 초라한 자화상이다.


 

<ansonny@review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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