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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팬대] 아흐레

ㅇㅇ(1.227) 2020.07.26 22:37:03
조회 521 추천 15 댓글 5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개찰구는 열렸다. 어쩐지 기차로 향하는 내 발걸음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기야 일에 치여 홍마관에서 날밤을 지새운 지도 벌써 아흐레 째였다. 물론 오늘부터 시작될 연휴를 위해 미리 업무를 당겨 처리했기 때문이긴 하지만, 그 아흐레는 실로 지옥이었다. 연이은 행사에 인터뷰, 그리고 기본적인 집안일들까지. 홍마관의 식구 수는 환상향 시절과 비교해 급격히 늘어나 있었고, 인간 메이드나 하인의 고용에도 불구하고 내 업무량은 수직 상승하였다. 물론 능력을 쓸 수 있었다면 그리 고통스러운 업무량은 아니었겠지만.

 

인공적인 안내음이 내 의식을 두드렸다. 나는 사람들을 따라 출입문으로 발을 옮겼다. 주머니를 뒤적여 기차표를 꺼내 좌석 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다소 앞 쪽, 그러나 중앙에 가까운 자리였다. 창가였기에, 옆자리 승객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길 바라며 좌석으로 향했다. 다행히 내 소박한 욕망은 이루어졌다. 나는 낡은 배낭을 의자 밑에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창 너머로 강한 햇살이 내 눈을 찔렀다. 나는 손을 뻗어 커튼을 치고는 머리를 창에 기댔다. 억눌러 왔던 졸음이 밀려왔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나는 눈을 떴다. 짧은 시간이라 잠이 들지는 않았지만, 막상 눈이 뻑뻑한 것이 조금 졸았나 싶었다. 배낭을 조금 내 쪽으로 당기며 옆자리에 앉는 승객을 곁눈질로 확인하였다. 지팡이를 짚은, 그러나 나름 세련되게 차려 입은 할머니였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가볍게 목례를 하였다. 웃으시는 모습이 참 인자해 보이셨다. 나는 다시 창에 머리를 기대고는 잠을 청했다.

 

덜거덕, 덜거덕, 하는 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덜거덕, 덜거덕. 기계적인 소리다. 나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환상향을 추억해보았다. 하지만 제대로 떠오르는 것은 개방되기 전의 정감 넘치는 모습뿐이었다. 사시사철 바뀌는 풍광, 향토적이면서도 운치 있는 마을, 짙은 산록과 잿빛 바위과 얽힌 요괴의 산, 안개의 호수 주위의 요정 떼, 그리고 우뚝 솟아있는 홍마관의 시계탑. 내 회상은 그런 것뿐이었다.

 

간식거리를 실은 카트가 지나가고 있었다, 눈을 다시금 떴을 땐. 나는 수면 직후의 까끌까끌한 목의 감촉을 느꼈다. 나는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르곤 주스를 하나 샀다. 시큼달큼한 오렌지의 향이 기분좋은 자극으로 와 닿았다. 하필이면 그 때, 주스 뚜껑을 마악 따고 입에 대었을 때, 기차가 무슨 영문인지 거칠게 덜컹거렸다. 순간적인 반사신경 덕에 많이는 아니었으나, 음료를 조금 흘리고 말았다. 떨어지는 액체를 보며 내가 고민했음은 부정할 수 없으리라. 모처럼 새로 산 옷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시간을 멈추는 것은 그만두었다.

 

마리사가 내 옷을 보고 날 홀대하진 않겠지, 라는 위안을 스스로 되뇌이며 나는 가방을 뒤졌다. 큰일 났다. 여행용 티슈를 가져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내 겉옷에 떨어진 주스는 서서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허둥거리고 있자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 손수건을 건네주셨다. 나는 예의상 한차례 사양하였으나, 계속되는 권유에, 그리고 사실 나도 절실히 필요했기에 받아들였다. 나는 고여있는 액체를 손수건으로 빨아들인 후, 옷자락에 스며든 물기도 한 번 꾹 눌러주었다. 그리곤 막상 손수건을 건네려니 할머니께 죄스러워, 빨아오겠다고 말하고는 기차 내 화장실로 향했다.

 

화장실은 조용했다. 한기가 내 몸을 사로잡는 것을 느끼자니 기분이 왠지 모르게 상쾌해졌다. 나는 세면대에 가서는 물을 틀었다. 손수건에 물을 묻히고 문지르자니, 예전에 마리사가 신참 메이드로 들어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 때는 참 어렸는데.

 

당시 돈이 영 궁했던 마리사는 임시로 메이드로 자신을 고용해 주길 원했고, 나는 숙식만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거기에 응했다. 하지만 곧잘 실수를 하곤 했던 그녀는, 한 번은 깨진 접시 파편에 크게 베인 적이 있었다. 내가 손수건을 그냥 주었더니 그녀는 꼭 이 빚은 갚겠다며 그 손수건을 빨아왔었다. 그땐 그녀도 그랬지.

 

어느새 깨끗해진 손수건을 들고 가려니 다시 막막함이 몰려왔다. 축축해진 손수건 역시 그냥 드릴 순 없을 터였다. 한참 동안 탈탈 털면서 물기를 빼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난 울상을 짓고는 좌석으로 돌아가 돌려드릴 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내 사죄에 뭐 그런 일로 미안하냐며 웃으셨다. 그 분께서는 손수건을 고이 접어 가방에 넣으셨다. 그녀에게는 지금의 마리사다운 너그러움이 있었다.

 

그 뒤로 나는 그 분과 몇몇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얘기했던 것은 서로의 행선지였는데, 그녀는 내 목적지를 듣자 자신도 그 곳 출신이라 말하며 즐거워하셨다.

 

전 친구를 만나러요. 그 곳에 옛 친구가 살거든요.”

 

할머니께서는 젊은데도 그런 촌구석에 자신의 고향임에도 거리낌 없는 평가였다 친구가 있냐며 놀라하셨다. 나는 내 나이를 사실대로 말할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학생 취급 받는 일은 비록 하대를 당하더라도 즐거운 일이었다. 할머니께서는 자식들을 만나러 간다고 하셨다.

 

어디서 내리세요?”

 

내가 내릴 역의 전 전 역이었다. 그렇게 소곤소곤 떠들고 있자니, 어느새 할머니께서 내리실 역이 가까워져 왔다. 나는 손수건을 빌려주셔서 감사했다고 재차 말한 후, 성함을 여쭙고 싶다고 하였다. 그녀는 히에다노 xxx (뒷부분의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낙 발음이 뭉개지셨기에) 라고 하셨다. 요즘에 보기 드문, 하지만 어쩐지 그리워지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잠시 후 내렸다.

 

나는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향하는 열차는 그에 걸맞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빌딩 숲보다 진짜 숲이 많이 보였고, 아스팔트보단 흙바닥이 자주 보였다. 나는 실로 환상향으로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감상을 하며 내릴 채비를 하였다. 내가 위치한 객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 밖에 없었다.

 

첫 발디딤은 그저 그랬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어쩐지 배시시 웃음이 나오고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막 빙글빙글 돌고라도 싶은 심정이었다. 비록 두어 명 밖에 없었지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나는 배어나오는 미소를 억누르며 우선 마을 어귀의 마트로 향했다. 이미 여러 번 와본 터라 익숙해져 지도는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었다.

 

마을에 들어선 나를 맞이하는 것은 허름한 가게들이었다. 녹용, 염소즙 등을 파는 약방부터, 저 멀리 타지로부터 공수해 온 생선들이 늘어선 어물전, 불 꺼진 네온 사인이 인상적이던 치킨집까지. 하지만 내가 가장 보고 싶었던 가게는 달리 있었다. 나는 좀 더 구석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고서점에 잠시 들어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먼 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코스즈의 자식은 날 달가워할 리 없었다.

 

그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학교였다. 손바닥만한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참으로 흥겨워 보였다. 혹 내가 아는 아이도 있을까 싶어 고개를 들이밀어 보았지만, 지금은 없는 듯 하였다. 나는 그렇게 걸어 걸어 마트에 도착했다.

 

반가운 얼굴이 있었다. 레이센이었다.

 

어머, 사쿠야 아니야?”

 

그러는 너도. 하나도 안 늙었네.”

 

그녀는 내심 좋아라 하면서도 짐짓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안 늙긴. 주름살이 다 졌구만.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 마리사한테 볼 일이 좀 있어서.”

 

나는 가감없이 사정을 말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그 녀석 건강이 안 좋아서 걱정이야. 의사 말로는 폐암이라던가? 맨날 실험 한답시고 독극물이나 만져댔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마는, 막상 골골 앓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쓰린 거 있지?”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닥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마음이 조금 조급해지는 것은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럼 난 이만 가본다. 시간 되면 놀러 와, 사쿠야!”

 

, 너도 몸조심 하고!”

 

그녀는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나는 어서 장을 보고 마리사네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돼지고기 앞다리살, 가지, , 대추, 단호박, 은행 등을 사서 마트를 나왔다. 이제부터가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유일한 미개발 지역인 마법의 숲을 들어가기 위해선 꽤나 걸어야만 했고, 나름 적응이 된 나로서도 그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걷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도리가 있으랴. 나는 속으로 아직도 그런 외진 곳에 사는 마리사의 괴벽에 불만을 토하면서도 군말 없이 숲으로 들어갔다.

 

거의 원시림이라 할 만한 광경이었다. 시선 닿는 곳마다 자라있는 정체모를 버섯하며, 숨막힐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 그리고 날아다니는 거대한 곤충들. 예전의 식인 꽃들은 잘려나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통행에 어려움은 많았다. 그렇기에 나는 마리사의 허름한 2층 집이 보였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 앞으로 다가갔다. 노크를 세 번 했다. 침묵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금, 보다 강하게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쿨럭이는 기침 소리와 함께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리사가 문을 열고 나왔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머리가 새다 못해 백발이 성성해진 마리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를 껴안았다.

 

보고 싶었지.”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가냘픈 손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부드럽게 포옹을 풀어주었다. 마리사는 나를 실내로 안내했다. 노인 혼자 사는 것치고는 꽤나 깔끔한 편이었다. 나는 실내 장식들을 주욱 둘러보다, 그녀가 집어 든 인형을 보며 물었다.

 

그건?”

 

마리사는 앨리스, 라고만 대답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스 또한 얼마 전에 왔다 간 모양이었다. 그 증거로 인형은 때 하나 묻지 않고 깨끗한 모습이었다. 문득 보니 거실 불이 다 꺼져있는 것이 영 침침하였다. 나는 거실과 부엌의 불을 켰다. 그리곤 주방으로 향해 갔다. 배낭과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마리사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여전히 귀는 예민한 모양이었다. 식탁 위에는 약 봉투가 쌓여있었다. 나는 힘겹게 그것에서 시선을 뗀 뒤, 사온 고기와 야채들을 꺼냈다.

 

기다려, 금방 밥 차려줄 테니까.”

 

한참 동안은 요리에 열중했던 것 같다. 고기를 썰고, 야채를 볶고, 밥을 짓고…… 중간에 마리사가 소파에서 움직이길래 뭘 하나 보았더니, 창고에서 술을 한 병 꺼내오는 것이었다. 나는 말렸다.

 

너 폐암이라며. 술을 마셔서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임마. 나 안 죽어.”

 

마리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사코 술병을 식탁으로 가지고 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 잔하려는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러기에는 그녀의 상태가 염려스러웠다. 나는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요리를 이어나갔다. 내가 만든 대추단호박밥과 돼지고기가지볶음, 그리고 배낭에 챙겨왔던 콩잎 무침을 꺼내 식탁에 차렸다.

 

조용히 술 따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큼직한 물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나는 냉장고를 뒤져 성한 반찬 몇 개를 더 꺼낸 뒤,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마리사가 건네주는 잔을 받아들었다. 나와 그녀는 잔을 추어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우리의 영원한 우정을 위하여, 그리고…… 잊혀진 모든 것을 위하여.”

 

.

 

공허한 건배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제육볶음을 집어들어 입에 털어넣었다. 가지 특유의 향과 고기의 고소한 기름기가 어우러져 괜찮은 맛이 났다. 마리사 역시 먹을 만 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홍마관 메이드장의 솜씨는 다르구만. 연회 때도 다들 호평이었지……”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 듯한 눈빛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그 눈빛이 부담스러워 나는 그녀를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식사와 함께 곁들여진 술은 다 마시고, 나는 배낭에서 준비해 온 선물을 꺼냈다. 작은 아가씨께서 준비해 주신 물건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마리사에게 나는 그것을 건넸다.

 

뜯어봐.”

 

금빛 포장지가 뜯겨지고, 검은 광택의 상자가 열렸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칠색의 보석 반지였다.

 

작은 아가씨는 보석 세공사 일을 시작하셨어. 그게 영광할 만한 첫 작품이고.”

 

내 설명에 마리사는 거칠거칠한 손으로, 마찬가지로 울퉁불퉁한 보석 반지를 쓰다듬었다. 비록 초심자의 실력이라 형태는 조금 모났으나 마리사는 감동받은 듯 하였다.

 

그래, 벌써 플랑드르가 이렇게나 자랐단 말이지……”

 

작은 아가씨의 날개 모양을 본 뜬 반지와 함께 들어있는 것은 그녀의 사진과 편지였다. 마리사는 사진을 고이 내려두고는 편지를 읽으려 했으나, 흐릿한 눈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듯 했다. 나는 그녀를 대신해 글을 낭독하기로 하였다. 그녀는 자세를 고쳐 잡고 귀 기울였다.

 

마리사에게.

안녕, 마리사.

뜬금없지만, 죽음은 삶의 완성이란 말 알아?

내가 책에서 읽은 건데, 사람이 한 권의 책이라면 시작이 있듯 결말도 있어야 된데.

조만간 네가 그 종지부를 찍을지도 모른다는 얘기 들었어.

처음에는 슬펐지만, 지금 나는 기뻐.

네가 그렇게 추구하던 인간의 삶을 이루었으니 말야!

앞으로도, 그리고 기억 속에서도 진정한 인간이길.

다음 생일에는 놀러갈게. 혹은 다음 생애라도.

                                                             어린 벗 플랑드르 스칼렛이.”

 

나는 마리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묘한 얼굴이 되어 웃고 있었다. 나도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지어졌다. 마리사는 점점 일그러지더니 마침내 육성으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하하! 이거 한 방 먹은 건가? 꼬마 아가씨가 많이 컸네!”

 

그러게.”

 

나는 마리사의 말에 그렇게만 대답하고는 조용히 뒤돌아 섰다.

 

나 잠깐 화장실 좀.”

 

, 그래 그래.”

 

등 뒤에서는 그녀가 받은 선물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곤 조용히 번지는 눈물을 훔쳤다. 떨어지는 눈물을 의식하며 나는 울음소리를 억제했다.

 

잠시 후, 옷 매무새와 표정을 가지런히 하고 나온 나는 마리사와 함께 소파에 앉아 tv를 틀었다. 공영 방송의 다큐멘터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그것을 보며 말했다.

 

저기, 마리사.”

 

그녀는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의식하지 않은 채 tv를 보며 계속 말했다.

 

만약 네게 아흐레가 주어진다면, 뭘 하고 싶어?”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말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네.”

 

그렇지.”

 

역시 마법 연구일까. 아냐, 옛 친구들도 한 번 만나야 되는데. 앨리스도, 파츄리도, 니토리도…… , 아버지 성묘도 가고. 그리고……”

 

마리사의 혼잣말은 반쯤 흥얼거림이었다. 나는 그것을 묵묵하게 다 들었다. 그리곤 결심을 했다.

 

마리사.”

 

?”

 

내가 아흐레를 줄게.”

 

70이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마리사는 영민했다. 그녀는 내 말 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네 시간이야. 네게 허락된 시간은 지금으로 충분해.”

 

그래도.”

 

마리사는 말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tv를 바라보았다. 야산을 노루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거기에 꽂혀있었다. 갈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재차 제안했다.

 

어차피 난 늙지 않아. 네 수명의 일부나마……”

 

그건 바르지 않아, 사쿠야.”

 

마리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만약 네가 정 날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면, 그것을 원한다면.”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오랜 친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각오와 함께.

 

그저, 이 밤을 아흐레처럼 길게 만들어 줘.”

 

나는 그렇게 했다.

 

다음 날, 해가 떴을 때는 마리사는 쪽지를 남겨둔 채 사라져 있었다. 쪽지에는 잠시 산보를 나갔다 온다고 적혀있었다. 나는 내가 능력을 억제하며 지켜낸 9일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거부했기에. 대신 어젯밤의 열띤 기억을 떠올렸다.

 

우리는 카드 놀이를 했다. 포커는 마리사의 승리였다. 노련미는 젊어서나 늙어서나 그대로였다. 카드 마술은 내가 하고 마리사가 관객이 되어주었다. 내 실력은 잦은 행사로 부쩍 늘어있었다. 그녀는 내 마술에 경탄을 표하며 말했다.

 

- 마법을 배웠을 테지, 사쿠야?

 

낯 부끄러운 칭찬이었다. 우리는 레이무의 묘지에도 들렀다. 술을 따르며, 그녀를 추억하며 마셨다. 간만에 탄막놀이도 하였다. 그녀의 안전을 생각해 비상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래도 꽤나 즐거웠다.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전화통화였다.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가씨는 전화에 꼬박꼬박 답해주셨다. 나는 그것들을 기억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핏자국이 남아있는 소파를 어루만지며 웃었다.

 

짭짤한 눈물이 입에 들어왔다.


다른 작품 보기 - 마법과 기술의 장 / 그 해 초여름 / 보다 장미로 / 개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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