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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론3(이카루스의 날개) - 46 주심 판사의 고백

운영자 2018.09.03 11:31:13
조회 236 추천 1 댓글 0
46

주심 판사의 고백


투명한 모래시계의 입자처럼 세월은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겨울이 가고 여름이 지나갔다. 일 년이 가고 이년이 가고 팔년쯤 지난 어느 날 오후였다. 법정에서 민사재판을 마치고 나올 때 상대방 측을 대리하던 변호사가 나에게 인사하면서 말했다.

“엄 변호사님, 혹시 저를 기억하세요?”

훤칠한 키에 미남인 변호사였다. 사십대 말쯤 가지는 중후한 느낌이 주변에 둘러 있는 것 같았다. 

“글쎄요, 기억이 희미한데요.”

“제가 주기도사건 때 주심 판사였는데”

“아 그러세요?”

법대위에서 법복에 개성이 가려진 배석판사들의 경우 거의 기억하기 힘들었다. 세월저쪽에 있던 당시의 일들이 안개같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당시 주 회장에게는 변호사가 참 많았다. 강연할 때 사기가 되나 안 되나를 판단하는 변호사 회사의 인수합병을 할 때 자문하는 변호사 검찰을 담당하는 변호사 재판장담당 변호사 주심 판사를 담당하는 변호사 비서실장역할을 하는 변호사등 그의 주변에서 수많은 변호사들이 벌어먹고 살았다. 나는 피해자들과 보상을 협의하는 극히 일부를 맡고 있었다. 당시 우연히 법정에서 다른 변호사한테서 자기는 주심 판사를 담당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주심 판사는 권력핵심의 사위라고 했다. 주심판사와 친하기 때문에 핸드폰으로 불러내어 따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았다. 당시 변호사들 모두 주심판사를 바라보면서 마음을 졸였다. 그가 주회장의 인생과 사업에 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잠시 뭔가 생각하는 머뭇거리는 표정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주 회장 주심 판사를 할 때였어요. 여론은 들끓었지만 주심인 제 입장에서 볼 때 정상참작의 여지가 많더라구요. 그래서 재판장인 부장님께 건의 드렸죠. 그랬더니 부장님도 사실 은 저와 생각이 같다고 하면서 가벼운 형량 쪽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징역 5년으로 형량에 관한 합의가 됐죠. 그런데 말이죠. 어느 날 로펌에 있는 저와 친한 변호사가 개인적으로 꼭 만나야 할 일이 있다면서 연락을 해 왔어요. 거절할 사이가 아니었죠. 저녁에 한 레스트랑에서 조용히 친구를 만났죠. 이런저런 얘기 중에 그 친구가 주회장 사건을 말하는 거예요. 말을 들어보니까 법정에서 해도 될 말을 굳이 그렇게 사적인 자리를 마련해서 얘기한다는 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죠. 순간 이게 나한테 로비가 들어오는 거구나 하고 눈치 챘어요. 정신이 번쩍 들더라구요. 판사가 은밀히 변호사와 사석에서 만나고 재판에 대해 거래를 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문제였죠. 유사한 사건을 보면 대개 징역 12년이었어요. 그걸 주심인 내가 징역5년으로 파격적으로 줄였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부장님한테 로비가 들어온 사실을 말씀드리고 형량을 올려야 하겠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요. 그게 주회장이 징역 십 이년을 사는 배경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럴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손이 그가 절벽에 매달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더 이상 그를 도와주지 않았던 것 같다. 재벌도 되어보고 자기의 왕국 안에서 황금의자에 앉아보고 대통령 꿈까지 꾸던 그를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은 더 이상 올라가는 걸 용납하지 않고 깊은 어둠의 골짜기로 곤두박질치게 만든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당해낼 수 없는 존재가 우리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판사들은 어떤 사건의 형량에 대해 합의했던 내용을 평생 비밀로 한다. 그런데 그는 나와 모르는 사이인데도 그 말을 전해 주었다. 그의 내면에서 미안한 마음이 앙금처럼 응어리져 있던 게 틀림없었다. 변호사생활을 하다보면 판사가 마음대로 형량을 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는 어떤 존재가 뒤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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