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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진짜 공부

운영자 2024.03.19 10:23:32
조회 113 추천 0 댓글 0

실버타운에 밤이 내리면 건물 전체에 적막감이 감돈다. 어젯밤 로비의 의자에 정물같이 혼자 앉아 있는 칠십대 후반의 한 노인을 봤다. 안면이 있는 분이다. 밥을 먹을 때도 산책할 때도 항상 혼자였다. 암 수술을 받은 후 요양하러 왔다고 했다. 바짝 마른 몸은 바람에 날려갈 것 같이 위태로운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여기서 몸이 많이 회복되셨습니까?”

“많이 나아졌습니다. 전에는 텔레비젼을 볼 힘조차 없었습니다.”

“앉아 있기가 힘들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예요 그냥 텔레비젼을 보는 그 자체도 에너지가 사용된다는 걸 아프고 나서야 깨달았어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힘이 없다는 말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밝은 얘기 쪽으로 화제를 바꾸었다.

“그동안 혼자 지내시면서 어떤 즐거움을 추구하셨습니까?”

“공부했습니다.”

“그렇죠. 성취감을 얻으려면 역시 공부하는 거죠.”

내가 추임새를 넣었다. 그 노인은 서울법대를 졸업한 공부선수 출신이다. 노년에 어떤 공부가 즐거움을 줄까? 학위를 따거나 어떤 현실적인 목적이 없어졌다. 공부 그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 외국어를 공부하기도 하고 뒤늦게 작곡이나 그림을 공부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공부를 하는 것도 때가 있는 것 같다. 중년에 시도해보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룬 걸 후회하는 노인들이 많다. 끝내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중년에 무모하게 삶의 궤도를 수정한 경우가 있었다. 증권회사를 다니던 중년의 남자가 갑자기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화가를 찾아가 자기의 열망을 얘기했다. 그의 말을 들은 화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그려도 화가가 되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전혀 경험이 없이 덤벼드는 당신은 기적이라도 일어난다면 화가가 될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런 기회는 만분의 일도 안됩니다. 끝에 가서 결국 헛 수고 했다는 걸 알게 될겁니다. 또 삼류 화가가 된다고 칩시다. 그게 지금의 회사일을 팽개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다른 직업이라면 보통 정도라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죠.”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이렇게 대답했다.

“어쨌든 그림을 그려야겠습니다. 이건 나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물에 빠지면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는 문제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물에서 헤엄쳐 나오든가 아니면 빠져 죽는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그 남자는 그런 각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삼류화가가 아니라 역사에 남는 위대한 화가가 됐다. ‘달과 6펜스’에 나오는 화가 고갱의 얘기다. 만분의 일의 확률로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청년 시절 법을 공부했었다. 솔직히 재미가 없었다. 빵을 위한 학문이라는 생각이었다. 사십대 무렵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생겼다. 성경을 읽다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지니’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도대체 진리가 무엇일까. 그걸 알아보고 싶었다. 우연히 ‘갈매기의 꿈’이란 책을 읽었다. 갈매기 조나단은 다른 갈매기들이 어부들이 던져주는 물고기나 선창가의 생선쓰레기에만 정신이 팔리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 떨어져 공중을 높이 나는 연습을 했다. 매일 조금씩. 마침내 그는 높이 나는 새만이 멀리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가기서 진리의 발견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나의 영혼이 한단계라도 높게 날 수 있는 방법은 진지한 독서였다.


나는 진리가 담겨있다는 책들을 사서 그 책과 싸우는 기분으로 읽었다. 고전을 읽고 정신세계에 관한 책들을 읽어나갔다. 성경과 불경 그리고 다른 경전들을 읽어보았다. 정독을 하면서 밑줄을 치면서 중요한 걸 공책에 썼다. 그걸 틈틈이 외우면서 피 속에 녹이려고 애쓴 편이다. 나는 진리공부를 하면서 밑줄 친 중요한 내용들을 적은 공책을 ‘내가 복음’이라고 우스개 제목을 붙였다. 소가 되새김을 하듯이 노년에 그걸 다시 읽고 생각하는 즐거움도 솔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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