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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의 마음 밭 갈기

운영자 2024.03.11 10:16:58
조회 142 추천 1 댓글 0

“깍두기공책에 시편 23장을 한번 쓰는 데 천원 주마”

초등학교 사학년인 손자와 계약을 맺었다. 엄지 도장을 찍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수고하고 받는 돈의 의미를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사상을 심어주려는 할아버지의 의도다. 나는 손자에게 요즈음 내가 시편 23장을 쓰고 있는 공책을 샘플로 보여주면서 덧붙였다.

“한 글자 한 글자 할아버지가 쓴 것 같이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대충 쓰면 불량제품이니까 돈을 안 줄거야.”

“알았어요, 할아버지 학교 쉬는 시간에 써 볼께요.”

손자의 얼굴에 의지가 떠올랐다. 나는 동기유발을 위해 상을 하나 더 걸었다.

“시편 23장을 쓰는 게 삼백번째 됐을 때 보너스로 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아이패드를 사주마.”

“감사 감사 합니다.”

손자가 신이났다. 그런데 녀석이 뭔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할아버지 나는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예요.”

나는 갑자기 녀석이 그 말을 하는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할아버지의 뱃속을 짐작하고 비위를 맞추는 말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반대신문으로 녀석 말의 신빙성을 탄핵해 보기로 했다.

“돈이 필요없다고?”

내가 되물었다.

“네”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패드를 사려고 하면 돈이 없어도 되는 걸까? 친구들하고 와플 사 먹을 때도 돈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녀석의 표정이 잠시 먹먹해지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할아버지, 내가 돈이 필요치 않다고 하는 건 꼭 필요한 이상은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는 겁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역공격이었다. 내가 꼬리를 내렸다.

“알겠다. 할아버지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네가 현명한 대답이다.”

마음에 드는 손자의 대답이었다.


손자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도 나는 베드로가 그랬듯 하루에 세 번 기도한다. 다만 ‘시편 23장’을 쓰는 건 이년전부터 시도해 본 나의 기도 방식이라고 할까. 연필로 공책에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적어나가는 그 방법이 내게는 맞는 수행방법 같다. 그걸 쓰는 중에 그 분을 만나기를 희망한다. 그렇게 지금까지 쓴 게 이천 백번을 넘어가고 있다. 그 기도를 하면서 요즈음 내게 어떤 변화가 왔는지 중간 점검을 해 보았다.

변화는 아침에 내리는 이슬같이 모르는 사이에 와 있는 경우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전의 나와는 달라진 점이 있는 것 같다.

해안로의 헌집을 사서 수리하는 데 벌써 다섯달째다. 전 같으면 늑장공사에 분통이 터졌고 벌써 공사업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철저하게 추진하려고 하는 편이다. 더러는 탐욕과 야망 허영심으로 무리하게 내 욕심을 충족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멋대로 설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몸이 내게 보내는 경고를 무시해 스트레스를 받고 탈이 나기도 했다. 내 시각 내 입장만 생각했다. 그런데 달라졌다. 얼마 전 부터 갑자기 남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직접 공사를 해보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나와 다른 걸 발견했다. 추우면 일하기 싫고 임금을 더 준다는 다른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가는 게 당연했다. 나는 급해도 그들은 급할 게 하나도 없었다. 그들을 보면서 화가 나지 않았다. 그래 그럴 수 있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 욕심과 기준에서 나오는 나는 가망 없는 시도를 멈추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주님 뜻대로 하소서라는 마음으로 변했다. 일이 진척이 안되면 기다렸다. 다섯 달에 안되면 일년이라도 기다릴 마음이 생겼다. 안되면 말지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되는 건 되고 안되는 건 안되는 것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의 상태는 확실히 내면에서 일어난 지각변동이었다.


마음이 바뀌니까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진 것 같다. 과거도 재해석이 되고 있다. 과거에 부끄럽고 불만이었던 것들이 백팔십도 다르게 해석이 되고 있다. 그때 눈에 꺼풀이 덮여있던 걸 이제야 발견한 것 같았다. 그건 고정관념이었다. 그리고 편견이었다. ‘시편23장 기도’를 하면서 달라진 게 또 하나 있다. 자연이 보다 밀도있게 영혼에 스며드는 것 같다. 저녁노을이 잠겨 드는 번쩍이는 바다를 보면서 산책을 할 때면 바다와 이야기를 나누고 경이롭게 묵상하는 마음이 된다. 지구별의 아름다움이 디지털 화면같이 명료하게 다가왔다. 나는 매일 내 주변의 허공을 물들이는 아름다운 색조와 그 신비로움에 감탄하며 감사한다.


손자는 ‘시편 23장’기도를 하면서 어떻게 변하나 궁금해서 전화로 딸에게 물어봤다.

“녀석이 밤에도 잠이 안 온다면서 ‘시편23장’을 써요. 그러더니 어제는 자기가 문제집을 다 맞추었다면서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요.”

나는 어린 손자의 마음 밭을 갈고 있다. 엉겅퀴나 가시덤불이 나지 못하게 하고 돌들을 치워 옥토를 만들고 싶다. 그 마음 밭에 말씀의 씨가 떨어지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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