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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의 묘미

운영자 2024.03.04 10:18:14
조회 144 추천 1 댓글 0

내가 탄 카니발이 좁은 농로를 아슬아슬하게 가고 있었다. 마주 오는 차가 있을 경우 아주 난감할 것 같았다. 옆은 턱이진 논이었다. 교행할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구불구불한 길을 후진해서 가기도 힘들 것 같았다. 그런 길을 한 참 간 후 앙상한 겨울나무들이 있는 산자락에 쑥색 단층집 이 보였다. 나를 초청한 친구의 집이었다. 크고 작은 돌로 공들여 쌓은 야트막한 돌담 안으로 단아한 건물이었다. 건물 옆으로 늙고 마른 소나무가 비스듬이 기울어져 있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곳에 서 친구가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고무장화에 완전한 농군이 된 차림이었다. 평생 공직에 있던 그는 퇴직을 한 후 주변에 인가가 없는 양평의 산 속에 집을 짓고 자연인이 되어 살고 있다. 그의 부인이 정성스럽게 만든 오뎅국과 비빔밥을 점심으로 먹고 차를 나누면서 이런저런 삶의 얘기들을 나누었다.


“어떻게 하루를 지내나?”

그의 하루 일상이 궁금했다.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나무를 심고 정원을 가꾸느라고 바쁘지. 일이 많아. 밤에는 책을 읽지. 요즈음 역사를 다시 공부하는데 내가 몰랐던 게 너무 많아.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건 친구들을 초청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건데 작년에 이백명 이상이 여기 왔다가 갔어. 내가 고기를 굽고 요리를 만드는 일이 아주 베테랑이 됐지.”

시골 출신인 그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거실의 넓은 통유리창으로 그가 심은 회화나무의 노란빛을 띤 가지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웃도 없는 이 산자락에 부부만 살기가 무섭지 않아?”

내가 물었다.

“아무것도 가져 갈 것이 없어. 도둑이 탐낼만한 게 없지. 항상 문을 열어두고 있어. 그리고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는데 뭐가 두렵겠어.”

그는 아무 걱정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고창사람이었다. 고창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할 무렵 행정고시에 합격을 하고 공무원생활을 시작해 차관으로 마지막을 끝냈다. 그의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고향을 위해 더 일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그는 출마 했다가 몇 달 만에 선거운동을 포기했다.

“왜 포기했어?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물었다. 입후보가 되어 선거전에 나선 이상 후퇴가 불가능하기 마련이다. 먼저 욕심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선거는 자기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선거 참모들이나 조직이 선거 포기를 허용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런 종교도 없고 신을 믿는 것도 아닌데 선거운동중에 이상한 체험을 했어. 어느 날 방에 혼자 있는데 누군가 내게 강하게 메시지를 보내는 거야. 평생 그만큼 일했으면 됐지 네가 왜 고향을 위해 더 일한다고 나서냐는 거야. 분명히 누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선거운동을 접기로 했지.”

“그런 메시지를 보낸 게 누군데?”

“나도 모르지. 하여튼 나는 종교가 없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러면 자네 조상이 나타나서 얘기해 주던가?”

“그건 아니야. 내 생각으로는 하나님 같아”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다스리는 인간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자기 욕망대로 살게 내버려 두는 사람이 있고 직접 관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계획을 깨뜨리고 그분 뜻대로 몰고가신다. 제대로 가지 않는 경우 고난이라는 막대기로 두들겨 패서 가야 할 길로 몰기도 하는 것 같다. 그는 대화중에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소년시절의 이런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내가 살던 고창에서 서울대에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지. 나는 가난하지만 그래도 대학에 들어가고 싶어 서울로 올라와 ‘대성학원’ 단과반에 들어가 공부했어. 그런데 그 학원의 국어 시험문제가 대학입시에서 그대로 나온 거야. 지문도 똑같고 문제도 같아. 그 시험을 치르고 나는 합격했다는 확신을 가졌었지. 운이 좋았어.”

그런 행운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서울에 올라와 학원 단과반에서 본 문제가 그대로 대학입시에 났던 건 로뽀당첨 같은 행운이다. 그는 행정고시에도 일찍 합격했다. 성실하고 정직한 그는 고위직까지 무난히 올랐다. 선거운동을 하던 그는 그분의 메시지에 순종했다. 우리 시절은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그런 반전의 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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