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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 덮인 수필집으로 남은 남자

운영자 2024.03.11 10:15:35
조회 137 추천 1 댓글 0

어제 자그마한 댓글 하나를 봤다. 그가 이십대 시절 남산도서관에서 우연히 나의 책을 읽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나의 책이 어떻게 그곳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감사하고 또 부끄러운 일이다. 좀 더 깊고 완전한 글을 쓰지 못한 미안함이라고 할까.

몇 년 전 법정에서 상대방 변호사와 논쟁을 하는 소송을 하고 나올 때였다. 그 변호사는 젊고 미남이었다. 그가 내게 다가와 인사를 하며 이런 말을 했다.

“저희 아버님이 목사이신데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아버님 서재에서 엄 변호사님 책을 봤어요.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그가 공손하게 얘기하면서 책의 제목을 얘기했다.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그 책을 다시 읽어보니 곳곳에서 내 생각의 미숙함이 느껴졌다. 그런 걸 세상에 내놓았다는 죄의식마저 느꼈다.


어느 날 사람들이 꽉 찬 지하철 안에 서있을 때였다. 내 앞 좌석의 젊은 여성이 책을 보고 있었다. 무심히 그 책으로 눈길이 갔다. 내가 쓴 책이었다. 그 여성은 펜으로 문장의 줄을 쳐가며 열심히 읽고 있었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한 줄의 문장에도 정성을 들였었던가 반성했다. 우연히 그 여성과 같이 교대역에서 내리게 됐다. 내가 쓴 책을 들고 가는 그 여성의 뒷모습을 한참 보며 속으로 내 책을 읽어준 데에 대해 감사했다.


이십년 전쯤 나의 첫 소설이 서점에 나왔을 때였다. 돌아가신 원로 소설가 정을병 선생이 꼼꼼하게 검토하고 원고지 열장에 해당하는 분량의 추천사를 자필로 써 주었다. 매대에 빨간 표지의 내 책이 쌓여있었다. 옆에 서 있는 긴간 높이의 반쯤 됐다. 줄어든 만큼 팔린 것 같았다. 한권도 안팔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한편 신기하기도 했다. 누가 나 같은 이름없는 초보자의 책을 사 줄까하는 의문이었다. 한 남자가 매대 앞에서 내 책을 읽고 있었다. 반쯤은 읽은 것 같았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소설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히 문학을 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냥 삶의 여백을 글쓰기로 채우고 싶은 평민이라고 할까.

그때 정을병선생이 했던 이런 말이 지금도 기억의 갈피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엄 변호사의 글은 문단에서 평가받으려고 하지 말아요. 원래 문단이라는 곳이 그래요. 자기들끼리 오골거리면서 서로 칭찬하고 상주고 그러죠. 다른 분야의 사람이 쓴 글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 사람들의 입에서 어느 날 엄 변호사에 대해 ‘법정 소설 나부랭이나 쓰는 놈’이라는 말이 튀어나왔을 때 그건 대단한 칭찬이라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한번 써 보세요.”

나는 그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겼다.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도공이 물레 위에서 흙을 만지면서 끝없이 그릇을 빚듯 글을 만들어 본다. 마음에 안들면 반죽을 던져 버리기도 하고 가마에 들어가기 전에 망치로 깨버리기도 한다. 글쓰는 행위는 나의 기도이고 수행이기도 하다.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교본이 됐던 작가의 얇은 수필집이 있었다. 고등학교까지만 졸업하고 평생 수필을 쓴 분이었다. 문학상도 거의 받지 못한 것 같다. 그는 글쓰기 강좌로 생활비를 벌면서 가난하게 살아간 것 같았다. 그의 글은 정직했고 자신을 숨기지 않고 당당했다. 누구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고백자였다. 그의 글은 겸손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영혼이 한단계 올라간 듯한 문학성이 느껴졌다.

오래전 어느날 시청 앞에 있던 대형서점에서였다. 미녀 탈랜트의 난잡한 불륜을 쓴 에세이집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었다. 그녀가 쓴 글이 아니라 대필 작가가 쓴 것 같았다. 출판사가 돈을 노리고 대중들의 천박한 관음증을 해소해 준 책인 것 같았다. 마치 봄날 들에서 뱀들이 서로 엉켜 끝도 없이 교미를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내가 존경하는 그 소박한 수필가의 책은 구석의 서가 제일 아래쪽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게 돈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에서 상술과 예술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나는 오늘도 부끄러움과 미숙함을 무릅쓰고 글을 쓴다. 나는 내 주제를 안다. 그릇의 작음을 잘 안다. 다만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미숙하면 미숙한 대로 내가 보고 체험한 작은 세상을 알려주고 싶어서이다. 그 누구에게도 돈을 줄 수는 없지만 약간의 위로나 공감은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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