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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아들 1

운영자 2010.01.27 11:51:38
조회 641 추천 1 댓글 0

    지난 해 세모를 앞둔 쌀쌀한 어느 날 오후였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면서 불안한 표정으로 한 미남 청년이 들어섰다. 백팔십 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에 하얀 피부와 뚜렷한 윤곽을 가진 귀족형의 모습이었다. 쥐색 바바리 코트에 감색 싱글을 단정하게 입은 그는 연신 안절부절 못했다. 그가 바로 비자금 사건으로 온 국민의 지탄 대상이 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외아들 노재헌이었다. 

    “이제 저는 모든 걸 잃었습니다. 거기다 언론과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돌팔매로 길거리조차 마음대로 걸어다니지 못하는 죄인이 됐습니다. 그냥 누구한테라도 내 마음을 훌훌 털어 놓구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말도 하지 못하는 신세입니다. 그래서 그냥 말하고 싶을 때 시원하고 말하고 조언을 얻기 위해서 왔습니다. 사촌매형이 찾아가 조언을 구하라고 권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가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중하게 말했다. 약 삼년 전이었다. 사업을 하던 어려서부터 아주 절친한 친구와 광화문 부그네서 저녁을 먹는데 그의 사촌 처남인 노재헌이 그 자리에 나왔었다.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막 돌아온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나보다 나이가 어렸지만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게 불편했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산다는 이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형식적인 인사를 했다.


    “내가 저녁을 낼테니 뭘 먹고 싶은지 마음대로 말해.”

    친구가 처남인 노재헌에게 따뜻하게 위로하는 호방한 형같이 말했다. 유명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먹고 이어서 호화로운 술집에 가지 않을까 하는 짐작을 했다. 노재헌이 그 말에 사촌 매형에게 대답했다.


    “형! 제가 꼭 가보고 싶은 집이 있어요. 허술한 감자탕 집에 가서 돼지 뼈따귀를 뜯고 얼큰한 술국에 소주 한잔 걸치고 싶어요. 꼭 그런 집으로 갑시다. 사람들은 나한테 술한잔 산다고 말하면 꼭 호화스런 룸싸롱으로 데리고 가려 하더라. 그런데는 정말 싫거든요..”


    노재헌은 공손하게 그의 사촌형에게 말했다. 그날 밤 우리는 밤 한시가 넘어서까지 광화문 두시골목의 쓰러져가는 허술한 한옥에 자리잡은 감자탕 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부러울 정도로 다 갖춘 것 같았다. 배경 그리고 수재코스를 밟은 자신의 능력과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겸손함 등을 얄밉도록 완벽하게 갖추었다. 그러던 그가 아버지의 비자금 사건으로 구름 위에서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처절한 추락을 한 셈이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저녁을 먹으러 허름한 국수집으로 찾아 들어갔다. 카운터에 오십대 말쯤 되어 보이는 뚱뚱한 여자 하나가 그 옆에 놓인 낡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때가 늦어서 그런지 식당 안은 비어 있었다. 칙칙 소리가 나는 텔레비전에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죄수복을 입은 모습이 나오고 아나운서가 마치 검사처럼 그의 죄상을 신랄하게 규탄하고 있었다. 노재헌은 의식적으로 그 화면을 피해 맞은편 식탁에 앉았다. 나는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그의 위치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해왔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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