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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감옥 속의 친정 엄마

운영자 2010.01.27 11:49:26
조회 377 추천 1 댓글 1

    1996년 1월의 두 번째 금요일 오전 영등포 구치소 안. 넓은 접견실 가운데 조그만 석유난로가 혼자 타고 있었다. 온기보다는 매캐한 석유냄새가 공기를 더럽히고 있었다. 그나마 변호사 등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방이라 뻘건 불꽃을 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접견실 안에 벌집같이 여러 개의 유리칸막이로 된 작은 방 하나에 들어갔다. 접견실 안이 텅텅 비어 있다. 낡은 철 책상 앞에서 경교대원 하나가 의자 뒤로 팔을 길게 뻗으면서 하품을 하고 있다. 잠시 후 내가 기다리던 피고인인 오십대의 한 아주머니가 나타나 내가 낮아 있는 의자의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기름기 하나 없이 바싹 메마른 머리를 틀어서 머리 위로 올렸다. 잡으면 부스러질 것 같은 머릿결이다. 작고 둥그런 눈에 굵은 쌍꺼풀이 져 있다. 두툼하고 옅은 쑥색의 죄수복 밑으로 털 쉐타 목 부분이 보인다. 감옥 안에서 옷들을 겹겹이 껴입고 있나보다. 금년 겨울은 몇 십 년 이래로 가장 춥다는 날씨였다. 영하 십도를 넘는 게 보통이고 철원지방은 영하 삼십도 까지 수은주가 내려갔다는 게 기상대의 발표다. 사기 협박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이 그녀에게 내려진 죄명이었다. 나는 그녀에 대한 판결문을 읽었다. 그 요지는 이랬다. 

    ‘.. 피고인은 다방 마담으로서 갚을 능력이 없는데도 일곱 명의 선량한 피해자들에게 돈을 꾸어주면 월 팔부로 갚겠다고 거짓말해서 거기에 속은 피해자들로부터 일천구백만원을 편취하고 돈을 달라고 찾아간 피해자에게 오히려 과도를 들어 죽인다고 협박한 것이다.’

    나는 대번 속으로 동네에서 이사람 저사람한테 달라붙어서 지능적으로 돈을 꾸어가지고 도망한 나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미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항소심 재판장이 그녀를 국선변호하라고 결정해서 내 사무실로 통보했던 것이다. 그런 여자면 합당한 징역인데 뭘 변호해야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갚을 능력이 없이 왜 이렇게 돈을 많이 얻어 쓰셨어요? 사기가 별겁니까? 능력 없이 돈 얻어 쓰고 갚지 않는 게 사기지요. 게다가 어떻게 돈 받으러 간 할머니한테 칼까지 들고 협박을 했습니까? 적반하장 아닙니까?”

    나는 그녀를 위로하기에 앞서 먼저 질타했다. 허위의식에 싸인 동정은 의미 없다고 느끼는 까닭이었다. 내 말에 그녀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는 육감이 들었다. 나는 그녀를 달래어 한 마디 한 마디 차근차근 물어 나갔다.


    그녀가 내게 얘기한 삶은 이랬다. 친정부모가 돌아가시고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던 그녀는 시집을 가서도 시집에 친정 동생을 데리고 있었다. 남편이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동생들이 거리로 쫓겨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여자가 생겼다. 그녀는 남편의 요구대로 협의 이혼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녀가 삶을 위해 자리 잡은 터전은 서울변두리 허름한 건물 지하실의 다방이었다. 다방 한구석에 임시로 가설한 창고 같은 방에서 그녀는 먹고 자고 했다. 

    어려운 가운데 조금씩 남은 돈으로 남편에게 두고 온 아이들의 옷을 사서 몰래 전해주곤 했다. 새 엄마한테서 돈 얻어 쓰기 곤란하다고 아이들이 울먹일 때면 남편 몰래 학교에 가서 등록금을 대기도 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렸던 딸이 어느새 결혼을 했다. 그녀는 딸의 행복을 위해 결혼식장에도 당당히 가지 못하고 식장 밖 나무 뒤에서 신혼여행 가는 딸과 사위의 뒷모습을 쳐다보아야 했다. 쫓겨난 엄마의 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딸은 자기같이 되게 하고 싶지 않은 게 그녀의 소망이었다. 

    어느덧 그녀도 늙어갔다. 금년에 손자를 본 쉰두 살의 할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혼자 사는 삶이지만 점차 쪼들려 갔다. 변두리 다방에서 아가씨들을 고용하려면 선불을 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 여자들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동네 고리대금업자들한테서 일수를 얻어 임시변통으로 아가씨들 월급을 대곤했다. 도심의 커피숍들이 으리으리하게 인테리어를 하는 데 비해 변두리 다방이라 너무 초라했다. 왔던 사람들도 머쓱해 하면서 나가기가 보통이었다. 그렇다고 다방을 그만 둘 수는 없었다. 먹고 살아온 유일한 방법이었다. 또 일수를 얻어 최소한으로 실내장식을 바꾸어 보았다. 

    한 잔에 천원짜리 차를 팔면서 종업원 월급과 이자를 지불한다는 것이 이제 늙은 그녀에게는 무리였다. 이자 갚기에 허덕였다. 어느 날 시집간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엄마, 어떤 여자가 남편이 아직 출근도 안하고 시어머니도 옆에 계신 아침 식사시간에 전화를 했어요. 엄마가 일수를 얻어가고 돈을 갚지 않는 도둑년이래요. 그리고 저나 남편보고 갚으라고 막 소리치는 거예요.. 흑..”

    딸은 미처 다 말하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눈에 불이 났다. 그 자신이 친정 동생 때문에 이혼 당했는데 딸마저 그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예식장에서도 사랑하는 딸 앞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 때 마침 욕하는 전화를 했던 고리대금업자가 다방에 나타났다. 이미 이성을 잃은 그녀는 “오늘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지금 면회 오는 사람 있어요?”

    말을 다 듣고 나는 조용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감옥에 있는 거 누구한테도 비밀로 했어요. 사돈집에서 알아봐요. 우리 딸한테 큰일나지요.. 변호사님, 이거 절대 비밀이에요.”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오히려 내게 당부하는 것이었다.


    “딸도 이 사실을 모른다 말입니까? 딸은 몰래라도 와야 할 거 아닙니까?”

    “....”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눈자위가 뻘개지더니 이윽고 뜨거운 눈물이 넘쳐흘렀다. 잠시 후 나는 구치소의 흰 담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구치소 앞마당이 잎 떨어진 나뭇가지가 메마른 하늘을 향해 앙상한 몸을 드러내고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독한 황혼에 모든 것을 잃고 남은 건 삭막한 징역살이 뿐인 그녀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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