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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문대회 준우승작]다시, 제자리로 간다-9

ABC친구들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09.10 00:3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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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림의 시간은 긴 동시에 짧았다. 길고 짧고 문제는 이제야 왔다고 말하면 긴 거고 벌써 왔다고 하면 짧은 거니까 별 상관없었다. 그 날이 오긴 왔다는 것이 중요했다. 펑펑펑. 내리고 내리다 못해 아렌델을 하나의 나라보단 하나의 섬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 섬을 눈으로 만들어진 바다 속으로 영영 침몰시키고야 말 기세로 내리는 눈. 안나는 그 해 올라프를 직접 만들 필요조차 없었다. 밖으로 걸어 나가기만 해도 눈 속에 파묻혀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안나는 그 공포조차 망각하게 하는 묘한 향기를, 뇌를 가득 메워 이성적인 판단은 모두 마비시키는 묘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마당, 걷기도 힘들 정도의 눈이 오금까지 솟아올라온 왕실의 마당에 그 눈사람이 서 있었다.

 살아있나?

  “...라프...”

  안나가 쏟아지는 눈발을 막아내기 위해 한 쪽 팔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신화적인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멸망할 것만 같은 재앙. 하지만 아무도 그 재앙 자체에 신경 쓰지 않는 그런 순간. 안나는 여왕이었다. 그리고 평소의 안나라면 이 재앙의 순간에는 왕국을 떠올렸을 것이고, 그녀의 사람들을 떠올렸을 것이고, 모두를 구하기 위한, 재앙으로부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뭐하러 그러겠는가? 이게 신화의 종장인데. 일부로 이 순간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데. 모든 것을 되돌리고, 존재하지 않을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되돌려버리기 위해 모든 것이 파멸하는 것인데, 단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안나는 그저 순응할 뿐이다.

  안나는 힘겹게 바람을 견뎌내며 품 안에서 당근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올라프를 향해 힘껏 당근을 집어던졌다.

  빙글빙글. 기세 좋게 날아간 당근은 당연하게도 기적같이 올라프의 코에 쏙 들어가 박혔다. 안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나가 정신을 잃는 순간만으로 기다리며 뒤로 자기 몸을 쓱 넘어뜨렸다. 쓰러져도 아프지 않도록 몸을 받쳐주는 두꺼운 눈들이 편안한 침대처럼만 느껴졌다. 그렇다면 안나가 쓰러진 이후, 미친 듯이 쏟아지며 금세 그녀의 온몸을 덮는 이 눈발들은 그저 이불일 뿐이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 위로도 차례차례 쌓이는 이 눈송이들은 침대 위에 엎드려 얼굴에 뒤집어쓴 베개처럼 그녀의 눈앞을 검게 물들였다. 정신을 잃어서 눈앞이 검어졌는지 눈덩이가 그녀의 눈을 가려 눈앞이 검어졌는지 분간할 방법은 없었다. 안나는 암흑 속에 홀로 놓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암흑은 곧장 마지막 인사의 길로 이어졌다.


****


  “나도 널 잃을 순 없어, 안나.”

  엘사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안나를 꼭 껴안았다. 엘사가 생각을 바꿔먹었다는 착각은 순간 안나가 안도한 표정을 짓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착각은 착각이었다. 곧 차가운 얼음의 감촉이 안나의 발밑을 감쌌고, 안나와 올라프가 자신들이 난데없이 나타난 얼음 배 한가운데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뭐 뭐야? 뭐하는 거야?”

  “미안, 안나.”

  엘사가 양 손을 뻗어 얼음배가 미끄러져 지나갈 길을 만들어낸 다음 안나와 올라프가 미끄러지듯이 올라탄 얼음 배를 한 쪽 발로 힘껏 걷어찼다. 엘사가 기어코 자신을 떠나보내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안나가 원망하는 목소리로 엘사를 불렀다.

  “언니이이이이이이이!”

  미끄러져 사라지는 동생을 응시하며 엘사는 미안함과 안도감이 복합적으로 담긴 표정을 지었다. 안나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쯤, 엘사는 마음을 굳게 먹기로 다짐하고 얼음길을 뒤로 해 휙 돌아섰다. 외롭게 어둠의 바다로의 여정을 시작하려던 엘사를 멈춰 세운 건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엘사.”

  “안나?”

  엘사가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바로 뒤에 난데없이 나타난 안나를 발견한 엘사의 눈이 사방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겨우 떨리는 눈동자를 진정시키고 안나를 천천히 살펴본 안나는 곧 이 안나가 자신이 아는 그 안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다른 옷차림, 조금 더 완숙해진 얼굴, 그리고... 엘사에게 말을 거는 순간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한 목소리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한 감정선. 이 안나가 지금 엘사의 동생 그 안나라면 보일 리 없는 단서들이었다. 엘사는 눈을 한 번 천천히 감았다 떴다. 안나가 엘사에게 말을 걸었다.

  “좀 어때?”

  “좀 늙긴 했지만, 멀쩡해 보이네. 다행이야, 안나. ... 안나 언니? 그렇게 불러줄까?”

  엘사가 자신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그리고 실제로 지금의 그녀보다 조금 더 나이 들어있는 안나를 놀리듯이 말했다. 안나는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묘하게 엘사다운 농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뭐. 나이는 변해도 생년월일은 안변하지. 언니는 내 언니가 맞아. ... 그걸 지키지 않았던 적도 있긴 한데, 그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안나가 한달음에 엘사에게 달려가 품 안에서 이두나의 스카프를 꺼내 엘사에게 둘러주었다. 엘사는 난데없는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곧 이 스카프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차리고 폭소를 터트렸다.

  “알겠다! 알겠어! 재밌는 장난질을 쳤던 거구나!”

  “기억났어?”

  “기억났냐고?”

  엘사가 되물었다. 안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엘사의 눈빛에는 기쁨과 환희, 아련함과 불안이 모두 동시에 느껴지고 있었다.

  “기억이 났다기보다도 기억이 만들어진 것 아니니? 내 어린 시절, 나만의 개인 마법 연습장. 널 봤던 기억은 똑똑히 남아있지만, 동시에 그렇게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도 내게는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

  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엘사는 아무 말 없이 안나의 머리카락 위에 손을 얹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언니의 자상한 손길에 안나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엘사의 예민한 손가락은 안나의 몸이 떨리는 것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엘사가 머리를 쓰다듬던 손가락을 서서히 내려 안나의 얼굴을 쓱 한 번 훑었다.

  “먼 길을 왔구나. 해야 하는 말이 있니?”

  물론 안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왜인지 단 한마디도 제대로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 같진 않았다. 엘사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안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키는 안 자랐네?”

  “내가, 내가 애초에 자랄 나이였어? 언니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마지막.”

  엘사가 한숨을 쉬려다 멈추고 약간 콧바람만을 내뿜었다. 안나가 입을 헉 다물고 뒤로 고개를 젖혔다. 엘사가 아련한 눈으로 안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죽어?”

  엘사가 태연하게 물었다. 안나가 정곡을 찔린 듯 당황한 모습으로 뒷걸음질 쳤다.

  “?”

  “오늘? 혹은 내일. 어쨌든 인사할 새도 없이, 내가 죽는 거야?”

  “언니...”

  안나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동자만 굴렸다. 안나의 모습을 본 엘사가 대답을 듣지 않기로 결심한 듯 가볍게 화두를 돌렸다.

  “내가 기억하는 건 두 번이야. 이번에 세 번째니?”

  “네 번째. 세 번째 때는 언니의 눈에 띄지 않았어.”

  “그렇구나. 많은 선물을 받았네, 너는. 정말 편애 받는 아이야.”

  엘사가 말했다. 안나도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 하지만 왜 내가 편애 받아야 하는 거였을까? 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일까?”

  “네가 한 일, 그리고 내가 방금 얼음길 너머로 밀어 보낸 저 아이가 곧 할 일에 대한 보상이겠지. 뭘 했는지는 말할 필요 없어. 그건 내가 알아내야 할 몫이니까. 그렇지?”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이게 내 운명인 것도 잘 알지. 시간여행과는 별개로, 지금 현재의 일은 현재의 일인 거야. 그리고 그 길의 종착점이 죽음이라면,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나도, 너도.”

  “그럼 내가 이 자리에 왜 있는 건데?”

  “?”

  “언니는 언니 기준에 맞춰서 생각하고 있지? 나는 내 기준에서 생각할 거야. 고작 한 번 밖에 과거로 못 가본 언니와, 이번이 네 번째인 나는 전혀 달라. 네 번째. 그 의미를 이해할 거 아냐?”

  “되돌아가면 다섯 번째 세계겠지.”

  “그리고 다섯 번째란 의미는...”

  “다섯 번째 정령. 다른 말로는 연결고리야. 되돌아간 너는 네 번의 여행과, 네가 사는 그 세계를 연결할 연결고리에 놓이는 거겠구나.”

  “과거와 현재를 잇는 것과는 다르지. 과거로 갔던 여행과, 내가 사는 현재를 잇는 일. 다섯 번째 여행의 의미는, 부여된 자유는 전혀 다를 거라고.”

  “그리고 그 자유가 나에게 주어졌다는 거니?”

  “내가 여기에 온 이상, 그 말이 맞아. 그걸 잘 감안해줬으면 좋겠어.”

  엘사는 입을 꾹 다물었다. 잠시 양쪽 뺨을 부풀렸다 쪼그라들었다 조용히 숨 쉬는 것을 반복하던 엘사가 새끼손가락을 뻗어 안나의 코를 쓱 쓰다듬었다.

  “. 이제 그만 자러 가.”

  “언니.”

  “네 말 잘 알아들었어. 내게 바라는 게 있다는 거, 그리고 그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 잘 알아들었으니까, 돌아가서 쉬고 있어. 예전처럼 해가 뜨면 깨워줄게, 안나.”

  “마지막 인사 안한 거지? 유언 한 거 아니지?”

  안나가 다급하게 엘사의 손을 부여잡으며 외쳤다. 엘사는 금방이라도 폭소를 터트릴 것처럼 입가를 씰룩거렸지만, 정작 입을 열었을 때 그녀가 내뱉은 목소리는 꽤나 차분했다.

  “물론이지 안나. 난 아직 마지막 인사 한 적 없어. 이건 기약 있는 인사야. 그러니까 안심하고, 이만 자러 가.”

  달이 떴다. 엘사가 이번엔 새끼손가락에 약한 마법을 담아 안나의 코를 쓱 쓰다듬었다. 달빛이 비췄다. 엘사의 결심. 안나는 그대로 잠들었다.


****

 

  안나 공주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곤히 자고 있었다. 위아래로 베개로 깔려 샌드위치가 된 안나의 얼굴은 밖에서 본다면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안나는 두 눈을 떴는데도 눈앞이 깜깜한 거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퍼뜩 일어섰다. 눈더미가 얼굴에 덮여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안나의 짐작이 어긋나고, 자신의 무릎에 떨어진 것이 다름 아닌 엘사의 베개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안나 공주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앞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났어?”

  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나는 천천히 이불 밖으로 걸어 나와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테라스. 그리고 그 테라스에서 태양이 환하게 내리쬐는 아렌델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 금발의 여성. 흰 날개옷을 입은, 천사 같은 금발의 여성. 엘사였지만,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는 아렌델의 여왕이었다. 안나는 두 눈을 몇 번씩이나 비벼가며 엘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엘사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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