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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장편] 얼음꽃 (2)

서리나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0.10.08 20: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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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링크] 얼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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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꽃




(2)








3. 크리스토프 / 발데로스 산장(Vardaros Mountains)



가장 지독한 악몽은 가장 생생한 꿈이라 누군가 그랬었다.



그래서일까, 크리스토프는 잠에서 깨어서도 질척한 여운을 좀처럼 떨쳐 버리지 못했다. 시작의 경계가 불분명한 몽상의 세계에서 먹구름처럼 아무런 색깔 없이 잿빛으로 뭉뚱그려진 아렌델을 크리스토프는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여느 꿈이 그렇듯 색채가 사라진 동네를 걸으면서도 그는 조그만 위화감조차 품지 못했다. 그 어떤 인적도 보이지 않는 왕성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달콤한 잠이 눈과 귀를 속이고 크리스토프는 그저 무의식의 현혹에 하염없이 끌려갈 따름이었다.



흑백의 세계에서 재색 도로를 따라 걸어 크리스토프는 마을과 성을 잇는 다리로 다가섰다. 회색 나라에서 오직 다리 아래 흐르는 바다만이 짙푸른 색채를 띠고 있었다. 하역장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서지는 파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문득 이는 기다란 기적 소리에 그는 해안 절벽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동쪽 고원에 난 철로를 따라 높은 매연이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발길 닿는 대로 터벅터벅 성문을 향해 걷다 크리스토프는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런 저항 없이 활짝 열린 성문을 보고서야 빳빳한 위화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붉은 혐오가 아렌델을 덮치고 시위의 물결이 이곳저곳에서 인 후로 아렌델은 성문의 빗장을 결코 푸는 법 없었다. 마치 동상처럼 굳은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하는 병사들을 일별하다 그는 왕궁 마당을 휘 둘러보았다. 그림자 하나 없는 마당은 죽은 듯 고요했다.



“올라프!”



그 어디에도 대답은 없었다.



“카이! 겔다!”



해무가 덮인 하늘에는 태양이 없었다. 짙은 먹구름이 해무를 몰아내고 하늘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을 간신히 몰아내며 크리스토프는 나선형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손나발을 하고 연신 아는 이름을 외쳐 보았다.



“매티어스 장군님!”



이상할 정도로 사위가 고요했다. 계단에 덮인 카펫이며 나무판으로 이뤄진 벽이 마치 두껍게 쌓인 눈처럼 소리를 모조리 잡아먹고 있었다. 무덤가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처럼 왕성의 모든 이들이 이곳저곳에 숨어 있을 것만 같아 크리스토프는 과장스레 짐짓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입에서 퍼진 공허한 외침은 천장과 벽을 타고 흐르다 단절된 공간 너머 사라지고 말았다.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조난자가 된 기분이었다. 술래는 여전히 외로운 장난을 멈추지 못했다.



“안나!”



그 어떤 인적도 발견할 수 없는 복도를 걸어, 크리스토프는 녹슨 입으로 신음을 흘리는 문을 하나 둘씩 열어젖혀 보았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아렌델은 회색 분진으로 덮여 부옇고 탁했다. 면과 면의 경계가 흐릿한 공간을 크리스토프는 걷고 또 걸었다. 검지를 들어 창틀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기도 하고, 벽에 걸린 액자를 살펴보기도 했다. 분진이 눈꽃처럼 떨어지며 드러난 부드러운 화폭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엘사의 그림체였다.



두껍게 낀 먼지를 마저 털어 내곤 옛 추억에 잠겨 크리스토프는 한참 그림을 뜯어보았다. 그것은 피오르드 뒤쪽 야트막하게 난 뒷동산에서 봄 소풍을 즐기고 있는 안나와 자신의 모습이었다. 너른 느티나무 그늘 아래 침까지 흘려 가며 그의 어깨에 기대 낮잠을 자는 안나와, 동산에 만개한 들꽃으로 화환을 만드는 올라프, 그리고 사랑에 젖은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쓸어넘기는 제 모습을 크리스토프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봄이 흐드러진 들판에도 색깔은 없었다. 그림 속에는 엘사가 없었다. 엘사가 그린 그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절이었으나 크리스토프는 마치 그것이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행복을 담아야 할 액자는 얇은 쓸쓸함으로 덮여 있었다.



무거운 발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다 크리스토프는 작은 흐느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지랑이의 물결을 따라 검은 설움이 작은 파랑으로 대기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형체 없는 사방의 모든 것들이 무형의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노려보는 기분에 크리스토프는 순간 섬뜩함에 질렸다. 서슬 퍼런 파동의 근원에는 새카만 연무를 쿨럭쿨럭 뱉어내는 육중한 문이 기다란 복도의 끝에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어둠의 왕좌로 향하는 지옥문처럼 음험한 아가리를 벌린 문에서 흘러나오는 남색 기운이 그를 꾸역꾸역 잡아먹고 있었으나 호기심의 유혹은 너무도 강했다. 잿빛이 어둠에 모조리 삼켜지는 지평에 이르러,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곤 크리스토프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기나긴 우주 속을 유영하는 착각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어두컴컴한 잿더미가 딱지처럼 눈앞에서 하나 둘씩 떨어져 내리며 크리스토프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어영부영 중심을 잡고 손을 들어 재를 털다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에 그는 순간 얼어붙어 버렸다. 발코니 흔들의자에 시체처럼 늘어진 안나가 차가운 햇빛을 받으며 시든 겨우살이 줄기만 하염없이 매만지고 있었다.



“안나.”



서슬 퍼렇게 일그러지는 주홍 배경 속에 앉은 안나는 금방이라도 한 줌 재로 바스라질 것처럼 너무도 수척했다. 헝클어져 쏟아져 내리는 머리카락이 무섭도록 창백한 그녀의 얼굴을 무한한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서늘한 북풍이 늦가을 잎새처럼 메마른 그녀를 스치운다. 망치로 가슴을 세게 얻어맞은 듯 숨통이 콱 막혀 크리스토프는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한참 헐떡였다. 겨우 숨을 고르고 아내를 부축해 안으로 옮기려 했으나 허리를 숙이자마자 그는 앞으로 푹 고꾸라지고 말았다. 순간 몸이 투명해지면서 의자를 쑥 통과해버린 탓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


“안나, 아직도 여기 있네.”



유령처럼 뚫린 제 몸을 더듬다 크리스토프는 당혹스런 시선을 들었다. 그가 지나온 자리로 작은 인영이 뒤뚱거리며 발코니로 다가오고 있었다. 몸에 박힌 눈꽃 결정이 햇살에 반짝인다. 올라프였다.



“안나. 날씨가 많이 추워.”



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어쩌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그녀는 죽지 못해 겨우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온기를 되찾아 줄 요량으로 올라프는 가느다란 팔을 뻗어 안나의 손을 수없이 문질러 보았으나 한낱 나뭇가지에서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을 리 없었다.



“뭔가를 좀 먹어야지.”



푸석푸석하게 갈라진 입술을 달싹이다 안나는 이내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나, 네가 쥐고 있는 이 겨우살이를 봐.”



30. 아렌델을 떠나기 전 크리스토프가 안나에게 주고 간 겨우살이는 그가 엘사를 찾아오겠다며 약속한 날과 같은 수를 갖고 있었다. 올라프의 손길을 따라 안나는 푸석푸석하게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를 조심스레 세었다. 마디가 툭 불거진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너무도 가냘펐다. 남은 잎새는 십여 개에 불과했다. 문득 아내의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 한다는 회한이 사무쳐 크리스토프는 어금니를 꽉 맞물었다. 파들파들 떨리는 아내의 동작 하나하나가 심장을 비틀어 짜내는 것만 같아 그는 고통 속에 한참을 신음했다. 손끝에 스친 이파리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휘청거리다 맥없이 떨어져 내렸다. 낙엽이 떨어진 자리에 인 파문은 심장의 무게만큼이나 너무도 묵직했다.



“이제 열흘 남짓밖에 남지 않았잖아.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크리스토프가 꼭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거야. 늘 그랬잖아.”


“내....... 내 판단은.......”


“넌 충분히 잘 해 오고 있었어. 넘치도록 충분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오고 있었어.”


“분명 더 나은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더 나은 방법이.......”


“마키아벨리가 그랬어, 현명한 잔인함이 진정한 자비라고. 하지만 너는 이때까지 잔인함보다는 사랑으로 사람들을 이끌었잖아. 그러니 안나, 네 판단은 항상 옳았어. 너 자신을 믿어.”



올라프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지만 책에서 읽은 것은 그저 이론이라는 허상에 불과할 뿐 그녀에게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투명한 내벽에 가로막힌 크리스토프로서는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 봤자 텅 빈 공간에 갇힌 공허한 아우성에 불과했다.



“내가 조금 더 현명했더라면 엘사 언니를 지킬 수 있었을 거야. 내가 조금 더 지혜로웠더라면.......”


“안나.......”



팔을 벌려 올라프는 그녀를 안아주려 했지만 목각인형처럼 늘어진 안나는 좀처럼 그를 껴안지 못했다. 뼈만 앙상히 남은 팔에 머리를 묻고 그녀는 괴로워했다. 마른기침이 멎질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굽혀 크리스토프는 아내를 살피려 했지만 둔중한 몸은 그저 그녀를 통과해 지나갈 뿐, 세계는 형체가 없는 자의 사랑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독한 단절감에 빗장처럼 찔려 크리스토프는 그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못 박혀 서 있을 따름이었다. 서로에게 어떤 온기도 전해줄 수 없는 꿈이 너무도 원망스러워 크리스토프는 울음을 연신 삼켰다. 햇살 조각 하나 들지 않는 세계에서도 가물은 가슴은 쩍쩍 갈라진다. 아린 심장을 꽉 틀어쥐자 부서진 사랑이 손틈 사이로 흘러나간다.



서늘한 돌풍이 파편을 쓸어갔다. 바람의 손길은 너무도 낯설었다.



“어.......?”



수천 개의 작은 눈꽃이 불티처럼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부스러기의 흐름을 좇다 크리스토프는 황망한 시선을 돌렸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겪어본 적 있던 일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안나.......”



오래되어 박피가 조각나 벗겨지는 밀랍인형처럼 올라프가 무한한 공간으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올라프.......?”



창백한 경악이 안나의 얼굴에 퍼져나간다. 쓰러지듯 몸을 던져 안나는 올라프를 더듬었다. 다급한 손길이, 별의 잔흔처럼 수없이 떠나가는 눈송이를 붙잡을 요량으로 텅 빈 공간을 허망하게 헤집었다. 하지만 형체를 갖추지 못한 파편은 손에 닿기가 무섭게 안개처럼 녹아 사라질 뿐이었다.



“올라프, 이게 대체 무슨.......”


“오, 안나.”



엘사.



슬픔이 공황이라는 칼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잔인하게 깎아낸다. 안나는 올라프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쇠약한 몸에 걸친 옷자락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앙상한 팔은 그를 붙잡지 못했다.



“엘사가 마법을 더 빠르게 잃고 있나 봐.......”


“안 돼, 올라프. 가지 마.”


“마법의 숲에서 이상 증세가 일어난다던 노덜드라 인들의 말이 맞았어. 안나, 노덜드라의 동굴에서 있었던 일 기억나?”


“가지 마, 제발....... 날 이렇게 혼자 두고 가지 마!”


“안나.”



가냘픈 손을 들어 올라프는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더 이상 눈물을 쏟지 못하는 메마른 눈구멍을 슬피 바라보았다.



“널 이렇게 두고....... 미안해.”


“아니, 미안하다고 하지 마. 가지 말라고!”


“그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왜, 왜!”



올라프를 부서져라 꽉 껴안고 안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왜 다들 날 떠나가는 거야. 왜, 도대체 왜!”


“눈이 편히 안 감겨. 안나, 네가 너무 걱정돼.”



안나와 눈을 마주치며 올라프는 울먹였다.



“지난번에는 내가 없어도 너 홀로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미약하게나마 있었어. 이번 죽음에서는....... 확신이 없어.”



눈사람의 푸른 살결에 닿는 눈물은 더 이상 차갑지 못했다. 품에서 서서히 녹아내리는 올라프의 육신을 부여잡고 안나는 꺽꺽대며 울었다. 텅 빈 막연한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절규했다. 눈꽃과 함께 절규가 바스라진다.



“이제 네 홀로 해나가야 해, 안나.......”



이곳이 미몽의 세계임을 알면서도, 그리고 자신이 몽환 속 무형의 존재임을 알면서도 크리스토프는 무릎을 꿇고 아내를 꼭 껴안았다. 비록 지금은 온기가 전해지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체온이 바다 건너 아렌델까지 닿을 수 있도록, 커다랗게 울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과 쿰쿰한 건초 냄새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체취를 그녀가 느낄 수 있게끔, 애틋한 마음이 닿아 허기진 희망을 채울 수 있게끔. 그렇게 꼭 껴안고 한참을 있었다.



올라프는 한 줌 새하얀 재로 흩어졌다. 차디찬 눈발은 사방으로 흩날릴 뿐 바람은 그 잔해를 어딘가에 모아 두지 않았다. 아렌델을 뒤덮었던 주홍빛 광채가 잿빛으로 거두어지고 있었다. 의미 없이 공허를 울부짖던 돌풍이 세계를 부수고 북쪽으로 달음박질쳤다.



“안나, 안나!”



검은 각혈을 토하며 쓰러지는 안나를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다 크리스토프는 세상을 향해 있는 힘껏 고함쳤다. 메말라 비틀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노기 서린 포효를 쏟아냈다. 포효는 짐승의 울음처럼 어그러지고 뒤틀렸다. 세상의 껍질에 금이 일며 그 틈으로 새어드는 잿빛 섬광이 그를 또다시 이계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먹구름이 걷히자 슬피 우는 바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외로운 성에는 비참한 여왕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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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조절 실패해서 이번화는 양이 적네요.....크흑


양 많아서 읽기 부담스러운 것보단 적게 술술 읽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짧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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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닉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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