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같던 시간이 지난 후, 응급의학부실은 환자들로 붐볐다.
만마전과 선도부, 두 세력 간의 다툼에서 발생한 부상자들을 치료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난민이 중심이었던 만마전의 피해가 더 크긴 했지만, 선도부에서도 적지 않은 응급 환자들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위독한 환자는...
"의장님... 의장님, 제발 눈을 떠주세요... 제발 일어나서, 못난 저를 혼내주세... 으흐윽...!"
"으아앙! 마코토 선배, 일어나~! 앞으로 선배 푸딩 안 뺏어먹을게!"
"두 분 다 조용히 해주시죠. 마음은 이해하지만, 의장은 지금 절대 안정이 필요합니다."
이런저런 장치들을 달아놓은 채 누워있는 마코토를 붙잡고, 이부키와 이로하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말리는 응급의학부장 세나도, 표정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 있잖아, 의장은 언제쯤 눈을 뜰 수 있는거야?"
"죄송합니다, 치아키 씨. 저희로선... 확답할 수 없습니다."
"역시, 그렇겠지..."
치아키가 세나와 잠시 대화하는 동안, 난 마코토의 안색을 살폈다.
급히 지혈하긴 했어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일까,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바로 응급의학부에 데려와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나저나, 생각보다 침착하시군요. 그러니까... 샬레의 선생님?"
"자랑은 아니지만, 더 심한 일도 겪어봤거든."
이 세계에 넘어오기 바로 전까지 상공 7,500m에서 세계를 건 싸움을 치른데다, 그거 말고도 이런저런 일이 많았으니까.
"그렇다면 혹시... 하나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러려고 여기 있는거니까."
"다행이군요... 그럼."
세나는 자신이 들고 있던 진료 차트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건 차트잖아? 저기, 난 이런 거 봐도 잘 모르는데..."
"꼭 이해해달라는 의미라기보단... 환자, 그러니까 의장의 보호자로서 그녀의 상태와 향후 진료에 대한 동의를 구하고자 합니다."
"어? 내가? 뭐 어려울 건 없는데..."
학생을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은 나였지만, 이건 좀 갑작스러웠다. 이방인인 나를 이렇게까지 믿어준다고?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이곳 게헨나엔 제대로 된 어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바보같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죠."
"꽤나 냉정하네."
"사실이니까요. 아무튼 그렇기에, 어른인 당신에게 맡기고 싶습니다. 어두운 시간을 밝혀줄 게헨나의 희망인, 마코토 의장을요."
세나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리고 나 역시, 학생들을 외면할만한 위인이 못 되었다.
"그래, 믿어줘서 고맙구나."
"앗!... 그,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 자제해주시죠..."
아차. 무심결에 세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그래도 뭐, 내 세계에서 보기 힘든 세나의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봤으니 이득인가?
그러는동안, 슬슬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얘들아? 슬픈 건 알지만, 이제 돌아갈 시간이야. 어서 가서 남아있는 사람들을 도와줘야지."
"크흑, 쿨쩍... 네, 선생님. 이로하 선배, 어서 가죠."
"으흑, 흑흑... 선배애..."
이부키는 어쩔 수 없이 힘으로 이로하를 베드에서 떼어냈고, 우리는 캠프로 돌아갔다.
"준코 씨! 여기 짐 좀 옮겨주세요! 이즈미 씨는 저쪽에서 천막 세우는 걸 도와주시구요. 아카리 씨는 급양부에서 주리 씨와 함께 저녁을 준비해주시겠... 어머? 만마전 여러분?"
"오랜만이네, 하루나 선배. 복구 작업은 좀 어때?"
"후훗, 보다시피 다들 협조해줘서 말이죠. 순조롭답니다?"
현장 지휘에 한창이던 하루나는 복귀한 치아키와 인사를 나눴다.
"하루나는 이런 현장 일에 익숙한가 보구나? 후우카 땅의 자랑스러운 언니답네."
"주기적으로 게헨나 상업 구역에서 부원들과 봉사 활동을 하곤 했거든요. 내전 때문에 지금은 떠나신 분들이 많지만..."
말을 흐리는 하루나의 표정은 씁쓸해보였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의 미식연은, 상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그런 모습을 두고볼 수 없어, 난 하루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이 싸움을 끝내고 나면, 그땐 다들 예전처럼 돌아오실거야."
"앗! 아,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좋은 사람이네요."
세나도 그렇고 다들 스킨십에 놀라는 눈치다. 하긴 만난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러는 건 무례한 일이겠지? 아무래도 자제해야겠다.
"그나저나 이부키 땅은... 역시 상심이 큰가 보네요."
"울던 걸 겨우 달래서 돌아오는 길이야. 이로하는 그래도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지만..."
뒤를 돌아보니, 이로하는 고개를 푹 숙인 이부키를 보며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우으, 이부키... 혹시 화 났어?"
"... 죄송해요, 이로하 선배. 잠깐 혼자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이부키는 자신이 쓰던 천막으로 달려들어갔다.
"에엑! 가버렸어..."
"역시... 저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들 뿐이네요."
하루나는 팔짱을 낀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이부키가 달려간 쪽을 보고 있었다.
"치아키, 하루나. 복구 작업을 맡겨도 될까? 이부키랑 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응? 아, 물론! 다녀와, 선생님!"
"혹시 울리면 용서 안 할테니까요?"
든든한 두 학생이 현장 지휘를 맡아준 덕분에, 난 이부키와 대화할 시간이 생겼다.
"이부키, 있니?... 어우, 이런."
"읍, 으으읍, 흐윽..."
천막으로 들어가니, 거기에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흐느껴 우는 이부키가 있었다.
"이부키? 힘든 건 알지만, 지금은..."
"전부 저 때문이에요..."
어깨라도 두드리며 달래주려 했지만, 이부키는 내 손길을 거부했다.
"이로하 선배가 저렇게 된 것도, 마코토 의장님이 다친 것도... 전부, 전부 제가 부족해서였어요... 저만 아니었어도...!"
선생으로서 학생의 자학을 듣는 건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난 이부키의 어깨를 붙잡고, 그녀와 눈을 맞췄다.
"이부키, 잠깐 선생님 좀 볼래?"
"네...?"
너무나 울어서 붓고 충혈된 눈이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아까 세나가 그러더구나. 마코토 의장은, 게헨나의 어두운 시간을 비춰줄 희망이라고."
"네, 그 말대로예요. 그런데 전..."
"그리고, 그런 마코토가 목숨을 걸면서까지 널 구하려고 했단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니?"
"네? 그, 그건..."
이부키는 당황한듯했다. 난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마코토의 희망이라는 거야. 금방이라도 꺼질듯 위태롭지만, 분명히 어둠을 밝혀주는 작은 촛불 말이지. 그러니까 이부키, 마코토가 진정으로 네게 원했던 게 무엇일지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그건... 제가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말인가요?"
"더한 것도 해낼 수 있지! 네가 되고 싶은 존재는, 네가 결정해도 돼."
그 말에 이부키는 조금 힘을 얻은듯,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낸 다음 벌떡 일어섰다.
"저, 그러니까... 덕분에 힘이 났어요. 고마워요, 이상한 어른."
"그 호칭 좀 어떻게 안 될까? 뭐, 네가 좋다면야 나도 상관없지만."
그렇게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온 이부키는,
"아, 이부키 땅! 기분은 좀 어떻... 어머, 괜한 걱정이었나 보네요?"
아주 조금, 만마전에 어울리는 의젓한 아이가 되어있었다.
이후 이부키는 나와 만마전, 그리고 미식연구부를 임시 작전본부로 불렀다.
만마전의 건물은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게 되었기에, 아직 멀쩡한 천막에 필요한 설비를 갖춰두고 작전회의를 시작했다.
"이번 전투로 만마전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그건 선도부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이 다 함께 싸워주신 덕분이죠. 이 점에 대해, 미식연 여러분께 감사를 표하고 싶어요."
"저흰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이랍니다? 감사는 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받도록 하죠."
하루나가 이부키에게 살짝 모자를 벗어 감사를 표한 후, 이부키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선도부 측은 현재 소라사키 히나라는 최대 전력을 잃었어요. 회복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죠. 이 틈을 노려 공격하면 좋겠지만..."
"앞서 이야기했듯, 우리 역시 제대로 된 전력이 남아있지 않아. 오히려 역공당하고 말겠지."
치아키는 분한듯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요. 선도부 쪽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파악하고, 이를 저지한다. 이렇게 하면 적은 병력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을거예요."
"문제는 그걸 어떻게 알아내냐는 거겠네요? 흐음~, 뭔가 생각해둔 거라도 있나요?"
"... 바로 그걸 의논하려고 여러분을 여기 부른 거예요. 사실, 이 이상은 감이 잡히질 않아서..."
아카리의 예리한 지적에, 이부키는 풀이 죽은 채 대답했다. 하긴 혼자 고민해봤자 답이 없는 문제긴 하지.
그렇다곤 해도, 모여있는 사람들 모두 뾰족한 수가 있지 않았다. 애초에 방법이 있었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로 실행에 옮겼을 테니까.
그렇게 모두 고민에 빠져있던 중...
"아! 이부키! 나 좋은 생각 있어!"
"어... 얘기해보세요, 이로하 선배."
재빨리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친 이로하에게, 이부키는 발언권을 주었다.
"있지, 우리끼리 고민해봤자 아무것도 모르겠으니까, 우리보다 훠~얼씬 똑똑한 사람한테 물어보자! 어때?"
"하아... 선배, 그 똑똑한 사람들이 지금 여기 모여있잖아요. 우리끼리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아냐아냐! 한 명 있잖아, 사츠키 선배!"
"... 네? 누구요?"
"어? 잠깐, 뭐?"
이로하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은, 나와 이부키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러고보니 이상하긴 했다. 왜 만마전에 사츠키가 없지?
"확실히 정보부장으로서 유능한 사람이긴 했지만... 그 사람은 결국, 오컬트에 심취해서 만마전을 나갔잖아요. 책임감도 뭣도 없는 사람을 뭐하러..."
"그치만! 이대로 있을수는 없잖아, 안 그래?"
이로하의 그 말을 듣고, 나와 이부키는 서로 눈이 마주쳤다.
"... 해볼 수밖에 없겠지?"
"어쩔 수 없겠네요... 뭐 좋아요, 이로하 선배. 전차를 준비해주세요. 만마전 서고에 그 사람 주소가 남아있을 거예요."
"그것도 서고가 멀쩡할 때 얘기지만... 뭐, 나도 찬성이야. 그럼 준비할게."
"어? 그럼 우리는 뭐하면 돼?"
이즈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어보자, 하루나가 대신 대답했다.
"저흰 이 캠프를 지키고 있도록 하죠. 아직 고칠 곳도 많고, 선도부가 또 나타나면 위험하니까요."
"그거 괜찮겠네! 급양부 쪽도 걱정되고."
하루나의 제안에, 준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럼, 다녀올게!"
그렇게 나와 만마전의 세 사람은, 사츠키를 찾으러 떠났다.
한편, 만마전 건물의 지하 창고에서는 한 소녀가 어둠 속에서 길을 찾고 있었다.
"이쪽으로 나가면 되나? 다행히 금방 찾았네."
선도부의 저격수 시로미 이오리는, 상상을 초월한 고문(?)을 받고 의식을 잃었다가, 외부에서의 충격을 느끼고 깨어났다.
천장이 일부 무너진 것을 보아, 밖에서 격전이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후훗, 이대로 탈출하면 아무도 모르겠..."
"이부키, 여기 있는 거 맞아?"
"히이익!"
무너진 천장으로 빠져나가려던 중, 그 끔찍한 고문관의 목소리를 들은 이오리는 그대로 웅크려 몸을 숨겼다.
"네, 분명 여기에 학생 명부가... 아, 찾았다!"
"이 목소린... 만마전의 꼬마?"
사다리가 삐걱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나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쿄고쿠 사츠키, 쿄고쿠 사츠키... 아, 찾았어요! 아마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이 주소일 거예요."
"그거 다행이네. 그럼 어서 출발하자. 이로하가 기다릴거야."
목소리와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이건 기회다.
"놈들을 추적한다... 그 때의 설욕을 위해서!"
이오리는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가, 멀리서 전차가 떠나는 모습을 확인했다.
어디로 가는 건지는 몰라도, 놈들을 쫓아야 했다. 놔뒀다간 선도부를 무너뜨릴 게 뻔하니까.
"두고봐, 만마전 녀석들...!"
"으, 으음..."
"아, 일어나셨나요 부장님? 저희가 걱정을 많이 했답니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잠이 깬 선도부장은, 기지개를 켜며 옆 좌석을 확인했다.
선임행정관 아마우 아코는 직접 차를 몰고 선도부로 향하고 있었다.
"고마워, 아코... 미안해, 걱정 끼쳐서."
"뭘요. 그나저나 좀 더 쉬어야지 않겠어요?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을텐데요."
"걱정 마, 손도 발도 멀쩡히 움직이니까. 그것보다도 저기..."
잠이 덜 깨서인가, 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도부 정문에, 웬 거대한 드릴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거... 뭐야?"
"응? 아니 잠깐, 저건!"
급하게 차를 세운 아코는, 재빨리 내려 드릴이 가로막은 정문으로 향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온천개발부? 당장 이거 안 치워요?"
"어? 아코, 안녕~! 싸움은 어땠어?"
온천개발부의 행동대장 메구는 해맑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요! 당신네 부장에게 연락해서 빨리 이것 좀 치우...!"
"그건 어렵겠는데, 아코?"
아코의 뒤에서 조그마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온천개발부의 부장, 카스미였다.
"그게 무슨 뜻이죠?"
"몰라서 묻나? 우린 전쟁에서 형편없이 밀린 녀석을 파트너로 둘 생각이 없다는거지."
카스미는 웃으면서 손에 든 빨간 버튼을 눌렀다.
"설마...! 부장님!"
아코는 급히 히나가 있는 차로 뛰었지만,
그곳에선 이미 거대한 폭발이 모든 것을 앗아간 이후였다.
"부장의 차가 당했다!!"
"뭐야, 뭐가 어떻게 돼가는 건데!?"
부원들의 절규어린 목소리가 아코의 귀에서 마구 울렸다.
"아... 아아...!"
"어이쿠,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카스미는 성큼성큼 아코에게 다가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랑 손잡을 생각 없나? 우리 입장에선 일손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겠는데."
"그걸...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부장을 돌려내라고요, 당장!"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카스미는 다른 버튼을 눌러, 정문에 세워둔 드릴을 작동시켰다.
아니, 그 거대한 것을 더 이상 드릴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나선의 괴물이라고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이, 이건!"
"다들 피해!"
"이런 망할, 뭐 저리 빠른... 으아아악!!"
"안돼... 안돼...!"
거대한 그것은, 선도부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
연재 속도를 더 빨리 하려고 늘 마음만 먹는 못난 작가입니다.
다음화에는 사츠키와 더불어 의외의 얼굴들이 등장합니다.
기대해주시길,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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