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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결혼 1

운영자 2010.10.28 12:17:37
조회 382 추천 0 댓글 0

  하영과 교제한 지도 몇 년이 되었다. 말수가 적은 그녀는 진정으로 나의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도 마음이 통했다.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그녀에게 나는 어떤 결정을 내려주어야 했다. 하영의 집에서도 걱정이 많은 눈치였다.


  양가 부모들이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결론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튀고 말았다. 양가 합의로 결혼시키지 않는 쪽으로 매듭이 지어진 것이었다. 하영에겐 외출 금지 명령이 내려졌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용히 나를 불렀다.

  “야, 너 여자가 그렇게 급하냐?”


  “이제 결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해요.”

  “아들 결혼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만, 몸이 약한 것 같던데.”


  “병들어 며칠 후에 죽는다 해도 데려와서 장사 치러줄 거예요.”

  “그게 뭔데? 사랑이냐?”


  “사랑은 물론이고 의리도 지켜야 해요. 나한테 얼마나 잘했는데요.”

  아버지는 나무라면서도 빙그레 웃었다.


  어머니는 아예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먹지 않아서 입이 부르텄다. 아들을 향한 데모였다. 외아들에 대해 온 정성을 바쳐온 어머니였다.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나는 계산적인 인간을 가장 비열하게 생각했다. 사랑을 하다가 지위나 돈에 의해 마음이 바뀌는 그런 인간들이 정말 싫었다. 양가 어머니가 그랬고, 아버지들은 아내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1979년 12월 말이었다. 나는 하영과의 결혼을 단행해 버리기로 결심하고 고등학교 은사인 강송식 선생에게 전화를 했다. 평소 참교육을 부르짖는 용기있는 교사였던 그분은 화려한 경력으로 고액과외로 돈을 벌 수 있는 길도 뿌리치고 인왕산 꼭대기 좁은 아파트에서 도인같이 살고 있었다.


  “선생님, 저 도둑장가 들려고 하는데 주례 좀 서주세요.”

  나는 대뜸 용건부터 말했다.


  “아닌 밤에 웬 홍두깨 같은 소리냐?”

  나는 대강의 사정을 말씀드렸다.


  “글쎄, 제자가 해달라니 하긴 하겠다만, 그 뒤에 닥칠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구나. 너야 도둑장가 들고 튀면 그만이지만, 나는 선생이 말려도 시원찮을 판에 같이 그러면 어떡하라는 거냐고 양가 부모들한테 닦달을 당할 거 아니냐? 그 십자가까지 질 각오를 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에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뜻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해주세요.”

  나는 단호한 태도로 거듭 부탁했다.


  “알았다.”

  선생님은 간신히 승낙을 했다.


  다음은 혼인신고였다. 하영의 부모가 백기를 들게 하려면 호적상 혼인신고부터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법무관 동기생 중 두 사람에게 사정을 얘기했다. 한 사람은 지금의 박동영 부장판사이고 또 한 사람은 육군사장을 지낸 박선기 변호사였다. 그들은 기꺼이 나의 공정증서 원본 불실기재죄의 공범으로 동참해 주었다. 혼인신고 서류상 증인이 되어 준 것이다.


  며칠 후 종로구청을 나오면서 나는 위조한 도장들을 기가 기와집 지붕 위로 날려버렸다.

 

  강남구청 건너편 이면도로에는 길가 음식점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희미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얼어붙은 언덕길을 올라가 하영의집 벨을 눌렀다. 잠시 후 하영의 어머니가 나와 노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하영이 만날 생각은 말게.”

  “잠깐만 만나면 되는데요.”


  “잠깐도 안 돼.”

  아예 하영과 나 사이를 칼같이 끊어버리려는 것 같았다.


  “그럼, 이 문 앞에서 1분만 얘기하고 끝낼께요. 그것도 안 돼요?”

  나는 마치 행패라도 부릴 듯한 태도로 재촉했다. 하영의 어머니가 약해졌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만이야.”

  잠시 후 하영이 집에서 입는 옷에 스웨터만 걸친 차림으로 나왔다. 나는 하영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문 닫고 잠깐만 안으로 들어가 계세요.”

  하영의 어머니가 철문 안쪽으로 몸을 피해 주었다.


  ‘하영아, 가자!“

  내가 하영의 손을 꽉 잡고 끌었다. 그녀로서는 부모의 말을 듣느냐, 장래의 남편을 따르느냐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하영은 나를 따라 담대하게 나섰다. 겉으로 보면 나의 행동이지만, 내면으로는 그녀가 나보다 훨씬 강한 여자였다. 우리를 워커힐 호텔의 방 하나를 빌려 신랑과 신부, 그리고 주례 세 사람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신촌 이화여자대학교 뒤 산동네에 두 평짜리 셋방을 얻었다. 석유곤로와 등산용 코펠, 그리고 스펀지 요와 이불이 살림의 전부였다. 한 지붕에 열 가족이 세 사는 집의 2층 구석이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하영은 이대 미대 대학원으로 진학을 해서 학교에 계속 다니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고통스러운 시기였을지 모르지만, 내게 그 시절은 달콤한 꿈같은 세월이었다. 아침에 노란 양은 찜통을 들고 아래로 물을 길러 가면서도 즐겁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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