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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같은 사람 말도 믿어주나요?

운영자 2010.11.19 17:45:48
조회 247 추천 0 댓글 0

  저는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양승춘이라고 합니다. 엄 변호사님께 조심스레 제 사건을 의뢰 드리고 싶어서 펜을 들게 되었습니다.


  먼저 제 얘기를 써볼까 합니다. 지금 저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일에 지목되어 어려움과 고초가 심합니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기만 합니다. 변호사님께서 서울구치소에 오시는 일이 있으면 꼭 좀 뵙고 싶습니다. 평소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염치없는 짓인지 모르겠으나 저도 도움을 얻고 싶습니다.


  처음 드리는 서신에 너무 예의 없이 구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도 듭니다. 하오나 제 입장에서는 도저히 다른 표현을 슬 수가 없습니다.


  사무실로 이처럼 도움을 청하는 편지들이 많이 온다. 대부분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억울한 사람이라는 하소연이다. 그래서이지 격정과 일그러진 분노가 가득 담겨 있기 십상이다. 그에 비해 이 편지는 짧지만 자신의 상황을 뚜렷이 밝히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 나는 양이라는 청년을 만나기 위해 서울구치소 접견실로 들어섰다. 곧 작달막하고 재간 있어 보이는 양승춘 씨가 들어왔다.


  “저희 같은 사람 말도 믿어주나요?”

  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철저히 불신을 받아온 사람의 자조 섞인 푸념이었다.


  “물론 믿죠. 나중에 가서 거짓말이 밝혀지고 속은 걸 알더라도, 일단 믿어야 변호를 할 거 아니겠어요?”

  “변호사님의 글들을 읽어보니 종교인 같던데, 맞나요?”


  “믿음을 가지려고 매일 기도하고 있죠.”

  “저도 하나님을 믿게 됐어요. 하지만 하나님을 빙자해서 동정을 구하거나 거짓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는 나름대로의 자존심을 가지고 있음을 은근히 내비치고 싶어 했다.


  “일단 모든 걸 믿을 테니 말해 보시죠.”

  내가 재촉했다. 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진실이 담긴 눈빛이었다. 나 역시 진지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다.


  “전에 강도짓을 했어요. 형을 다 살고 나와서 사는데, 동네에서 강도사건이 났어요. 그런데 그 강도범이 저라는 거예요. 정말 제가 한 짓이 아니거든요. 이런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죠? 정말 돌아버리겠다니까요.”

  그는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사건의 전말을 들려주었다.


  몇 년 전 그는 친구들과 함께 공중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을 칼로 위협해 돈을 빼앗으려 했다. 피해자가 돈이 없다고 하자 다음날 지정된 장소로 돈을 가져오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다음날 약속한 장소로 돈을 받으러 갔다가 잠복한 형사에게 검거되어 징역을 살고 나온 거였다.


  “그렇게 강도짓을 했으니 의심받아도 어쩔 수 없죠.”

  나는 일단 지난날 그가 저질렀다는 범행을 탓했다.


  “저도 미련했죠. 다음날 돈을 주겠다고 한 말을 진짜로 믿고 갔다가 잡혔으니 말예요.”

  그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 이번 강도사건의 내용은 뭐죠?”

  “공소장을 보니, 제가 절도를 하러 남의 집에 들어갔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관에게 쫓기게 됐다는 거예요. 도망가다가 서 있는 택시 기사를 위협하고 택시까지 빼앗아 달아났다는 거죠. 저, 정말 그런 짓 하지 않았거든요. 알리바이도 있어요.”


  ‘알리바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가 선수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감옥살이 몇 년이면 법도 잘 알고, 변호사도 가지고 논다. 그런 사람을 여러 번 만났었다.


  “그럼, 경찰관이나 택시 기사가 증인으로 나서면 정확하게 밝혀지겠군요.”


  “그 사람들이 범인이 저라고 증언하니까 미치겠다는 거죠.”

  그가 펄쩍 뛰며 내뱉듯 말했다.


  “경찰관은 수사 실적 상 그렇다 치더라도, 택시 기사야 무슨 억하심정으로 애매한 사람을 강도로 만들겠어요? 이상하군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강도짓을 했다는 그 시간에 전 운전학원에서 교습을 받고 있었어요. 또 아는 사람과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고요. 정말예요. 재판장이 사실조회를 해보면 범행시간에 제가 현장에 없었다는 게 당장 밝혀질 텐데, 법정에서는 증인 말만 믿고 제 말은 믿어주려 하질 않아요.”

  나 역시 그의 알리바이보다는 택시기사의 증언이 더 신빙성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가족은 당신 말을 믿나요?”

  “강도짓으로 이런 곳에 드나드니까 집에서도 반신반의해요. 하지만 정말 안했으니 미치겠어요.”
 
  나는 정말로 그가 강도범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에서 재판을 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세상이다. 고소인이 검다고 하면, 피고인은 희다고 한다. 두 명의 공범이 잡혀 들어와도 서로 범행을 하지 않았다고 잡아뗀다. 진실은 하나인데, 상반된 두 개의 주장이 끝까지 팽팽히 맞선다. 재판장은 오 엑스 문제를 풀듯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거짓말쟁이들이 더 논리적이고 증거도 확실한 경우가 많다. 숱한 교란작전 속에서 솔로몬 왕처럼 지혜롭게 진실을 밝혀내야 하는 재판장을 보고 있노라면 머리털이 쭈뼛해 온다. 믿어야 할 것을 못 믿고, 미지 말아야 할 것을 믿을 때 덮쳐오는 피해의식은 핵폭탄보다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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