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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의 초상 1

운영자 2010.11.02 14:37:49
조회 543 추천 0 댓글 1

  대학 3학년 여름, 나는 책과 담요 두장, 그리고 최소한의 생활도구가 담긴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메고 청량리 역에서 태백선을 탔다. ‘고래 잡으러 동해로 떠나자’는 송창식의 노래가 유행하던 때였다.

  온통 탄가루로 검은 황지의 한 절간 구석방에 나는 객승같이 묵기 시작했다. 이따금 마을 거리로 나가면 교대를 하는 광부들이 좁은 비포장 길을 가득 메웠고, 판자로 덧댄 간이주점에도 돼지비계와 소주로 속을 닦아내는 광부들이 북적거렸다. 고시 공부는 명분이었고, 나는 그저 방랑자 같은 기분이었다.

  목조로 된 광업소 사무실로 가서 국수를 얻어먹기도 했다. 달아오른 둥근 무쇠난로 위에 놓인 노란 양은냄비에서 물이 끓으면, 사무실 직원이 벽장 안에서 바짝 마른 국수다발을 한줌 꺼내 냄비에 집어넣는다. 빳빳했던 마른 국수가락이 스르르 녹아 냄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면, 난로 옆에 앉았던 광부가 인정 담긴 국수를 한 그릇 떠주면서 말했다.

  “학생, 나중에 판검사해서 우리같이 못 배운 놈 잘 봐도라.”

  쏴아 하고 기세 좋게 흐르는 냇물 소리를 들으면서 절로 돌아오다가 바닥에 벌렁 드러누우면, 밤하늘에 뜬 별들이 보석을 뿌려놓은 듯 아름다워JT다. 생맥주며 통기타, 그리고 담배연기에 찌든 서울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신선함이었다. 밤하늘의 별은 고개를 젖히고 보는 게 아니라, 누워서 정면으로 응사하는 것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절의 밤은 완전한 정적이었다. 나는 책을 펴고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다. 그러나 법학은 나와 맞지 않았다. 읽을수록 흥미가 생기고 거기에 빠져들어 가야만 공부가 제대로 되는 법이다. 하지만 두툼한 책 속에 박힌 검은 활자들은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나 역시 알 듯 모를 듯 비비꼬인 말로 논리의 게임을 하고자 덤비는 법서에 아무런 흥미가 일지 않았다. 검은 숲 저쪽에서 들려오는 처연한 새 울음소리가 오히려 마음을 뒤흔들어 놓곤 했다.

  그 절에는 특이한 인물이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최라는 남자로, 법대를 졸업하고 이 절 저 절 떠돌아다니다가 30대 중반이 된 사람이었다. 홀어머니가 청진동 해장국 골목에서 빈대떡을 부치며 아들 뒷바라지를 한다고 했다.

  “나도 고시에 합격해서 한번 잡아볼 거야.”

  넉넉지 못한 지원과 영양부족으로 그의 양 볼은 움푹 파여 나이보다 훨씬 늙은 영감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고와 마음은 아직 10대 소년 시절에 묶여 있었다. 어쩐지 그는 합격하지 못할 것 같았다. 욕망만 가득했지, 10년을 더 공부한 실력이 나보다 나을 게 없었다. 그의 얼굴에서 훗날의 나를 보는 것 같은 서글픔이 느껴질 때면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곤 gOT다.

  두 번째 인물은 그 절에 있는 중이었다. 새벽 예불의 목탁 소리가 청아하게 울리고 독경이 이어진 후면, 내 방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졸린 눈으로 조그만 유리창을 열면 창 밖에 그가 우뚝 서 있었다.

  “학생, 향 있으면 두 개비만 빌려도.”

  담배를 얻으러 온 것이었다. 목탁을 쥔 그의 얼굴에 미안해하는 미소가 살짝 비쳤다. 책상 위에 놓아둔 담뱃갑에서 담배를 빼주면 그는 소중히 받아들고 요사채 쪽으로 사라졌다.

  ‘중이 됐으면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될 거 아니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게다가 그 중은 성병에 걸렸는지 끓인 유리주사기가 담긴 양재기를 옆방의 최에게 가져와 하루에 한 번씩 주사를 맞곤 했다. 군 시절 위생병으로 근무했다는 최는 고농도의 항생제라 놔주기가 두렵다고 말하곤 했다.

  몇 명 안 되는 절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전시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또 다른 앞날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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