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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그 죽음에 이르는 병을 딛고 2

운영자 2010.11.09 11:04:06
조회 376 추천 0 댓글 0

  소포 안에 들어 있는 책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공부해 보기로 결심했다. 시험까지 몇 달이 남아 있었다. 저녁에 퇴근하자마자 한 두 시간 눈을 붙였다가 밤 10시쯤 일어나 다음날 새벽까지가 공부 시간이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법서를 대했다. 지금까지는 공부한 게 아니라 하는 척만 한 것이었다. 고시생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만을 즐겼던 셈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가서 나의 뜻을 밝혔다.


  “고시도 되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아무나 다 되는 줄 아냐? 그 동안 내가 속았던 거야.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려도 안 되는 판에, 계집 얻고 자식 낳고 직장 다니면서 공부는 무슨 공부냐, 아예 관둬라.”


  어머니는 내게 더 이상 조그만 희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천으로 이사 오면서부터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감정의 앙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내도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미대 대학원을 마치고 강사로 대학에 나가고 있는 아내는 작품도 해야 하고 교수도 되는 게 꿈이었다. 무능한 남편과 아직 어린 아이, 그리고 가난이 그녀의 멍에가 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아침 우리 부부는 심하게 다투었다. 아내는 딸 정아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혼자 부대의 야전침대에서 며칠 잤다. 가뜩이나 내게 섭섭한 감정을 품고 있는 처가에 가서 빌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장모는 딸에게 언제든지 싫으면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는 분이었다. 이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엄습했다.


  1주일째 되는 저녁이었다. 부천역 앞 지하상가를 지나던 나는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상점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음악을 들었다. 가수 김세환이 부르는 찬송가였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꿈속에서 들리는 것 같은 감미로운 멜로디와 누군가의 강한 명령 같은 가사가 마음속으로 밀물져 들어왔다. 나는 그 상점으로 들어가 김세환의 찬송가 테이프를 몇 개 닥치는 대로 샀다. 어떤 암시와도 같은 게 뇌리를 쳤다. 나는 급히 언덕위에 있는 나의 빈 아파트로 달리기 시작했다. 썰렁한 빈방에 들어가자마자 부리나케 아내가 묵고 있는 처남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처남댁이 내 목소리를 듣자 아무 말 않고 아내를 바꿔 주었다.

  “당신이야? 나야.”

  “..........”


  아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거라고 하는데, 내가 잘못했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내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밖에서 지나가다가 그런 찬송가를 들었어.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해야 한다는데, 그 말이 맞아. 내가 그렇질 못했어.”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집으로 올래?”

  “데리러만 오면 나야 언제든지 갈 준비가 돼 있죠.”


  아내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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